겨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받아들임이 우선이다.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는 건 누구에게나 춥고 힘든 일이다. 봄의 전령사 매화에게서 투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서슬 푸른 기운을 품었으나 고요하면서도 고운 자태를 지녔다. 봄이 오는 것도 꽃이 피는 것도 저 혼자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요란하고 교만한 얼굴을 짓지 않는다. 고아함과 은은한 향취는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매화 앞에 서면 나를 살피게 된다.

탐매여행을 떠났다. 이번엔 아예 가까이 두려고 섬진강 매화마을에서 청매와 홍매 두 그루를 데려왔다. 키는 작지만 고운 꽃송이들을 달고 자신의 존재를 꽃 빛으로 드러내고 있다. 화분에 담아 집 안에서 키울까 하다가 학원 입구 화단에 나란히 심었다. 드나드는 아이들에게 봄을 배우게 하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춘심을 전하고 싶었다. 다정한 모습이 오누이 같기도 연인 같기도 하다.

아침나절 시작된 비가 종일을 그칠 줄 모르더니 밤새도록 추적추적 내린다. 봄 가뭄을 걱정하던 터에 내린 반가운 봄비인데 얄궂게 느껴지는 건 무슨 심사인가. 어둠 속에서 비를 맞고 서 있을 어린 매화들 생각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아직 매화도 흙도 서로를 꽉 붙들지 못하고 헐거운데. 자꾸 밀려드는 알 수 없는 이 불안감은 뭘까. 마음을 주니 근심이 따라온다.

뒤척이다 늦게 잠이 들었는데, 눈부신 아침 햇살이 나를 깨운다. 매화에게 달려갔다. 땅이 푹 패여 구멍이 나 있다. 홍매가 사라지고 없다. 내 가슴에도 텅 빈 구멍 하나가 패이고 만다. 몸과 마음이 자꾸 두리번거린다.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밀려든다. 진정이 되지 않는다. 홍매 빈자리에 말뚝을 박고, 날 선 말로 꽃 도둑의 가슴을 찔러야겠다고 머릿속에서 문장을 완성해나간다. 그를 향한 것이었는데 내 가슴이 먼저 찔리며 아프다.

홀로 남은 청매가 쓸쓸하고 측은해 보인다. 제 고향에 살도록 그대로 두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미안하다,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집 앞 놀이터에 새하얀 등을 달고 있는 목련이 나를 쳐다보며 말 거는 것 같다. 동백꽃 그늘 아래 제비꽃은 더 할 말이 있다는 눈치다.

 “다 봤다.”고, “그 마음 다 안다.”고.

1년 전 이맘때, 아이들이 오늘만은 틀에 박힌 공부에서 기필코 벗어나겠다는 기세로 단체로 작당을 하고 나섰다. 예전 봄처럼 매화를 보러 가자고 성화다. 땡땡이를 치고 싶은 녀석들의 속셈을 눈치 챘지만, 근처 야산에 있는 매화 소식이 나도 궁금하였던지라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그동안 배웠던 봄노래들을 부르며 폴짝대며 앞장선다. 봄이 또 다른 봄을 찾아 나서며 즐거워한다. 내겐 봄보다 더 봄 같은 아이들이다.

상기된 표정으로 매화 곁으로 다가가는 아이들의 환하고 볼그레한 얼굴이 꽃을 닮았다. 우리 매화에게 인사하자. 매화 옆에 졸졸이 함께 선다. 푸른 산과 흐르는 물처럼 만고상청(萬古常靑)하며 살자는 이황 선생님의 시조 <청산은>을 옛 곡조에 얹어 함께 부른다. 맑은 소리가 골짝에 울려 퍼진다. 아이들이 나비처럼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새처럼 재잘거린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할머니 한 분이 꽃 따지 말라며 고함지르신다. 꽃송이에 손을 뻗던 아이들이 놀라 멈칫한다. 기세가 잠시 꺾이는 듯하더니, 덩치 큰 녀석들이 빠른 동작으로 매화를 따서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키 작은 아이들은 땅에 떨어진 꽃을 줍는다. 맨 뒤에 따라가며 나도 슬쩍슬쩍 한다. 봄을 훔치고 싶은 마음을 어찌 말릴까.

