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㉙]
                            '회상(回 想)'
                                - 아버님께

                              신 종 만

                             어버이 떠나신 후
                          유랑의 긴긴 날들

                          바람 다 재우고선
                          찾아온 고향 선영

                          봉분을 지키고 섰는
                          억새풀만 뜯습니다.

                          치닫는 무량 세월
                          꺼이꺼이 다 보내고

                          진작에 와야 할 곳
                          이순에 와서 보니

                          귀에 벤 산새소리가
                          제 가슴을 저밉니다.

                          선산을 잘 돌보란
                          생전의 그 당부를

                          이제사 떠 올리곤
                          귀볼이 달아올라
      
                          죽비를 내리쳐 주실
                          당신 그려 우옵니다.                   

 ◎ 文如其人

 「산에는 꽃이 피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류시화 시인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에 ‘소유의 비좁은 골방’이라 題하여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옛 시조가 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요즘은 뚝딱하면 하루아침에 다 지어 내는데 십년을 벼르고 별러, 그것도 초가 삼 칸을 지었다는 것이다. 나 혼자 살기 위해 지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칸 만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나 한 칸, 달 한 칸에, 맑은 바람에게도 나머지 한 칸을 주었다. 집이 비좁으니까 강과 산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위에 둘러두고 보겠다는 것이다.이런 시조야말로 청빈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조 작품을 작자 미상으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면앙정 잡가〉에 실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송순(宋純)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작자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담양(潭陽)에 내려가 시작(詩作)과 독서로 소일할 때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렵에 지은 가사(歌辭)가 유명한 〈면앙정가(俛仰亭歌)〉이다. 「면앙정가」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이다.

 한 가난한 선비가 십년을 애써서 세 칸짜리 초가집을 지었다. 자신과 달과 청풍이 한 칸씩 차지하니 강산은 들일 공간이 없으니 별수 없이 둘러두고 보겠다는 것이다.이 세상 욕심에서 벗어난 고고한 선비의 자태가 초가삼간을 매개로 하여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듯한 내용이다.

 담양에 있는 한국가사문학관의 대표전시물로 면앙정 송순이 남긴 분재기(分財記)가 전시되어 있다. 분재기는 송순이 80세 되던 1572년 11월 5일 그의 8남매 자녀들에게 노비, 전답, 임야, 집 등을 나누어 준 문서로 두꺼운 닥종이에 124행 4,510자로 쓰여진 길이 3.6m의 초대형 재산 상속서이다. 말미에 송순의 수결과 자필의 표시가 명확하고 증인으로 친족 4인이 등장한다. ‘송순의 분재기’는 조선 중기 사회 경제 제도, 지명 이두사용의 용례등 어문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거기에 보면 송순이 큰 딸에게 노비 41명과 전답 153마지기를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 둘째 며느리에게는 노비 40명과 전답 142마지기, 그리고 유명한 정자인 면앙정과 그 주변의 죽림을 남겼다. 이런 식으로 모두 8명의 자녀에게 약 2천석을 나누어 주었다. 나눠준 노비만도 족히 300명은 되지 않았나 싶다.

 자, 그러면 초가삼간의 이 시조는 어떻게 된 영문일까. 그는 자신이 소유한 고래 등 같은 기와집, 경치 좋은 명승지에 지은 정자, 자기 소유의 임야, 끝없이 펼쳐진 논밭, 자신의 논밭에서 개미처럼 일하는 소작인과 노비들은 어찌하고 이런 시조를 지었을까.

 조선 중기 사대부들은 자연 속에서 삶의 진실과 풍류를 추구하고자 하였는데 그들의 작품을 흔히 강호가도(江湖歌道)라 이르고 작품 속에는 풍류정신(風流精神)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이 시조 작품의 작자가 송순이라면 자기가 청빈한 선비라는 공상 속에서 이 시조를 읊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안티스테네스는 제자들에게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德만을 숭상하고 금전이나 명예 따위는 거들떠보지 말아야한다고 가르쳤으나 스스로 실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자 중에서 디오게네스는 스승의 가르침 대로 잘 실천한 편 이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철학자에 대하여 비난이 많았고 위선자라고 까지 말하는 이도 있었다. 어떤 날 한 청년이 철학자를 비난하는 말투로 「당신의 스승은 입으로만 떠들고 실제와는 딴판 이구료」 이 말에 디오게네스는 「나팔은 원래 소리가 날 뿐이요. 그리고 나팔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또 따로 있는 것이요」 결국 말과 행실이 같지 않는 선생은 나팔과 같다는 말이었다. 디오게네스(Diogenes)는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을 소 닭 보듯 한 그 유명한 통나무 속 거지철학자이다.

 맥아더(MacAthur,Douglas,1880-1964)는 지금까지도 그의 성적을 넘어서는 사관학교 졸업생이 없다고 할 정도로 타고난 무인(武人)이었다. 5성 장군으로 제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 태평양지구 총사령관으로 대일전(對日戰)을 지휘하여 승리하였고, 한국 전쟁에서는 UN군 총사령관으로 참여하였다.맥아더 장군이 육군대학 학장으로 있던 시절, 의회의 국방위원들이 대학을 방문하였다. 장군은 위원들에게 학교의 교육현황을 설명한 뒤에 조그만 방으로 그들을 안내하였다. 아무런 치장이라곤 없는 그 검소한 방에는 다만 구석에 쇠로된 침대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말했다.
 “저는 학생들과 고통을 같이 하고 싶어 매일 밤 이 침대에서 자고 있습니다. 그렇게 엿새를 보내고 나서 일요일에는 집에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눕지요.”
 위원들은 존경어린 눈으로 맥아더 장군을 바라보았다.브리핑이 끝나고 위원들에게 맛있는 음식이 제공되었다. 음식은 금으로 된 접시에 담겨져 나왔다.
 그런데 위원들이 돌아간 다음 장군은 그때 사용한 금접시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각 위원들에게 정중한 서신을 띄어 혹시 사라진 금접시의 행방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얼마 뒤 장군은 한 위원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
 “장군께서 정말로 쇠침대에서 주무신다면 굳이 금접시가 어디 있는지를 물으실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 금접시는 쇠침대 이부자리 밑에 있으니까요.”

