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栗)  

새해 아침, 오솔길을 걷는다.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쉼을 얻기도 한 길이다. 풍경소리 단아한 산사를 찾아 가고 있다. 부모님을 모셔놓은 곳이다. 입구에서 산문 앞까지는 오래된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고운 흙길이 펼쳐져 있다. 아직도 이 길을 오르면 도란도란 나눈 가족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어 정겹다. 대부분 사찰이 입구에서 대웅전까지는 거리가 있다. 가는 동안 속세의 복잡한 생각을 비우고 오라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염원을 담아 소망을 올리던 돌탑들이 그대로 서 있다. 돌멩이 하나 올려 본다. 세상 만물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처음으로 맞는 기일이지만 명절 끝에 걸음을 했다. 출가외인이라 했던가, 친정의 일은 언제나 집안 행사의 후순위가 된다. 정성스레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마음이 시작되는데, 여기에 고인을 모신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제사를 지낼 처지가 못 되는 이들이다. 합동으로 제를 지내되 개별 위패를 올리면 차례대로 나가 예를 갖춘다. 

  염불을 마친 스님이 올해 밤나무 제기를 시주 받았다고 아주 흐뭇해하며 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대부분 식물들은 종자에서 싹을 틔워 껍질을 밀고 올라온다. 이와 달리 밤나무는 땅 속에 씨밤(생밤)인 채로 달려 있다가 밤의 열매가 열리고 난 후 씨밤이 썩는다. 10년 또는 100년 이상 껍질이 달려 있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밤나무는 자신의 근본을 잊지 말라는 것과 조상과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한다. 가묘에서 종묘에 이르기까지 사당에 세우는 위패를 만드는 데는 반드시 밤나무를 쓴다고 한다.

  스님의 설법을 듣고 있자니 오래 전 읽은 책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옛날 춘추시대 노나라에서 있은 일이다. 당시 밤나무는 도읍지 제단에 심어서 국가의 신목으로 삼는 나무였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논변이 가장 뛰어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인물이 재아였는데, 왕이 그에게 제단에 밤나무를 심는 까닭을 물었다. 재아가 답하기를

  “그 까닭은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하였다. 밤나무를 뜻하는 ‘율(栗)’자는 두렵다는 ‘율(慄)’자와 음이 같으므로 같은 뜻으로 쓰인다. 고대에 형을 집행할 때 신목 아래서 행하였기 때문에 재아는 백성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신목으로 밤나무를 심었다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그럴 듯하게 끌어다 붙였다. 이를 전해들은 공자는 그 지역에서 밤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이라고 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논어의 한 대목이다.

생각하면 밤나무에 대한 세 사람의 말은 다 일리가 있다. 나무의 생리를 통해서 근본을 생각하게 하려는 스님의 교훈적 해석이나, 공적인 일에는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재아의 설명이나, 현학을 경계하고 평이함을 강조한 공자의 가르침은 모두 되새겨 볼 만하다.

  위패를 밤나무로 만드는 까닭이 재아의 말처럼 사람들이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나무는 저마다의 성질을 가지는데, 그것은 생명이라는 본질을 구현하는 생태일 뿐 사람의 입장에서 견강부회할 일은 아닌 듯하다. 지난 날 서민들의 생활에 비싼 밤나무 제기를 구입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목질이 연한 버드나무와 미루나무를 쓰기도 했다. 우리가 낮은 곳을 구르는 돌멩이 하나 얹어 염원을 드러내듯이, 조상을 모시는 일에 버드나무면 어떻고 사기 그릇이면 어떻겠는가. 성심을 다하는 것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산문을 나서니 예사롭게 보이던 숲이 훨씬 정감 있게 다가왔다. 이전엔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의 멋진 모습에만 눈길이 갔었다. 자세히 보니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제각기 얼굴을 내밀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밤나무도 새삼 눈에 들어온다. 무엇이든 자세히 들여다 봐야 참 모습을 알 수 있는 이치인가. 눈길 주지 않는 무심함에도 의연히 제 몫을 다하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산을 내려왔다.

  여러 날 비워둔 집에 돌아오면 일거리가 먼저 눈에 띈다. 냉장고 속을 정리하다 보니 지난 가을에 넣어 둔 밤이 나온다. 오랫동안 방치하고 있던 밤알에 여린 싹이 나있다. 딱딱한 껍질을 뚫고 막 시작된 생명이다.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에 새 생명에게 칼날을 댈 수는 없다. 화분 한 켠에 심으며 새해의 바람도 함께 심어 본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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