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천둥소리에'
                                                      심 인 자

장대같은 비가 줄기차게 쏟아진다. 며칠 전부터 계속되는 비로 인하여 마음이 심란하다. 낮게 내려앉은 회색 빛 하늘이 양어깨를 짓누르는 듯 무겁게만 느껴지는 오후이다. 찌는 더위가 차라리 지금보다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집안이 온통 후텁지근하고 눅눅해서 몸살이 날 지경이다. 이런 날은 종일 답답하고 우울해 번잡한 생각만 든다. 그 생각을 피해 달리 할 일을 찾아보지만 별로 없다.
  저녁 무렵부터 번개가 어두운 밤하늘을 조각내며 번쩍거린다. 연이어 천둥소리도 한몫을 한다. 그 통에 정전이 되었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번개가 토해내는 날카로운 빛뿐이다. 비는 더욱 더 세차지고 마치 지붕을 때리는 듯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순간 이불을 뒤집어쓴다. 아이들이 바짝 내 옆에 붙는다. 남편이 이 광경을 본다면 한소리 할 것이다. 
  매년 겪는 일이다. 벗어나야지 하면서도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귀를 막으며 안절부절못한다. 사실 집 주위 높은 곳에 피뢰침이 있으니 벼락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죄를 지어서도 아니다. 단지 우레 같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의 두려움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니 아마도 예닐곱 나이였을 것이다. 우리 집은 바다를 낀 작은 동네였다. 섬이라 대처를 이어주는 여객선이 하루에 몇 차례 있어 아침 일찍 사람들을 태워 나갔다가 저녁에 도로 실어다 주었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겸 또래 아이들과 선착장에 나가 놀았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와 비를 피하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올망졸망한 보따리를 들고 우리 집 처마 밑에 섰다.
  그 날 배가 뜨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은 날씨인 것 같은데 주의보가 내려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만 것이다. 비가 뜸해지자 대처로 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를 뜨는데 그 아주머니만 서 있었다. 마음이 쓰였다. 그 때 마침 복이 언니가 와서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집에 가야하는데 배가 없으니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른 동네에 가서 연락선을 타면 가까운 뭍과 연결이 되어 집으로 갈 수 있다고 얘길 해주었다.
  또래아이들과 나는 복이 언니가 시키는 대로 아주머니 짐을 들었다. 동생이 따라오겠다며 억지를 부렸다. 싫었지만 자꾸 보채는 통에 하는 수 없어 데리고 갔다.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집과 점점 멀어진 불안했다. 집에 돌아가려는데 아주머니가 나를 붙잡았다. 조금만 더 가면 맛있는 과자도 사주고 돈을 주겠다며 작은 보따리를 내 손에 잡혀주는 것이었다. 이웃집 언니가 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어 아주머니 뒤를 따랐다. 낯선 동네를 지나고 또 지났는데도 걸음은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집에 가고 싶었지만 말이 떨어지지 않았고 설사 보내준다 해도 우리 집까지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굵은 비가 뚝뚝 떨어졌다. 순식간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억수같은 비가 퍼부었다. 번개가 번쩍거리며 세상이 무너지는 듯 벼락소리가 났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이었다. 이대로 서있다가는 정말 벼락 맞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이 마구 떨렸다. 추위보다는 두려움이 더 커서였을 것이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남의 집 앞에 서서 비를 피했다. 꾹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서럽고 무섭고 집이 그리웠다. 낯선 집 처마 밑에 웅크린 채 섧게 울었다. 집에 데려다 달라며 아주머니에게 빌다시피 하고 있는데 까만 우산 밑으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우리 언니들이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언니 가슴팍에 무작정 들이밀었다. 너무 반가워 나무라는 언니가 무섭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긴 외출을 했고 돌아왔다. 그러나 언니의 간단한 꾸중으로는 끝나지 않을 만큼 나의 외출은 큰일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평소 잘 쓰지 않는 골방에 불려 들어갔다. 그 때 어머니 표정이 얼마나 냉랭하고 무서웠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문고리를 잠근 후 회초리로 나를 때렸다. 회초리소리가 날 때마다 종아리에는 하나 둘 붉은 자국이 생겨났다.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머니가 화를 내신 것도, 매를 엄청 맞은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온통 멍 자국으로 얼룩졌지만 큰소리로 울 수조차 없었다. 
  그 날, 온 동네가 난리였었다고 한다. 퍼붓는 장대비속에 어린 두 딸아이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이리저리 수소문하다보니 남 따라간 것을 알게 되었고 곧장 그 길로 식구들이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부잣집에 데려다 파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다시는 남 따라가지 못하게 쐐기를 박느라 그랬을 것이다. 식구들은 내게 ‘그 때 따라갔더라면 남의 집 식모(食母)로 팔려 다니며 구박 데기가 되어있을 터’라고 겁을 주었다. 한동안 나는 집을 잃고 헤매다 막상 찾으면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깨어버리는 악몽을 꾸곤 했다.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니 잊을 때도 되었다. 그러나 장마가 오고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면 그 기억은 내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다 어느 사이 소리 없이 일어선다. 힘겨워 신발을 끌며 걷던 일. 천둥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트리던 일. 어머니의 무섭던 표정과 회초리 소리. 밤새 울음이 그쳐지지 않아 애먹던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을 주겠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혹해 따라갔던 일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식구들에게 미주알고주알 그 날 일을 소상하게 일러바쳤지만 돈에 대해서만은 말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지만 그런 유혹에 빠져 남을 따라 간 것이 못내 부끄럽고 후회되었기 때문이다.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천둥소리도 뜸하다. 그동안 천둥이 치면 왜 사색이 되어 구석으로 숨어들었는가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얘기를 글로 대신해야겠다. 놀릴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해할지도 모른다. 유년시절, 즐거웠거나 부끄러웠던 추억 몇 가지를 가슴에 담고 있을 지도 모르기에 말이다. 
  비 소리가 천둥과 함께 점점 멀어지고 있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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