 文如其人 이란 말이 있다.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다. 무심히 내뱉은 말이나 글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은연중에 드러나게 된다. 言如其人, 書如其人 또한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진다. 조심하고 볼 일이다. 법정스님은 모르긴 하나 송순의 분재기(分財記)에 관한 내용을 몰랐지 싶다. 아셨다면 ‘청빈의 절제된 아름다움’이란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분재기’를 접한 후 송순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절로 일었다.(이후 다음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현대시조 발행인

시조 작품 〈회상〉은 신종만 시인의 작품으로 3수 연작으로 ‘아버님께’라는 부제가 붙은 서정시조다.

첫 수에선 오랜 유랑 끝에 찾아온 고향 선영에서의 감회를 읊었다. / 어버이 떠나신 후 유랑의 긴긴 날들 /이었다. 그 고초와 신산을 어찌 다 헤아리랴. 그러다 / 바람 다 재우고선 찾아온 고향 선영 /이다. 미처 벌초 준비를 안했다. 회상에 잠긴 시인은 / 봉분을 지키고 섰는 억새풀만 뜯습니다./라고 만감이 교차하는 심경을 읊고 있다. 맨손으로 봉분을 지키듯이 서있는 억새풀을 뜯다, 회한에 손이 아리는 줄도 몰랐으리라.

둘째 수엔, 귀에 벤 산새소리가 가슴을 저민단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하지 않던가. / 치닫는 무량 세월 꺼이꺼이 다 보내고 / 라는 초장에 짠함을 느꼈다. 쏜살같이 치닫는 하 오랜 세월을 꺼이꺼이 보냈단다. 꺼이꺼이는 큰소리로 서럽게 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진작 왔어야 할 선영이다. / 진작에 와야 할 곳 이순에 와서 보니 / 봉분은 흐트러지고 키재기 하는 억새풀이다. 어디선가 / 귀에 벤 산새소리가 제 가슴을 저밉니다./ 모르긴 해도 이 종장은 절창이다. 어릴 적 많이도 들어 귀에 베인 산새소리가 가슴을 저민다. 암 저미고말고.

셋째 수엔 죽비 내리쳐 주실 아버님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는 시인을 보게 한다.객지에선 밥벌이 못할 것 같은 성치 않은 자식, 고향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신 아버님 당신이었다.
 / 선산을 잘 돌보란 생전의 그 당부를 / 뿌리치고 유랑의 길로 나선 불효자. / 이제사 떠 올리곤 귀볼이 달아올라 / 눈물을 훔친다. 귀볼이 달아오를 정도로 느낀 부끄러움이다. 회환이다. 살아계신다면 회초리 아닌 / 죽비를 내리쳐 주실 당신 그려 우옵니다./ 어찌 그립지 않으리오. 어찌 애닯지 않으리오.

시인의 시작노트를 요약해 본다.
 “6살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와 홍역이 덮쳐 못살아 날줄 알아 멍석말이까지 하였다. 16살에 양복점에 취직 하라시는 부모 몰래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직장생활을 할 수 없을 터 뭐해먹고 살거냔 물음에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때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하시는 물음에 그땐 내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답했다. 그 후 30년, 맞섰다. 장애와 맞선 것이 아니라 세상과 맞섰다. 그리곤 선영을 찾았다. 부모님께 한 것이라곤 아버님 회갑잔치에 올린 한 잔 술이 전부였다.”

시작노트 공개 여부를 물었더니 시인은 소이부답(笑而不答)이었다. 문득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왜 사냐건 웃지요’ 하는 싯귀가 떠올랐다. 소이부답은 그저 웃기만 하면서 답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나 그의 웃음엔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 배어 있었다.

아버지 회갑연에 술 한 잔 올린 것이 부모님께 한 것의 전부라고 하는 시인,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30년 유랑 끝에 찾은 선영이련만 흐트러진 봉분을 지키고 섰는 것은 키재기 하는 억새풀이었다. 그 억새풀을 맨손으로 뜯으며 아버님을 떠올린다.  굳이 주자10회훈(朱子十悔訓)을 들먹여 본다. 1회가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뉘우친다.
 장애의 몸으로 치닫은 무량세월, 그것도 꺼이꺼이 보내었으니 다한 말이다. 그 신산에 마음이 아린다.
 멍석말이까지 했던 아이는 자라 이순이 되어 선영을 찾았다. 모진 것이 목숨이라더니, 귀에 벤 산새소리는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감상문을 쓰고 있으려니 TV에선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가 방영되고 있다. ‘홍시’를 열창하는 나훈아, 아내 몰래 눈물을 훔쳤다.
 죽비 맞을 사람이 어찌 시인뿐이리오. 귀볼이 달아오르는 사람이 어찌 시인뿐이리오.<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