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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미 수필]⑨ 도침(搗砧) ''우광미/수필가/궤적을 찾다 저자/ 한국 문인협회 회원

⑨ 도침(搗砧) 
                                       우       광      미

해가 기울자 바깥은 마치 도량처럼 정(靜)하다. 가을공기에 풀벌레 소리는 더욱 또렷이 들린다. 이런 적막을 깨고 방문 너머 무언가 창호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다닥, 엷은 인기척 같아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불빛을 향해 저돌적인 비행을 하던 하루살이와 나방들만 툇마루에 널브러져 있다.
  불을 끄자 잠시 풀벌레소리가 약해지는가 싶더니 방안엔 어둠이 내리고 어둠이 짙었던 바깥은 달빛으로 환하다. 창호지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은 내 영의 불빛을 환히 밝혀주는 듯하다.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선 것만 같다. 욕망의 불을 내리면 이렇듯 환한 빛을 볼 수 있을까. 이 빛은 절로 나의 내면으로 들어와 지난 시간의 궤적을 찾아 나선다.
  빛은 맨살의 한지(韓紙)를 넘어 들어온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울고 나서야 단단해지는가. 지상에 잎들을 내려놓고 맨몸으로 맞은 나무의 지난 생이 틈 사이로 들어온다. 이것에서 문득 숨결을 느낀다.  
  한지에는 닥나무의 생애가 담겨 있다. 올곧은 한지가 되기까지 닥나무는 가마솥에 열 시간 이상 삶겨 세속의 번뇌로 단단해진 껍질을 벗겨 피닥을 만든다. 이를 다시 말린 후 장시간 물에 불려서 남아있는 흑피를 벗겨내고 메밀짚을 태워 만든 잿물에 맨살을 삶아낸다. 저승의 문턱을 넘는 듯한 고통도 이겨내야 한다. 천년을 변치 않는 한지의 비밀이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도 끊지 못한 질긴 연의 집착이 있을까 하여 볕에 말려 다시 티를 골라낸다.
  이후 방망이질인 도침이 시작된다. 이 과정을 수백 번 거쳐야 종이의 밀도가 높아져 섬유질을 형성한다. 또한 한지는 추운 겨울 맑고 차가운 물에 들어가야 한다. 칼바람 속에 자신의 몸을 탄탄하게 죄어 빳빳한 힘을 가지고 광택을 더한다. 해탈을 향해 끝없는 수행을 하듯 문살에 바른 한지는 대상을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가 가진 틈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단절하지 아니하고 공존의 분리를 보여준다. 가장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으로 모든 물상을 오롯이 받아들인다. 그것을 이해하고 소통한다.  
  한지가 삶의 이완과 긴장을 조절한다면 양지(洋紙)는 실용성과 편리함의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인쇄하여 오래 보관해 두다 보면 잉크가 바래기도 하여 그 목적마저도 상실한다. 그에 반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한지가 천년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우수함을 입증하고 있다.
  처음에 가진 느낌과 표현들이 퇴색해지는 양지와는 달리 한지의 매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내는 데 있다. 배경으로서 본질이 가진 운치를 더해준다. 따뜻한 정도 있다. 기계적인 물질문명의 도구들과 차가운 형광등 불빛조차도 한지 한 장을 덮어 투과해 나오는 빛은 신비하리만치 따뜻하여 정겹다. 그 생의 사연들이 묻어나기 때문일까. 우리의 정서인 은근함까지도 소복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생의 고통은 가혹했다. 잘리고 뜯기고 벌거벗겨져 얼마나 많은 날선 생의 매질에 몸을 맡기고 길들여졌던가. 모든 것의 집착에서 벗어난 듯 물과 불의 상대적인 경계조차도 초월했다. 평범하고 세속적인 한 나무에서 삶을 통찰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감내했던 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저 속에 있다. 어떤 질책도 싫은 내색도 없이 감내한 시간의 교향악이다. 이런 한지의 속성을 알기란 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써 왔던 양지에 더 익숙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회색빛 숲 사이에서 정신없이 살아왔다. 지금 이 시간. 도시에선 들을 수 없었던 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이런 소리는 틈으로 들어오는지도 모른다. 굳이 깊은 산자락에 있는 집필실까지 들어와야 글이 잘 써지는 건 아닐 테지만, 텔레비전과 도시의 네온사인으로부터 떠나왔다. 눈에서 떼기 힘든 휴대전화도 꺼 두었다. 이런 틈을 갈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둠의 적요 속에서 한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본다. 나도 한 그루의 나무였을까. 그렇다면 어떤 나무였을까. 남루한 생의 시간들을 채워가면서 내게 오는 바람이 가장 혹독하다 생각했다. 무상한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신음하기도 했고, 나를 주저앉히던 비린 시간들은 이미 지나쳐 왔다고 위로하기도 했다. 이곳에 와서 온전한 혼자가 되어 달빛이 파고드는 한지를 보지 않고서는 그의 지난 생을 알 수도 읽어낼 수도 없었다. 그의 숲으로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저 단순한 종이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삶의 도침을 견뎌야 나도 저리 될 수 있을까. 지난 삶의 궤적들을 바라보니 이렇게 작아질 수가 없다.
  종이는 두께에 따라 흡습의 정도가 다르다. 오류를 포용하는 깊이도 다르고 압축의 정도에 따라 표현의 한계도 다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삶의 방향에 따라 자신을 내리고 수많은 도침을 거쳐야 부드러운 표면과 강한 생명력을 지닌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전에 백지 앞에서 나는 가끔 공포를 느낀다. 때로는 아무런 흔적도 없는, 누구도 지나간 적 없는 새로운 길에 발을 들여놓는 것처럼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사는 일도 이렇듯 비어있는 종이 앞에서 자신과 독대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방안엔 다시 바람이 든다. 틈 사이로 든다. 드는 건 바람만이 아니다.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한지의 고요한 순응의 미소가 바람소리에 묻어난다. 가을밤을 울리는 마음의 풍경소리가 다시 내게 도침을 요구한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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