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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거제찬가] '둔덕 기성(岐城) 사적 509호'이승철/거제향토사연구가-"시인/수필가

                    예전에는 폐왕성(廢王城)이라 불렀다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뒷산 우두봉  아래쪽 중봉에 있는, 기성(岐城)은 신라시대 축성된 성이다 고려 18대 의종 왕이 정중부의 반란에 기성현(岐城縣)으로 피난 와서 3년간 살았던 곳이라 하여 기성(岐城)을  폐왕성(廢王城) 또는 피왕성(避王城)이라 하였다. 의종왕은 무신 정중부 등의 반란에 서기 1170년 거제도로 귀양 와서 기성현에 살았다

 의종왕은 거제 둔덕 거림리에 귀양 와서 3년간 살다가 동북면(東北面), 병마사(兵馬使), 김보당(金甫堂)이  의종을 복위  시키기 위해 경주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다 경주에서 정중부의 일파인 이의민(李義玟)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

고려 18대 의종 왕이 정중부의 발란에 쫓겨 와서 기성현에 3년간 살다가 폐왕이 되었든 곳이라 하여 기성에 오르면 왕의 한이 서린 곳에 피 묻은  몽돌이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씻기어 지지 않은 채 나 딩굴고, 있어 그때의 슬픈 사연을 증언하는 듯하다.

 얼마나 한스러웠던 용안(龍顔)의 혈류(血淚)였던가? 거제도는 삼한시대 독로국의  왕성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산성 조선시대의  평지성과 왜성,  토성 등 24개의 성지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어 성의 전시장  같다고 할만치 많은 성들이 있어 성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곳이다.

  통영시 용남면에서 사등면 견내량의 푸른 해역을 작은 통구미 배로 건너 다녔던 견내량, 고려 18대 의종왕이 정중부 반란에 쫓기여 이 나루터를  건넜다고 전하도(殿下渡)라 하다가 견내량(見乃梁)으로 어원이 바뀌었다.

  아름다운 한려수도를  가로 지르는 은하의 거제대교가 1971년 4월 8일에 개통되어 섬이 육지로 전환됐다. 교통량이 늘어나자  현재 다리로서는  차량 통행을 감내하지 못해 1993년부터 거제대교의  아래쪽에 4차선 새 대교인 신 거제대교를 건설했다.  

 거제대교를 지나 거제시청이 있는 고현 쪽으로 1K쯤 오다보면 사등면 오량리의 오량성이 있다. 오량성 뒤편 정상 우두봉 아래 목성과 같이 태를 두른 성이 보인다. 이 성이 폐왕성이라 불리던 기성(岐城)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둔덕면  거림리에 속한다.  1974년 2월 16일 지방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후 동아대 전 총장을 지낸 심 봉근 총장과 필자가 매년  한 두 번씩 성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 성에 오르곤 했다. 성에 올라서 폐왕의 고절하였던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이 성의 역사와 많은 사연을 고찰 하여 2010년 8월 24일 사적 227호로 지정되었다. 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해 김 득수 전 거제시 의장을 비롯하여 많은 주민들이 노력하였다.     고려 의종왕의 (1124~1170) 휘는 현(睍),자는 일승(日升)으로 인종(仁宗)의  맏아들이며  공예태후(恭예太后) 임씨(任氏)요 비(妃)는  강양공(江양公)  김온(金溫)의 딸 장경왕후(莊敬王后)였다.

  1146년 인종이 죽자 왕위에 오른 의종(毅宗)은 매일같이 문신들과 어울려 호화스런  생활을 하면서 연회를 베풀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왕이 문신을 사랑하고 무신을 경멸하므로 문신들의 행패는 극에 달했다. 숭문억무(崇文抑武) 정책으로 왕이  주연을 베풀면 문신들은 한자리에서 같이 즐기면서 무신들은 경비만 서게 하였고, 심지어는 문신들의  노리개 감이 되어  문신들이 무신들의 머리 위에 술을 붓고 그  꼴을 보고  좋아하며 즐겼다.

