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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자 수필]① '섬, 탈출을 꿈꾸다'심인자/수필가/수필과비평 작가회 전 거제지부장/수필과빕평작가상수상

① 섬, 탈출을 꿈꾸다
                                             심 인 자

 한 폭의 수채화다. 크고 작은 건물들과 짙어가는 녹색의 가로수가 사각 틀에 들어있는 그림 같다. 건물 사이로 움직이는 자동차도 장난감처럼 앙증맞다. 고도가 높아 가는지 이제 보이는 건 푸른 바다에 점점이 뿌려진 섬들이 전부다. 비로소 공중에 떴음을 실감한다. 하얀 구름위에 비행기가 내려앉아 멈춘 듯 움직임이 없다. 참으로 포근하고 고요한 하늘이다. 허공에 떠 있다는 두려움도 잠시,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이제 곧 목적지인 제주도에 도착할 것이다. 이십 삼 년 만의 공식적인 외출이다. 아니, 섬으로부터 탈출이다. 그간 준비하느라 맥이 얼추 빠졌다. 이박 삼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몇 날을 준비했는지 모른다. 날을 세워 다림질한 바지와 하얀 셔츠를 가지런히 옷장에 걸어놓고 몇 안 되는 세탁물까지 손빨래로 끝냈다. 온 집안을 평소보다 더 쓸고 닦아 내가 봐도 정결하다. 평소에 하지 않던 밑반찬까지 따로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과일과 간식거리도 접시에 담아 먹기 좋도록 식탁에 놓았다.
  삼일 동안 큰일 날 일은 없을 것이다. 부재에 대한 불편을 덜게 할 요량으로 나름 메모해가며 꼼꼼히 챙겨놓고 나왔으니. 주어진 삼 일간은 완전히 나를 위해 쓸 것이다. 해방이다. 가슴이 후련하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빠져나와 홀가분히 보낼 일만 남았다. 청소며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으로 찬을 만드나 걱정도 이 순간 끝이다. 
  일 년 전부터 열 명의 친구들과 탈출을 시도해왔다. 다 같이 오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온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긴다. 어려서부터 함께한 오랜 벗이니 거리낌이 없다. 늘 그렇듯 만나기만 하면 철부지 동심으로 돌아가 조그만 일에도 야단법석 시끌벅적 박장대소다. 제주도라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제주의 명소를 샅샅이 돌아보았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다니다보니 종아리가 붓고 발바닥이 화끈거렸지만 놓치고 싶지 않아 강행군을 했다. 성산 일출봉을 비롯하여 우도, 천지연 폭포, 만장굴, 식물원은 신혼여행 때 와서 본 그대로였다. 잠시 추억에 잠기며 남편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린다.
  민속촌을 둘러봤다.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인공미는 완전히 배제된 곳이었다. 현대의 문명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제주 고유의 생활풍습을 간직한 곳이다. 오래 전 제주의 실상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어 인상에 남았다. 유년의 시골의 모습을 많이 닮아있었다. 초가며 장독대, 무쇠 솥을 걸친 아궁이에서 가물가물했던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가족과 한 번 더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안내도우미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제주사람들이 살아왔던 삶을 들려준다. 살아가는 방식이 참 특이했다. 특히 부부의 역할이 어이없었다. 제주말로 유부남은 왕발이고 유부녀는 냉발이다. 갑자기 두고 온 요지부동 나의 섬이 떠올랐다. 얼마나 단단하고 힘센지 아무리 밀어도 당겨도 미동 없는 나의 섬이 이 순간 그리워졌다. 완고한 성격에 잔정 없는 게 흠이지만.
  도우미의 설명이 이어진다. 오래전 제주도는 유배지였다. 대체적으로 양반가문의 죄인들이 유배를 왔다. 비록 죄인이지만 위상이나 기개를 하루아침에 버리지 못했다.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머나먼 이곳에서 달리 할 일이 뭐가 있을 것인가. 농사일을 해봤을 것인가. 물을 길어봤을 것인가. 양반이라는 신분이 하루아침에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졌으나 그간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하는 일이라곤 책 읽기 말고 달리 뭐가 있었을까. 저녁이면 떠오르는 달을 쳐다보며 시 한수 읊조리며 시름을 달랬을 터이니.
  모든 일은 이곳에서 얻은 아내 냉발이의 몫이었다. 집안을 꾸려가는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왕발이를 왕처럼 모시며 수발을 드는 것도, 물질하는 것도, 농사짓는 일도, 물 긷는 것도, 아이 보는 것도 모두 혼자 해내야했다.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판국이다. 어찌 이 많은 일들을 다 감당하며 군소리 없이 살아나갔던 걸까.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나름의 방식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됐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살아야한다는 이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섬에 대한 매력이 뚝 떨어진다. 다들 가보고 싶어 하는 섬, 제주도. 신비한 절경과 고고한 전설을 지닌 낙원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제주도엔 감당하기 더 벅찬 큰 섬이 턱하니 버티고 서 있었음이다. 조금 무뚝뚝하고 정 없어 보이지만 수발들고 물질하고 농사짓는 일을 강요하지 않을 섬으로 하루 바삐 돌아가야 한다. 서둘러 이 섬을 벗어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미동도 않는 나의 섬을 향하여.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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