봄이 오는 길목엔 매화만 피어있는 게 아니었다. 붉은 동백꽃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키 작은 야생화들도 수줍은 듯 피어있었다. 내가 다들 앉아보라며 제비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조그마한 게 너무 예쁘고 훌륭하지 않니.” 하였더니, 민서가 그 작은 몸짓에 반해버렸는지 그만 뿌리째 뽑고 말았다. “우짤낀대?” 여자아이들이 책임질 수 있냐며 눈초리를 흘기며 달려든다. 녀석이 무안해한다. “와 내가 잘 살게 하면 될 거 아이가.” 유혹을 끝내 떨치지 못하겠던지 결국은 제비꽃을 들고 와 학원 입구 화단의 동백나무 옆에 심어 놓았다.

교실로 돌아와 아이들 앞에 찻잔을 하나씩 내어놓으며, 내가 챙겨 온 매화 봉오리들을 잔에 담아 따뜻한 물을 부어주었다. 입을 꼭 다물고 있던 매화가 서서히 꽃 몸을 연다. 그 모습에 모두 흥분되어 아이들이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다. 찻잔을 코에 대고 향기에 취한 듯 안색이 볼그레한 아이, 작은 입술을 찻잔에 대고 맛을 깊이 음미하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이, 다들 매향에 단단히 취한 기색이다.

시 한 수씩 적어보자고 주문했다. 오감이 열리고 감성이 충만해졌는지 별말 없이 따른다. 다들 시심이 가득 찬 모양이다.

길이 애매모호해서 이리 오르고 저리 오르며 서로 손 잡아주고 뛰어내렸던 장면을 생각했는지 ‘길이 없는데 길을 만들면서’라든지 ‘매화를 보러 갔는데 다른 꽃들이 내 마음을 훔쳐갔다’와 제비꽃을 업어 왔던 민서의 <꽃 슬쩍>이란 시가 탄생했다.
                           
                            꽃 슬쩍
                            또 슬쩍
                            (…)
                            계속
                            계속
                            슬쩍하게 되는
                            봄의 유혹

 하얀 종이 위에 자작시를 옮기고 매화꽃이며 동백꽃 야생화들을 붙여 깜짝 시화전을 열었다. 그동안 갈고 닦은 노래며 피아노도 연주하며 작은 음악회를 겸했다. 어린 한량들과 함께한 참으로 아름답고 눈부신 봄날이었다. 

봄바람에 매향이 코에 스친다. 청매가 말없이 홀로 서 있다. 제 빛을 하나도 잃지 않은 모습이다. 자연도 그 무엇도 누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이 세상에 나 자신 외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 또한 나의 주인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할 수 있겠나. 나도 몸을 빌려 잠시 머물다 가는 목숨인 것을.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 갠 뒤 봄 햇살이 눈부시다. 이 봄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홍매는 어디에서라도 꽃다울 것이다. 봄아, 어느 땅 누구의 가슴에서라도 봄답게 피려무나. 

계절이 바뀌었고 그해 겨울을 맞았다. 해마다 맞는 겨울인데도 어쩜 그리 익숙해지지 않는지. 날 선 추위에 살이 에이는 듯하다. 낯선 땅에서 홀로 겨울을 맞는 청매에게 나는 자꾸 마음이 쓰였다. 청매가 머무는 곳이 햇빛이 종일 잘 노는 자리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어느 날 그 곁을 지나는데 언뜻 꽃향기가 스치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며 살펴보았더니 청매가 씩씩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열매를 원하면 백매, 자색이 뛰어나기론 홍매, 향이 빼어나기론 청매가 으뜸이라더니. 어찌나 반갑고 고마운지.

그 모습을 담아 친지들에게도 단체 카톡방에도 전했다. 모두 이른 봄소식에 설레며 기쁨으로 반겼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문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온 봄의 전령사라며 기사로 올렸다. 머잖아 사방에서 희망의 봄을 알리는 춘신이 이어질 것이다. 봄이 가까이 오고 있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