 연소한 내시(內侍)  김돈중(金敦中)(김부식의 아들)에게 촛불로 수염을 불 태우는 모욕을 당한 정중부는 항상 원한을 품고 있었다. 정중부는(1106~1176) 원래  천민으로 주(州)의 군인에 불과했던 것이 기골이 장대하여 의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으로 발탁되었다가 교위(校尉)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이와 같은 문신들의 행패에 반기를 든 상장군, 정중부이의방, 이 고 등이  반란을  모의한 줄은 모르고 의종은 보현원(普賢院)으로 멀리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술을 마시고 놀던 끝에 임금이 “이곳이 경치가 좋으니 무술연습을 할 만 한 곳이다"하면서 문사들의 불평이  있는 줄 어렴풋이  알았던지  무신들을 후대하여 위로 하려 함 인 듯 하였다.  이 때 문신  한뢰(韓賴)가 임금의 사랑이 무신에 쏠릴까 시기하게 되었다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은 문신들이 장군을 희롱하면서 때리려 하여 장군이  쫓기어 다니자 한뢰가 장군의 앞을 가로 막아 늙은 장군의 뺨을 쳐 섬돌 계단  아래로 떨어 뜨렸다.

  이 광경을 본 임금과 문신 이복기 등은 이소응을 보고 조소하면서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다.  얼마 전에는 정중부가 나이 어리도  내시에 불과한  김돈중에게 자신의 수염이 촛불에 태우는 굴욕을  당하여 분이 사라지지 않은 때라 정중부는 소리를 높이어 한뢰를 꾸짖었다.

  "이소응이 비록 무부에 불과하지만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인데 어찌 이렇게  무도하게 희롱하며 욕을 보이느냐"고  힐난(詰難)하였으나  한뢰 등은 오히려 기고 만장하였다. 그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할 때에  임금의 일행이 보현원에 닿았다.  이 때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 등은 순검군(巡檢軍)을 모아  임금이 막 문에  들어서고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려 할 때에 무신 이 고 등이 임종식, 이복기를 때려 죽였다.  한뢰는 내시의 도움으로 임금이 앉아있는 용상 밑으로 숨었다.  이고가 칼을  뽑아 위협하니 한뢰가 벌벌 떨며 기어 나오자 목을 쳐 죽였다.  그 순간 무신들은 평소의 울분이 폭발하여 눈에  보이는 문관(文官)들과 내시들을 모조리 죽였다. 보현원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어 전쟁터 같이 시체가 즐비했다.

  정중부, 이고, 이의방, 이소응 등은 대궐 안으로 들어가 주밀부사 양순정(梁純精),  감찰어사 최동식(崔東拭)등을 죽이고 태자궁에서도 십여명을 죽이니 이에 기세를 얻은 병졸들까지 일어나서 문관 50여 명을 죽였다. 내시 왕광취(王光就)가 정중부를  치려다가  발각되어 또 십여명이 죽었다.  

정중부는 왕을 거제로 귀양 보내고, 태자는 진도로 유배를 보냈다.1170년 9월 왕의 아우 호(皓)를  세워 새 임금을 삼으니 이가 곧 고려 19대 명종(明宗)이다. 정중부는 스스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으며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겸 중군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를 역임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소응, 이의문, 이 고 등 반란에 공이 큰 사람들은 모두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여 군을 장악했다. 

명종 3년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 兵馬使), 김보당(金普堂), 이 정중부를 치러다가 이의민(李義玟)에게 패하여 죽었고 문신(文臣) 장순석(張純錫) 등은  거제도에 가서 의종(義宗)을 옹위하여 다시 복귀시키고자  경주로 갔으나 정중부 일파가 먼저 알고 의종을 시해하려 했다. 이 말을 들은 경주관군은 의종을 호위하는 관군을 죽이고 반역의 무리와 합세 했다. 이의민(李義玟)이 의종을 꾀어  곤원사(坤元寺) 북편 연못가로 데리고 가서 술 두어 잔을 권한 후 철태로 등골을 분질러 죽여 시체는 연못에 던졌다.    이때 의종이 죽은 연못에서 붉은 연기가 치솟아 하늘로 올라가면서 윙윙하는  의종왕의 한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후로 이의방은 지병부사(知兵部使)가 되고 이의민은 대장군이 되어 무인의 세력이 극에  달하여 임금도 속수무책이었다. 명종 4년 5월에는 승(憎) 2천여 명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수인문(수仁門)을 불태웠다. 이 기회를 틈타서 이의방 등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의방이 먼저 알고 병역을 풀어 승려 2백 여 명을 죽이고 사태는 진정 됐다. 이 해 9월에는 서경유수병부상서(西京留守兵府尙書) 조위총(趙位寵)이 서경을 중심으로  정중부, 이의방 등을  치기로 하였다.

