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왼쪽
오른쪽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칼럼 계룡수필
[계룡수필: 윤석희] 봄, 봄, 봄윤석희:수필과비평서수필-문장21서 시 등단/신곡문학상수상/수필집'바람이어라''찌륵소'펴냄/계룡수필회원/눌산문예창작교실수강

팔순의 영갑 할매. 봄 볕 쬐고 있다. 마당 저만치 피어있는 홍매화 바라보며 하루 종일 웃기만 한다. 바보처럼 히죽거리는 것은 아니다. 빤히 쳐다보며 가만히 미소만 진다. 편안해 보인다. 그 웃음 영락없는 부처다. 드디어 해탈, 해탈 한 것이다.

젊어서는 논, 밭 일구며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았다. 모습이며 성정도 후덕하다고 모두들 달덩이라 불렀다. 야물고 성실해서 여느 집 보다 늘 소출이 많았다. 차곡차곡 억척으로 모아 살림이 늘어만 갔다. 동네의 칭찬과 부러움을 독차지 했다.

남편이 추석 성묘 길에 말벌에 쏘여 그만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 때부터 시작된 불행이었나 보다. 인정이 많은 것도 탈이 되었다. 날일 하러 들어온 뜨내기 부부를 정성으로 보살피다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재산을 몽땅 털리고 상처만 남았다. 삶의 근간이던 땅이 없어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댔다. 술과 담배를 찾기 시작했고 사람을 피했다. 그래도 선량하고 바지런해서 여기저기서 땅을 붙이라고 내어 주었다. 흔들리면서도 자식들 거두며 근근이 살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들 셋을 기막힌 사연으로 다 잃고 만다. 바람나서 도망간 아내를 찾아 방방곡곡 헤매다 첫째가 객사했다. 둘째아들은 고도리 배 타고 벌이 나갔다가 선상 싸움으로 창자 터져 주검 되고, 막내마저 여자 집안의 반대로 혼인이 성사되지 않자 풀 약을 먹고 어미 곁을 떠났다.

나쁜 놈들이라고 통곡하던 것도 잠시 뿐이었다. 넋을 내려놓고 산송장이 되었다. 대명천지 낯 들고 살 수 없다고, 죽어서 영감 볼 면목 없다고, 하늘 쳐다 볼 수 없다고 방구석에 처박혀 유령처럼 살았다. 차라리 죽고 싶었을 게다. 눈물도 마르고 삶을 포기한 채 저승사자만을 기다렸다. 그나마 정을 나누며 살아온 이웃들이 다독거리며 몇 해가 흘렀다. 할매는 몇 십 년을 한꺼번에 살아버린 것처럼 쇠잔하고 늙어버렸다.

농사도 작파하고 사람들을 피해 홀로 지냈다. 발걸음이 뜸한 새벽이나 밤에만 잠시 움직일 뿐 집안에서도 죽음의 냄새만 났다. 악착같던 일꾼이 손을 놓으니 동네마저 묵정밭이 늘어나고 점점 황폐해져 갔다. 다정했던 이웃들과도 소원해 졌다. 그렇게 철저히 혼자서 견디고 있었다. 아니 스스로 멍석말이 하고 있었던 게다. 하늘이 내린 형벌을 감수하고 있었다.

볕 좋은 어느 봄날이다. 형기를 마친 수인처럼 느닷없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괭이와 낫과 삽을 들고 밭으로 갔다. 묵혀둔 땅이 동네엔 많이 있었다. 그 밭 가운데로 실성한 사람처럼 뛰어 들어 갔다. 미친 듯 땅을 헤집으며 흙냄새를 맡았다. 냉랭한 겨울이 아직 남아있는. 봄볕에 겨우 기지개를 켜는 연한 새 순을 양손으로 감싸 안으며 울부짖었다. 그리곤 곡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땀과 눈물이 뒤범벅 뿌려졌다. 봄기운이, 봄바람이, 봄 향기가 얼어붙은 마음도 녹이나보다. 고목에도 생기가 돋았다. 나무에 물이 오르듯 나무껍질 같던 육신도 깨어났다. 봄의 대지로부터 강인한 생명력을 수혈 받고 있었다. 돌멩이 투성이 마른 쑥대밭을 일구며 하나 남은 손자를 기여 품었다. 늙은 삭신에도 새 봄을 맞았고 그 치유 덕에 할매는 마지막 열정을 태워 갔다. 

“봄볕이 정말 환장하게 했시야. 골방을 뛰쳐 나왔제. 땅을 파서 흙 냄시를 맡으니 살 것만 같드만. 맨 밭에 서서 하늘이 뚫어져라 고함을 질렀지야. 쑥부쟁이처럼 살겄다고, 아암 손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응께,”

손자 끌어안고 그렇게 살았다. 다 잊은 척, 열병 하듯 달렸다. 하나 남은 핏줄 애지중지 고것만 바라보며 농사에 몰입했다. 결국 손자 몫의 땅도 마련했다. 이제 가을걷이 다 마친 들녘처럼 쉬고 싶었던 게다. 의젓한 손자 장성한 거 보고 안심되어 내려 놓았나보다. 격랑으로 지치고 고단한 삶 휴면에 들어 간 거다. 봄볕에 다시 깨어날 수 있으려나. 치매 속에 세상사 다 묻어버렸으니.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정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