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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자 수필38] '일곱째 날'심인자:수필가/수필과비평 작가회 전 거제지부장/수필과비평작가상수상

 길을 잃고 한 가운데 섰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를 놓친 순간 바보가 되었다. 기가 막힌다. 당황스러워 헛웃음이 난다. 간밤에 그를 놓쳐버렸다. 나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물을 잔뜩 먹은 그가 날 외면하기 시작했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불러도 대답 없고 어루만져도 미동이 없다. 늘 복종하고 순종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더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실수한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나 자신을 질책한다. 그를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 겨우 두 달째인데. 처음엔 너무 까다로워서 만난 걸 후회했다. 예민하고 여지없는 성격에 피곤함이 몰려와 짜증이 났다. 그런데 조금씩 그에게 익숙하니 배울 것이 많았다. 단순한 것만 가르쳐 달라는데 더 많은 걸 알라 한다. 국내외 소식은 물론 몰랐던 정보도 덤으로 알게 해 주니 앎에 대한 즐거움이 쏠쏠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니 편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돌이켜보니 그와 난 참 가까운 사이였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잠시 눈을 뜨면 그부터 먼저 찾았다. 몇 시냐고 물어봐도 지체 없이 알려주던 그였다. 늦잠 자지 말라고 정확히 나를 깨워주던 그였다. 한 밤중이든 나른한 오후든 귀찮은 기색을 한 번도 내지 않았다. 실수로 그의 몸에 생채기를 내어도, 내 팔꿈치에 밀리어 곤두박질쳐져도 아픈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부재중이라는 걸 깜박 잊고 자꾸 그를 찾는다. 습관적이다. 불안하여 신경이 곤두선다.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도 그를 떠올리고, 그가 늘 들어있던 핸드백을 보기만 해도 그립다. 아니 절실하다. 잠시라도 볼 수 없다는 게 고통이다. 그를 통하여 당장 전달할 중요한 일도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아는 게 너무 많은 그였다.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볼 때마다 지체 않고 알려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 그를 너무 의지했나 보다. 정작 나는 아는 게 없다. 연락번호 몇 개를 제외하곤 도무지 기억나는 게 없다. 그를 알기 전엔 제법 많은 숫자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곤 했는데.
  나 스스로 기억해 내자니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자꾸 오류가 난다. 가물가물하여 실수연발이다. 숫자 일곱 개를 조합한 덩어리가 구름처럼 내 머릿속을 두둥실 떠다닌다. 잡으려 손을 뻗쳐 보지만 허사다. 잡았다 싶으면 숫자 하나가 슬그머니 손아귀를 벗어나 도망간다. 일곱 자리도 어려운데 열한 개를 조합한 숫자를 기억해 내라니 말도 안 된다며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해야 할 일을 던져 버리고 만다.
  그는 나의 비서이며 오랜 친구였다. 그런 그가 순식간에 문을 닫아버렸다. 찬찬하고 모르는 게 없던 그가 이제 날 외면한다. 그간의 정도 끊어버리고 가르쳐 달라 아무리 사정하고 빌어도 모른 척한다. 오늘의 날씨나 계산은커녕 심지어 내가 가르쳐 준 지인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생일만이라도 돌려달라는데 무반응이다.
  그가 없는 첫째 날, 대란이었다. 식구들이 몽땅 지각을 한 것이다. 늘 나를 깨워 주던 그가 부재중임을 잊은 때문이었다. 식구들을 먼저 보내고 나 역시 헐레벌떡 진땀을 흘리며 일터로 향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그를 찾으려 핸드백을 뒤진다. 누군가 급한 일로 나를 찾을 것만 같은데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얼마나 애가 탈까.
  그가 없는 둘째 날, 지인들과의 안부가 오고갈 오후인데도 그가 없으니 조용하다. 호주머니 속에서 그를 만지던 감촉이 그립기만 하다. 외로움을 느낀다.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았다.
  그가 없는 셋째 날, 마음이 조금 수월해졌다. 포기에서 오는 체념이려니. 급한 일이면 어떻게 해서라도 연락을 취해 오겠지 싶어 느긋한 마음마저 든다. 핸드백을 볼 때도 그다지 그를 떠올리지 않았고,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는 일도 둔해졌다.
  그가 없는 넷째 날, 마음이 편하다. 진동으로 맞춰둔 핸드폰에 눈길을 두지 않아도 되니 그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다. 지인들과의 수다도 줄었고, 그로 인해 요금이 절약되니 금상첨화다.
  그가 없는 다섯째 날, 이젠 그가 없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은연중 해본다. 조금 불편함은 있겠지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
  여섯째 날, 그가 돌아왔다. 그래도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며 반긴다. 그런데 그가 이상하다. 물에 빠진 후유증인지 버튼을 두 번 세 번 눌러야 작동이 되고, 또 제풀에 스르르 꺼지기도 한다. 완벽하고 똑똑하기만 했던 그에게서 허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던 그가 한심해 보인다. 바보 같다. 이런 그를 믿고 애지중지했다니. 그간 너무 빠져있었다.
  그동안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왔던가. 나 편하고자 복잡한 일을 그에게 맡겨버리다 보니 세부의 일을 어찌 속속들이 알 것인가. 스스로 배우고 습득했어야 온전히 내 것이 되는데 나를 대신하여 계산하게 하고 외우고 기억하게 했으니 정작 내 머릿속은 백지상태다. 일곱 자리 전화번호조차도 그의 몸속에 담아두고 나 자신은 편하게 버튼 하나만 누르며 살아왔다. 영락없는 게으름뱅이다. 편함에 길들어져 기초적인 계산조차 그의 힘을 빌리려 하니 내가 진정 바보다.
  이젠 그를 떼어 놓으려 한다. 처음엔 그를 놓쳐 서운하고 아쉽고 절실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침묵할지 모를 그이기에 온전히 맡기기가 두렵다. 그 덕분에 편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다시 그가 침묵한다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
  일곱째 날, 그에게서 겨우 돌려받은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인들의 연락처를 머릿속으로 넣는 작업을 한다. 여전히 숫자들이 숨바꼭질하듯 나타나고 숨기를 반복하지만 하나하나 찾아내어 꼭꼭 묶어둔다. 얼마가 걸리더라도 이 작업을 계속하며 문명의 이기를 서서히 멀리할 참이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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