  이 싸움에서 마침내 이의방이 패하여 개성으로 돌아와서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조위총을  치러 가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손에 죽었다. 이의방이 진군하는 군중에 따라가던 승군을 시켜 이의방의 목을 베어  죽인 것은 이의방이  자기의 딸을 동궁(東宮)(이금의 아들)에게 바치어 외척이 되어서 세력이 왕성함으로 정균이 시기하여 죽인 것이다.

  한편  조위총(趙位寵)은 명종  5년 10월에  사자를 금(金)나라에 바치고 내부(內附)하겠다 하였으나, 금나라 임금은 남의 나라이므로 상관 아니 하겠다. 하였다.  조위룡은 명종 6년 3월에 서경 함락 후 그 부하에게 죽었다.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宋有仁)은  정균과 뜻이 맞아서 호사한 생활을 하며 수덕궁(壽德宮)을 점령하여 그 부귀는 임금과 비슷했다.    이와 같은 행패를 보다 못한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1179년 용사 허승(許升)을  시켜 장경회(蔣經會)가 끝나는 밤중을  이용하여 먼저 정균을  죽이고 임금에게 알리어 정중부와 송유인의 체포를 허가받았으나 정중부가 이 소식을 듣고 민가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서 죽이고 그 일가족과 사위 송유인 등을 차례로 죽였다   

 허승과 김광립이 또한 공을 믿고 사회에 패를 끼치므로 그들도 살해를 했다. 그 후 이의민과 경대승이 서로 대립하여 오다가 경대승은 명종 13년에 병으로 죽었고 이의민은 한참 세력을 잡다가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같은 무인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와 같이 서로 죽이고 죽고하는 무신정부의 비참했던 혁명시대의 막은 내린 것이다.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는 숲이 우거진 큰 마을로 기성현의 관아지 였고, 산방과 거림에는 고려무덤(高麗葬)이 있어 지난 날  농부들의 쟁기 끝에  고려시대의 유물들이 걸려나오기도 했다.  공구가 물을 떠 오던 종수 새미가 산방에 그대로 남아 있다. 농막은 그 당시 농사를 짓던 곳이고 마장은 말을 먹이고 조련하던 곳, 

옥동은 구슬같이 맑은 물이 있다고 하여 옥동, 하둔과 상둔은 국가에서  농사를 짓던 둔전(屯田)이 있던 곳이다.  상둔은 거림 윗쪽을 말하고 하둔은 거림 알랫 쪽을 말한다. 거림이 기성현의 치소가 있었기 때문에 거림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이 이루어 졌다.   거림과 하둔사이 자주방터(自主防터)란 곳이었다. 그리고 그 뒷산이 안태봉(安胎峰)이다.  안태봉은 왕가의 자손 태를 묻었던 곳이다. 대비장(大妃庄)은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시목(柿木)은 과수원이 있던 곳, 술역(述驛)은 수역(水驛)으로 해상교통 관문 역할을 했던 곳, 어관(御關)은 어소(御所)라 하여 임금이 있는 관문을 들어 오는 곳으로 왕성을 지키는 병역이 있었던 곳이다.  망허(望墟)란 곳은 망해관변(望海觀變)이라고도 하여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 전초기지다.

   견내량에 망해루(望海樓)를 두어 망장이 관리케 했다. 사등 오량과 둔덕 술역은 정류장 역활을 했다. 의종이 폐위가 되어 마지막 살았던, 기성현의 방어성지 폐왕성 성벽엔 이끼가 끼고 무성한  잡초만 우거져 있는 주위에는 기와 조각이 나 딩군다.  피 묻은 몽돌이 천년의 세월 동안 씻겨지지 않은 채 한으로  남아 있어 폐왕이 된 의종의 한스러웠던 피눈물이 자국자욱 남아 있는 듯 하다.  한으로 살다간 왕의 입김과 왕의 손길이 남아 있는 듯하여 그 여운의 발자취가 기성현지와 성 주위에 감도는 듯하다. 성벽 곳곳을  돌아 보았건만 흥망은 유수하여 무심한 구름만 오락가락 한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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