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고  
 
  

또 가을이 왔습니다. 세상에 와서 처음 맞는 것 같은 예사롭지 않는 이 가을입니다. 계절은 때 맞춰 오고가는데 왜 이렇게 가을의 모퉁이에서 지망없이 서성이고 있는 지, 표현할 수 없이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낙엽이 뒹구는 거리에 허리 굽고 걸음마저 위태한 노인의 뒤를 내가 따라가고 있습니다. 나는 노인의 젊었던 날을 떠 올리며 낙엽 한 잎을 주어 손에 꼭 쥐어 봅니다. 바스락 소리가 가냘프게 들립니다. 문득 가깝게 느껴지는 나의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머잖아 낮선 곳에서 지금보다 완숙한 노년을 마주할 것이라 되뇌어 봅니다. 입가에 까닭모를 웃음이 돕니다.

사람은 살아보고 현실에 직면해보아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 사소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으며 손 내밀면 가깝다는 이유로 무관심했던 내 자태가 죄송할 뿐입니다. 여태 살아오면서 새로운 만남도 많은 이별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고향을 떠나 먼 타향으로 가는 이별 같은 이별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칠십 여년의 세월이 오롯이 이곳에 녹아서 나의 삶을 만들어 왔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영면해 계시고 형제간의 추억들이 낱낱이 서려있는 이 자리입니다. 몇 십 년을 친 동기간처럼 지나온 친구들을 마주하면 목소리에는 어느 사이 너나없이 짙은 이별의 물기가 서립니다.

육십 중반쯤 처음으로 오직 나만의 의미를 찾아 낯선 수필을 만났습니다. 우연은 아닙니다. 마음은 늘 갈망했지만 여의치 않는 환경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수필과 처음 만났던 그 순간, 글은 두고라도 젊은 딸 같은 문우들의 만남에 새로운 청춘을 맛보았습니다. 언제 들어보았는지 모를 교수님의 강의는 나를 흠뻑 빠지게 했고 그들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습니다. 목적을 위한 테두리 안에서 글 한 편 쓰려는 욕심으로 깊은 사색에 빠져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은 내 인생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인연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의문이 앞섭니다.

어떤 분들은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살다 늙어지면 다시 고향을 찾아온다고 합니다. 지금 이 나이에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간다는 일은 상상만 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 때는 그토록 이 섬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나의 나약함도 있었겠지만 부모님의 사랑에 결국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 감정들을 꾹꾹 눌러 덮고 오래오래 살아 온 이  곳은 언제나 오는 이를 맞이하고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자리라 믿었습니다.

한 고장에서 칠십 여년을 뿌리박고 살았으니 떠나기가 수월치 않다는 생각은 그이도 나도 과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 남편은 더욱 말수가 적어지고 시무룩한 표정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안위보다 자식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몸이 불편한 한 손가락을 생각합니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생을 누리게 하고 싶습니다. 같은 또래가 활달하게 생활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힘으로는 부족하니 젊은이의 힘을 얻어 더 넓은 세상을 여행시켜주고픈 마음 간절합니다. 어느 부모라도 아픈 손가락을 가진 마음은 비슷하리라 믿습니다. 우리에겐 이런 현실을 같이 나누어 줄 건강한 손가락이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 사실이 가슴으로 날마다 고맙습니다. 여태 살아온 내 삶이 헛되지 않았느냐고 자문도 합니다. 엄연한 사실이 머리론 정리가 안 되고 남의 일만 같이 여겨집니다. 마치 연기가 되어 실체 없이 온 집안을 떠도는 듯합니다. 시월 한 달은 그렇게 어영부영하게 보냈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겁낼 것도 불안해할 것도 없고 더욱이 자식이 행하는 일을 한 번도 의심해 본적도 없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마음이 나약함은 나이 들어 용기가 줄어든 탓인가 봅니다.

창밖에 가을바람 소리가 싸하게 들립니다. 만추의 거리에 소슬한 바람이 낙엽을 몰아갑니다. 모두가 세월이 흐르는 소립니다. 흔히들 인생을 길에 비유합니다. 길의 끝자락쯤을 노년이라 이름 붙입니다. 노년 또한 삶의 일부분이고 그 속에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익혔던 것들을 미지의 땅에서 내 특유의 호기심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려합니다. 생각하면 삶이란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칠십이 되고 팔십이 되어도 생명이 있는 한 또 새롭게 형성되고 변모하는 세상입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자식의 거름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조용하고 온화한 삶이 되어 줄 것을 소망합니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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