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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자 수필17]'파란 대문(大門) '심인자:수필가/수필과비평 작가회 전 거제지부장/수필과비평작가상수상

                        파란 대문(大門)                       
                                                      심 인 자

파란 대문 집이 고모 댁(宅)이다. 안방을 둘러본다. 작은 텔레비전도 예전 그대로 재봉틀 위에 놓여 있고 장롱도 고모가 쓰던 대로다. 안방 주인이 바뀌었을 뿐 변한 것은 없다. 오랜 세월 척박한 삶을 살다 가신 고모 대신 이제는 며느리가 안방을 지키고 있다. 대쪽 같던 고모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모는 열아홉에 연애를 하셨다 한다. 부모님이 정해주는 혼처 자리를 마다하고 같은 동네 총각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얼굴도 모르고 혼인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고모의 연애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버린 자식이라며 조부님은 고모와의 연을 끊었다. 양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맺어졌다. 아들을 낳고 행복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즈음 남편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스물을 갓 넘은 새댁의 몸으로 혼자 살아가야 했다. 몇 년을 기다렸지만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같이 떠났던 친구 분이 돌아와서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두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고모는 충격에 몸져눕고 시댁에서는 아이를 데려가려 했다. 아이는 고모의 삶을 이어주는 끈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 않았다.  악착같이 일했다. 땅마지기 문서가 고모 손에 쥐어지던 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한다. 그날 처음으로 호사스런 울음을 터트렸는지도 모른다. 남의 이목 때문에 마음대로 울어 보기나 했겠는가.
   고향에 잠시 돌아 온 남편은 ‘다시 태어나면 영원히 함께 하자’며 일본으로 떠나갔다. 애타게 기다렸던 남편은 이미 내 남자가 아니었다. 행여 나에게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기대마저 무너졌다. 그쪽에도 처자식이 있으니 더는 옷자락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남편을 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움으로, 때로는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음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대문을 밀치고 들어 설 것 같아 차마 문을 잠그지 못했다.    
   아버지는 고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다. 고모의 삶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고생이라곤 모르던 누이였다. 어렵게 살아가는 누이가 눈에 밟혀 잠이 오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아버지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바구니에는 생선과 찬거리, 그리고 소주 한 병이 늘 들어 있었다. 긴긴 밤을 지새우며 가슴 아파 할 누이에게 어쩌면 술 한잔이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배려에서였다.
   푸줏간에서 고기를 사 오는 날이면 조금 전에 다녀왔어도 또 고모 집을 향해야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야속했고 집에 오지 않는 고모까지 미웠었다. 십 여분의 거리가 그때는 왜 그렇게 멀기만 했던지.
   고모는 유독 나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나에게 심부름을 보내신 것도 그래서였다. 나만 보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렁 위에 얹어 둔 과자를 내려놓고는 골라 먹게 했다. 가져간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도 양에 차지 않아서인지 이것저것을 챙겨 나를 앞세우고 집 앞까지 바라다 주셨다. 집에 들어가기를 청해도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렸다.
   친정에 발을 딛지 못 하는 마음은 바위가 짓누르는 고통보다 컸을 것이다. 보고 싶은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는 발길은 얼마나 무거웠으랴. 어머니가 그리워 베개가 젖도록 흘린 눈물은 오죽 많았겠는가. 형제들과 오순도순 살던 그때가 얼마나 그립고 사무쳤겠는가. 그럼에도 친정아버지 제사에 한번 오지 않고 대문 안으로 장본 바구니를 살짝 들여놓곤 갔다. 부모님의 뜻을 거역한 불효여식이 그나마 잘 살아 주었더라면 좋았으련만, 남편에게 버림받았으니 감히 친정에 발을 들일 염치가 없어서였다. 시댁과도 왕래를 끊었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늘 외롭고 허전했다. 아버지가 고모의 외로움을 덜어주었을 뿐.
   오랫동안 바구니는 우리 집에서 고모 집을, 고모 집에서 우리 집을 오가며 정을 이어주었다. 안부(安否)가 바구니에 들어 있었다. 언제나 술이 한 병뿐인 것은 고모의 건강을 염려한 아버지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임을 늦게 서야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고모 집에 가기가 두려웠다. 내 손을 잡으면 놓지를 않았다. 무슨 얘기든 해야 했고, 또 들어주어야 했다. 살아가기에 급급해 앞 뒤 생각할 여유마저 없었던 고모였다. 얼굴에 주름이 패고 노안(老眼)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두렵고 무서웠기에 나에게조차 의지하려 했음을 왜 알지 못했던지. 어린 나로서는 황급히 대문을 나서고만 싶었으니...
   고모를 평생 걱정하며 사신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여전히 고모는 집에 오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만 보낸 채 멀찍이 서서 동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면서 오열했다. 고모의 슬픔은 처절했다. 믿고 의지했던 동생이 떠났으니 기댈 곳을 잃은 것이다.
   이제는 나 대신 아니,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바구니를 드셔야 했다. 이것저것 챙겨 가면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한참 지나서야 돌아오는 어머니 눈가가 축축한 걸 보니 우셨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같은 여자로서 시누이의 마음을 알아 주셨고 많이 애달파하셨던 것 같다.
   고모도 세상을 떠나셨다. 상여 뒤를 따르는 행렬이 초라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많은 가솔(家率)들이 줄을 이었을 턴데. 아들 내외와 손자들, 그리고 아버지 형제들이 전부였다.
   고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내 나이 사십에 가까우니, 육십 년이 넘도록 자식 하나 바라보며 살아 온 세월이 얼마나 쓰라리고 힘이 들었겠는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홀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지아비에게 버림받고 살아 온 삶이 편했을 리가 없다. 등 뒤로 수군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더욱 더 삶은 고달팠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부닥쳐 울기도 많이 했을 것이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림이라도 당하면 지아비를 원망하는 마음은 하늘만큼 높아 갔을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힘겨운 삶을 고모는 끝까지 감내하며 사셨다.
   파란대문을 들어 설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며 안방을 지켜온 고모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주어진 삶을 거부하고 뛰쳐나갔더라면 나에게 고모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오늘따라 고모 생각이 간절하다. 고모의 삶을 껴안고 싶은데... 이제는 손때 묻은 유품들을 어루만져 볼뿐이다.
   대문을 나선다. 자꾸 돌아보지만 고모가 서 있던 자리는 비어 있다.  올려다보는 쪽빛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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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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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나무골 2020-02-04 21:42:11

    한 여인의 아픈 인생이 고스란이 가슴에 전해옵니다. 고모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잘 읽었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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