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콩나물'
                                                       심 인 자

얼마 전 어머니가 시루를 가져오셨다. 자동재배기를 소제하는 일이 번거롭고 귀찮아 중단하고 있다는 얘길 듣고 장에 간 길에 사 오신 것이다. 어머니가 기르던 시루는 컸었는데 내게 가져온 것은 이웃 두세 집과 나눠먹을 정도의 작은 것이었다. 큰 시루는 잘못 기르다보면 뿌리가 썩을 수도 있고 또 우리 네 식구가 먹기에는 양이 많다는 어머니의 생각에서였다.
   시루를 사용하기 전에는 자동재배기에 콩나물을 길러 먹었다. 수시로 물을 주지 않아도 자동으로 알아서 콩나물을 키워준다기에 장만했다. 분무기가 돌아가면서 골고루 물을 뿌려주니 편했다. 검은 보자기를 덮어주지 않아도 되고 또 투명한 통속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자랐는지 보였다. 외출을 해도 안심이었다. 알아서 물을 줄 터이니 무슨 걱정이랴.
   재배기에서 자란 콩나물로 국을 끓였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얼큰한 국을 끓이기도 하고 시린 속을 위해 북어국을 끓이기도 했다. 그 외에 찜이나 무침으로도 밥상에 자주 올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갈수록 물때가 앉아 재배기가 지저분해지는 것이었다. 깨끗하게 닦아야하는 일이 점점 귀찮아졌다. 차츰 콩나물로 만든 찬이 밥상 위에서 멀어져갔다. 마침내 재배기는 구석진 곳으로 밀려나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고 이후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콩을 가린다. 콩나물을 기르기 위한 작업이다. 통통하고 빛깔이 고운 것으로 가려 물에 담근다. 하루쯤 지나면 하얀 싹이 고개를 내민다. 싹이 나면 물주기에 바빠진다. 삼사 일이 지나면 국거리로 뽑아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란다.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 자꾸 검은 보자기를 들추어본다. 오동통하고 윤기가 도는 것이 잘 자랐다. 직접 길러먹는 것에 이젠 재미가 붙었다.
   시루에 콩나물을 길러 먹자면 신경이 쓰일 때가 있다. 이웃사람들과 차 마시고 어울리다 보면 물주는 일을 잊기도 하고 장시간 집을 비워야 할 일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이고 콩나물이 자라는 걸 보면 마음이 참 즐겁다. 직접 물을 주어 키워 먹는 것이 얼마나 재미나는지 모른다. 풋풋하고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는 콩나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여유가 생긴다.
   검은 보자기를 열어보며 재미를 느꼈는지 아이들이 물주기에 바쁘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다. 콩나물 기르는 일에 아이들이 동참하고 있으니. 세월 저편에서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린다.
   추운 겨울, 새벽닭이 울 즈음 인기척에 이어 올망졸망 다섯 형제들이 잠든 큰방 문을 열고 어머니가 들어선다. 곧이어 콩나물시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어머니의 하루가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다. 단정히 빗질하여 쪽찐 머리는 언제 봐도 매끈하고 곱다. 어머니는 아랫목에 손을 넣어본 후 이불을 다독거려 덮어주고는 부엌으로 나간다. 솥에 물을 가득 붓고 군불을 땐다. 뜨겁던 온돌방이 새벽녘이면 식어 당신의 다섯 자식들이 추울까해서다.
   어머니는 내내 콩나물을 길렀다.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콩나물 기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콩나물은 간밤에 과한 약주로 속 아파할 아버지를 위한 해장국이 되고, 고춧가루로 벌겋게 버무린 무침이 되어 밥상에 오른다. 한 겨울 찬이래야 몇 가지나 되겠는가. 국과 김장김치에 구운 생선 몇 토막 정도다. 비린 것을 싫어한 나는 어머니가 커다란 무김치를 젓가락에 푹 꽂아주면 그것과 콩나물을 넣고 끓인 국을 떠먹으며 밥 한 그릇을 비웠다.
   한번은 어머니가 심한 감기로 앓아 누우셨다. 의사가 다녀가고도 열이 내리지 않아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주고 있었다. 여태 아픈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걱정이 되어 방을 연신 들락거리며 어머니를 살펴보았다. 밥을 지어야 하는데 해본 적이 없으니 난감했다. 어머니가 부엌일을 하던 것을 떠올려 쌀을 씻어 솥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불을 때었다. 조금 있으니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삼층밥이 되어 있었다. 연신 솥뚜껑을 여닫기만 하고 불은 조절할 줄을 몰랐으니 그럴 수밖에.
   밥이 탔으니 반찬이라도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머니가 늘 하듯 콩나물을 한 움큼 뽑았다. 그 뒤에 물을 듬뿍 준 다음 검은 천을 덮어두었다. 문제는 삶지도 않은 콩나물로 무침을 하려고 고춧가루, 마늘, 참기름을 넣고 손으로 주무르니 어떻게 되었을까. 어깨너머로 콩나물 무치는 순간만 보고 그대로 흉내를 내었으니 식구들은 물론 아픈 어머니도 웃던 기억이 난다.
   겨울밤이 긴 탓에 저녁을 먹었어도 속이 허전했다. 어머니는 대청마루에 식혜며 고구마를 담은 바가지를 두셨다. 김치를 찢어서 고구마에 얹어 먹으면 얼마나 맛 나는지. 목이 메면 살얼음이 언 식혜를 단숨에 들이켰다.
   때때로 자식들의 허전한 배를 든든하게 해주기 위해 추위에도 어머니는 부엌을 드나드셨다. 별식으로 찬밥 한 덩어리와 김치, 대파를 송송 썰어 넣고 끓인 콩나물국밥을 금시 만들어서 내어오면 우리 다섯 형제들은 뜨거운 국밥을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의 수고와 사랑 때문에 긴 겨울이 마냥 춥고 지겹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 나는 콩나물국도, 무침도 곧잘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음식을 즐긴다. 어릴 때부터 먹어 온 것이고 보니 시집와서도 곧잘 밥상에 올린다. 그런데 내가 끓이는 콩나물국이나 무침은 어머니의 손맛과는 다른 것 같다. 깊은 맛도 없는 것 같고 얼큰하다거나 시원한 느낌이 덜하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가끔 끓여주는 국밥 맛은 예전 그대로인데. 아마도 당신의 오랜 손맛과 가없는 사랑이 가미되어서 일게다.   
   노란 빛깔의 콩나물이 곱고 매끈하다. 넉넉히 뽑아서 옆집에 돌려야겠다. 눈을 감고 시루에 물을 끼얹는다.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떠오른다. 내게 시루를 가져다주신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훗날 손때 묻은 작은 시루를 들고 어머니처럼 나도 딸네 집을 찾을 것이다.
   오늘 저녁은 콩나물국과 무침으로 푸짐한 식탁을 만들어야겠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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