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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자 수필]⑭ '코스모스'심인자:수필가/수필과비평 작가회 전 거제지부장/수필과비평작가상수상

                            ⑭   코스모스  
                                                         심 인 자

떠나 버린 여름의 빈자리에 가을이 서 있다. 산책을 한다. 붉게 물든 산이 노을 빛 만큼이나 곱다. 길옆에는 가을걷이가 끝나 논바닥이 반듯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그 논 한가운데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 허수아비가 우뚝 서 있다. 맡은 일에 충실해 온 그의 모습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농부의 얼굴이 겹쳐진다.
  ‘올해도 풍작이려니.’
  들길에는 가을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청명한 하늘로 바쁘게 날아드는 고추잠자리의 비행이 그렇고, 무리 지어 핀 코스모스의 움직임이 그렇다.
  코스모스를 나는 무척 좋아한다. 우리 집 거실 벽에는 코스모스가 그려진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언제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느낌이다. 화려하지 않아 더 정감이 간다. 삭막한 겨울에도 가을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줄지어 늘어선 꽃길을 걸으며 어느 스님의 시 한 구절을 읊조려본다.
                     
                       별을 사랑한 코스모스는
                       붉은 빛깔로 태어나고
                       달을 사랑한 코스모스는
                       하얀 빛깔로 태어나서
                       별을 향해 달을 향해
                       흔들거리는 몸짓으로
                       그들을 부른다.
 
  작은 흔들림에도 우리네 마음을 설레게 하는 꽃, 고향을 그리게 하고 친구를 생각나게 하는 꽃, 색색으로 수를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감상에 젖게 하는 꽃, 그래서 가을이 오면 먼저 코스모스를 떠올린다.
  오래 전,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 암자를 찾았을 때 승복 차림의 여인이 나를 반겼다. 나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 얼굴 가득 환하게 미소 짓던 그녀. 소박하고 꾸밈이 없어 정겹게만 여겨지던 여인. 하얀 피부에 꽃잎으로 물들인 것처럼 두 볼이 붉어지던 그녀를 보며 불현듯 코스모스와 닮았다는 느낌은 왜 들었는지. 어쩌면 그녀가 선 자리에 산문(山門)대신 소담하게 피어있던 코스모스에 눈길을 보내면서였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날의 화려함을 벗고 왜 하필 칙칙한 잿빛 옷으로 자신을 감싼 채 산으로 숨어들었는지 의문을 가져보았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으려니 하면서도 이해하기보다는 그녀에 대한 나의 관심사는 부정적이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깊었거나 사랑을 이루지 못한 한스러움에 속세와의 인연을 끊어버린 것이라고. 그러한 생각도 잠시였다. 내게는 십 수 년을 지탱해온 종교가 있었기에 불교에 대해서는 알려하지 않았다. 암자에 갔던 것은 단순히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부축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녀에 대한 관심은 집에 돌아옴으로서 사라졌다.
  어느 날 내게 우울증이 찾아들었다. 삶의 무상에 가슴이 아렸고 무기력한 나 자신이 싫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면서 한치 앞도 나아갈 수 없는 정체감에 빠졌다. 절망 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두꺼운 커튼으로 빛을 차단한 채 어둠 속에 지내다가 우연히 산사를 찾았다. 해질 무렵 들려오는 범종 소리에 평온함을 느꼈다. 바람에 마음을 씻고 독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솔가지를 건드릴 때마다 울려 퍼지는 그윽한 풍경 소리는 나를 사로잡았다.
  ‘저 고운 소리를 어디에서 또 들을 수 있을까.’
  깊어 가는 가을밤에 수행하는 이의 귓가에도 풍경의 울림은 찾아 들겠지. 차 한 잔에 깊은 상념을 들이키며 정진에 여념 없을 테지.
  불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끝없는 번뇌도 ‘마음’으로부터 온다는 불교의 진리가 가슴에 와 닿았다. 마음을 찾으려 시간을 보내다가 나는 오랜 시간 품어왔던 예전의 종교를 놓아버리고 어느새 불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암자를 찾았다. 계단 끝으로 법당의 추녀가 반쯤 보이고 바람에 풍경이 울고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에 번뇌를 떨쳐 내며 오른 법당 앞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의 여인이 나를 반기며 합장을 했다. 순간 내 영혼의 묵은 때가 씻겨 내렸고 나 역시 합장을 했다. 반가웠다. 아주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그녀는 진정한 수행자였다. 독실한 불자 집안에서 최고 학부를 마치고 깨달음을 이루려 출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얘기를 공양주보살에게서 얻어들었다. 강한 이끌림을 받았다.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포용하는 강인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지금의 만남을 위해 전생에서 우리는 몇 억 겁의 옷깃을 스친 것일까. 전생에서의 인연으로 그녀를 만났고 불심도 얻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찾았다. 부정적이고 관대하지 못했던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시간들을 함께 해준 덕분에.
  내려서는 마당에는 낙엽이 쌓여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흩어진 낙엽들이 비질되고 누군가 깨끗해진 계단을 밟으며 법당을 찾아 들겠지. 
  다리 위에서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이제 이별을 해야 한다. 돌아서는 잿빛 승복에서 향내가 났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외로움을 읽는다. 그 외로움을 털어 내고 싶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별하는 마음이 이런 것일까. 나는 세상으로 나오는 연습을 하고 그녀는 세상을 밀쳐 내고 빗장을 걸겠지. 지난날의 화려한 옷을 벗고 세상의 혼탁함을 털기 위한 몸부림으로 밤새 목탁을 두드릴 테지.
  저문 해를 바라본다. 해는 바다를 붉게 물들인 채 저 너머로 사라지고 곧은 소나무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나를 가린다. 바람이 일어선다. 가을바람의 상쾌함은 가슴속의 혼탁함을 씻어 내리기에 충분하다. 피부를 살짝 스치는가 싶더니 코스모스의 여린 꽃잎들을 쓰다듬는다. 한 팔 가득 안아 본다. 진하지 않은 향기가 코끝을 맴 돈다. 그리운 이를 그리게 하는 여린 감정의 끝자락을 당겨주는 이 꽃이 한없이 사랑스럽다.
  내일은 암자에 올라야겠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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