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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수필: 윤정희] 연꽃, 달빛 쏟아지다''윤정희:거제출생/거제대학평생교육원수필창작반수료/2012《수필과 비평》신인상수상/계룡수필문학회원/눌산문예창작교실수강

조락의 계절, 자연의 시간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성큼 다가선 가을의 소리에 마음은 우울해지고 무언가 깊은 사색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자연이 주는 시간은 언제나 공평하다. 생명 순환의 질서 속에 성장하고 소멸함이 마치 전광석화와 같다.

호수에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들이 물 위에 비치어 한 편의 수채화다. 그 사이로 삼삼오오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길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불현듯 뇌리에 스치는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은 언제나 죽음과 같이하기에 유독 이 계절에는 생과 사를 깊이 사유하게 된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때로는 무한한 대상들을 그리워하며 가슴 저미는 날이 많아진다. 이렇게 마음이 복잡할 때는 금강경의 한구절인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 하나니(무릇 있는바 상은 다 헛되고 망령된 것이니)라고 혼자 중얼거려 본다. 무상한 존재일지라도 집착하지않는 삶이기를 항상 되뇐다.

불교에 입문하여 명색이 불자라고 자칭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불법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내가 정말 진실한 불자의 행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을 때가 많다. 반가부좌를 하고 부처님 앞에 앉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은 사라진다. 한 줄의 설법이라도 듣는 날은 며칠 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가슴속에서 뭔지 모르는 따스함이 배어 나온다. 종교의 선택도 인연이다. 처음 법당에 가서 앉았을 때도 내 안방마냥 포근하고 부처님의 미소가 마냥 나를 반기는 듯 따스했다. 본래 인연은 낯설지가 않다더니 그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십 오륙 년 전의 일이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선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흥건하게 베이는 삼복더위 칠월이었다. 지리산이 감싸고 있는 쌍계사 하기 수련 법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수행이란 말의 참뜻을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고 참 나를 찾아보고 싶었다. 안일하게 생각했던 종교관을 더욱 확고히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재가자로서 짧은 기간이라도 집을 떠나 나만의 시간을 가지기란 녹록찮았다.

각처에서 많은 불자들이 모였다. 수련회 주제는 ‘본마음 참나’ 주요 내용은 ‘계곡 참선, 선다 정진, 소리 명상, 달빛 명상, 차 문화 체험' 대략이런 순서다. 첫날부터 지도 스님의 눈빛에 모두들 제압당하고 말았다. 생애 처음 체험하는 수행에서 가슴이 벅차고 신선함을 느꼈다. 새벽 세
시예불로 수련은 시작되었다. 면벽수행 등 여러 수행에서도 가장 마음에 남아있는 수행 중 하나가 계곡 참선 수행이다.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쌍계사 옆 계곡을 찾아 각자가 원하는 자리에서 참선을 행하라 하셨
다. 뾰족한 바위를 찾아 반가부좌로 자리를 잡았다. 나의 믿음과 깨어 있음을 증명하고 내 삶이 백척간두에 앉아 있다는 느낌으로 행하고 싶었다. 찰나라도 정신이 딴 곳으로 흐르면 그대로 머리를 박고 떨어질 자리였다. 오십 분을 별 탈 없이 참선을 마쳤다. 발을 땅에 내딛는 순간
안도의 긴 날 숨이 터져 나왔다.

공양도 수행이다. 발우공양은 먹을 만큼 받아 소리 내어 먹어서도 안되고 한 톨의 밥도 남겨서도 안 된다. 물을 받아 김치 한 오라기로 깨끗하게 그릇을 씻어 마신다. 마른 수근으로 발우를 닦아 보자기로 싸서 선반 위에 올려야 공양이 끝난다. 저녁 공양을 끝내고 스님을 따라 달빛 명상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계곡을 지나 산등성이를 넘어갔다. 한참을가니 별천지가 나왔다. 동쪽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의 논두렁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늠이 잘 안 되는 큰 논배미에 반은 백련이고 반은 홍련이 가득 찼다. 감상도 잠시뿐 스님께서 참선 시작을 알리셨다. 우리들이 앉아 참선할 자리가 얼마나 험진지 돌아볼겨를도 없었다. 개구리, 풀벌레 모깃 소리와 더불어 참선 삼매에 빠졌다.

스님의 기척에 눈을 떠보니 오십 분의 시간이 지나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개운했다. 모기가 내 몸을 스쳐 갔는지 느낌조차 없다.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무사히 마쳤다. 오솔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연꽃과 달빛,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그 위에 쏟아지는 달빛은 광명이다. 연꽃은 진흙밭에서 뿌리를 내려 잎을 틔워 꽃을 피운다. 그리고 주변을 정화하고 흙을 깨끗하게 걸러낸다.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하셨다. 온갖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번뇌와 쾌락으로 마음자리를 편안하게 두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도 스님의 뜻도 알 것 같았다. 왜 우리들을 이 야심한밤에 험한 곳에 앉혀 놓았는지. 체험은 짧았다. 우리들이 사회로 나가 살아야 할 시간은 길다. 혼탁함을 정화하면서 달빛처럼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깊은 뜻이 아닐는지.

수련 중 마지막 절정은 밤새워 행하는 1080배다. 예전엔 3000배까지도 도전했다. 지금은 절하기가 버거운 나이다. 인연의 소중함을 알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세세생생에 지은 죄업이 땀으로 눈물로 나의 전신에서 흘러내린다. 새벽, 네 시쯤 절이 끝났다. 해내었다는 성취감과 경건함
이 가슴을 꽉 채웠다. 새벽예불까지 마치고 일정이 끝났다. 이번 수련회는 내 인생에 다시없는 체험이었다.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 쌍계사 수련은 나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직접 체험해서 깨닫도록 길을 내어 주었다. 내 몸속 가득한 근심 걱정을 부처님 앞에 털어놓았다. 좀 더 불자답게 살자고 다짐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일주문을 나섰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수련을 향한 발심을 해보았지만, 연이 닿지 않았다.

그새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인생의 황혼기에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낯선 타향에서 새로운 삶을 이룸도 시절 인연이라 믿는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울수록 불자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고향은 이미 떠났고 집착이나 미련이 있다면 훌훌 벗어버리자. 이 자리에서 튼튼한 뿌리를 내려 내 가족과 이웃이 더불어 잘 살아가야 할 이유가있을 뿐이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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