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우 광 미
 
 

전자레인지의 기능은 음식을 데우는 데 있다. 또한 녹이는 일도 한다. 데우는 일도 녹이는 일도 알고 보면 음식물에서 차가움을 없애는 일이다. 애초의 온기를 되찾아 준다. 그렇다고 언제든 원할 때 음식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것은 아니다. 수분이 없는 것은 데울 수 없다. 그것이 품고 있는 수분으로부터 데워지기 때문이다.

수분은 자신이 가진 사랑이란 본성에서 비롯된다. 가끔 눈에 감지되는 현상만으론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김이 나는 것을 보고 어림짐작으로 성급히 꺼냈다간 표면의 차가움에 놀라기도 한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데울 일이다. 이렇듯 모든 관계는 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감정의 동심원을 그리며 시간 속에 투영될 때까지. 묵은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면 온기를 찾기까지는 더 많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서로 신뢰를 쌓는 건 작은 데서 비롯되고, 깊어간다는 건 시간에 비례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녀와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우린 오래 전 문화강좌에서 만났다. 우연히도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어 서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종강 후 내 기억 속엔 잊힌 사람이었다. 얼마 전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정확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호의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니 시간이 전보다 여유로운 편이라 했다.

그 이후 선약도 없이 그녀는 초인종을 누르고 방문하곤 한다. 느닷없이 방문하여 자신의 대인관계를 털어 놓는다. 사람들과의 사소한 처신 문제, 친구들과 식사비를 계산하는 과정에서의 문제. 마치 애써 참아왔던 발설의 욕구를 충족하는 사람처럼 상처받고 이해받지 못한 경험에 대해 털어 놓는다. 일방적인 그녀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나는 그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고 오히려 생각은 틀 속에 갇힌 나의 내부로 향한다.

일상적으로 살아오던 나의 방식과 너무도 다른 그녀가 당혹스러웠다..보수적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나는 남의 집을 갈 때에는 미리 연락을 하고 화장실도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 몸에 밴 습관이다. 한 아파트 같은 통로에 살고 있어서 내부구조에 익숙한 그녀는 제 집처럼 자연스레 행동했지만, 내 마음은 너그럽지 못했다. 서로 다름과 정서의 차이라며 스스로 안으로 삭이고 있을 무렵 그녀의 초대를 받았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보니, 나름 정성을 다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이 식었다며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데워서 식탁 위에 내려놓은 음식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장기가 있어 한입 넣는 순간 고루 데워지지 않은 것을 알았다. 충분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히 꺼내온 탓이리라.

덜 데워진 음식을 내색하지 못하고 입안에서 굴리다보니 영락없는 나였다. 거침없이 다가서는 그녀의 행동에 한 마디 내색도 못하고 인내하는 내 모습이 여기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나의 관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해 제대로 데워지지 않은 음식처럼 여겨졌다. 그녀에 의해 수시로 전자레인지 안에서 돌아가는 우리 관계도 성숙을 위한 시간의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사람간의 관계는 시간을 두고 익어가는 것이지 내가 원한다거나 누군가의 일방적인 감정으로 갑자기 데워지는 건 아니다. 감정의 부피에 맞는 시간과 지속적인 관심으로 수분도 데워지게 되는 것이리라. 때로는 데워진 음식도 꺼내는 걸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게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보면 언제 그 자리에 있었나 싶기도 하고,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나도 누군가를 이렇게 뜨겁게 데웠다 식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 속에서 식어버린 것에 대하여 늦은 자책을 해 해 본다.

“조금만 더 고루 데우면 훨씬 맛있겠는데.”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다시 타이머를 맞추고 전자레인지 앞에서 기다리고 섰다. 음식은 충분히 데워질 것이다. 표면이 조금 건조해질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하고 누군가를 쉽게 받아들인다는 건 자신을 편하게 하는 길이지만 상대에게는 부담을 주는 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형식과 절차 오히려 그것이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들고 상대에게 가는 시간을 더디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다시 데우려고 한 그녀의 생각 편에 선다. 복잡하게 재어보고 틀에 가둔 나의 문을 열어 상대를 이해하려 해 본다.

사람의 관계란 정해진 자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감성으로 만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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