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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미 수필28] '차 밭에서'우광미/수필가/궤적을 찾다 저자/ 한국 문인협회 회원/2020 경남신문 신춘문예수필당선자

                               차 밭에서

젖은 것으로 경험하고 마른 것으로 추억한다. 수구에 물을 붓자 무언의 인고(忍苦)가 펼쳐진다. 잎마다 숨겨 두었던 강을 불러온다. 물과 불에 단련이 덜 된 차는 위로 뜨고, 올된 찻잎은 가벼이 떠오르지 않는다. 묵묵히 물의 무게를 담아낸다. 곰삭은 차나무의 생이 펼쳐진다.

차에는 분석되지 않는 신비함이 있다. 녹차가 청춘의 맛이라면, 발효차는 연륜의 맛이다. 연녹색을 가진 녹차와 검갈색을 가진 발효차는 인고의 색깔부터 다르다. 녹차의 맛 속에 싱그러운 숲의 숨결이 있다면, 발효차의 맛에는 민물과 간물을 품는 강의 숨결이 있다. 똑같은 녹차나무의 잎을 원료로 하지만 가공과정에서 발효를 억제시킨 것이 녹차이고 발효를 촉진시킨 것이 발효차다.

  비탈진 밭에서 자란 야생 차나무는 타협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곧은 심성이 있다. 곡우를 전후로 해서 딴 햇차는 우전차라 하여 줄기에서 처음 눈이 터서 잎이 다 펴지지 않은 순을 딴 것이다. 귀한 만큼 그 몸값도 높아 차를 따러 갈 때는 흐린 날을 피하고 화장이나 몸에 향기가 나는 것을 삼간다.

  오월의 차 밭은 강바람에 수런거린다. 강에 닿지 못한 나무는 목이 말라, 봄볕 부서지는 강의 윤슬을 제 몸에 불러 앉혔다. 봄이면 섬진강 근처에 사는 시인이 차를 보내왔다. 그가 만든 차는 향이 깊고 곱다. 그의 행간까지 녹아있어 삶의 은유가 느껴지는 맛이다. 차를 만드는 과정이 궁금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직접 차를 만들 요량으로 차 밭을 찾았다. 

  차나무 밭을 지날 때면 잘 정리된 차 밭에 시각이 먼저 제압된다. 차나무들은 납작 땅에 엎드렸다. 높이 자란 차나무는 잎을 따기 어렵다. 관리가 편하게 잘라낸 가지에서 새로운 두 가지가 자라나온다. 가지에서 이파리가 열리니 생산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이발을 한 듯 나지막하게 손질이 잘 된 차 밭을 지나 경사진 언덕을 올라 시인의 차 밭에 다다랐다. 일창일기(一槍一旗), 말려있는 새 순이 창처럼 뾰족하여 이르는 말이다.

  여린 잎의 목을 꺾는 일이 미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잎을 따는 일은 흥미로웠다. 무아지경이다. 새 순에 눈이 멀어버린다. 어느새 목적은 행위 자체를 일괄화시킨다. 욕심은 이내 다른 나무로 옮겨 잎을 딴다. 내가 지나간 자리를 돌아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니 지날 때는 몰랐던 새순들이 아래쪽에 가득 있다.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출수록 어린 새부리 모양의 새순이 잘 보인다.

  내 삶도 이렇지는 않았을까.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 아래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다른 나무에 보이는 더 많은 새순을 찾아 헤매지는 않았는지. 그런 시간들을 돌아본다. 적요한 차 밭. 세상 사는 이치가 차 밭에도 있다. 마치 오체투지를 하듯 차나무처럼 나도 땅에 몸을 낮추면, 바람이 전해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세상의 거센 풍파 앞에서도 조심스레 조아려 엎드리면 더욱 강건한 뿌리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찻잎을 따니 잡념은 사라지고 속세는 멀어진다. 그림자가 길어지니 어지간히 욕심을 접고 산을 내려오다 길섶에 찻잎 한 장을 따 씹어본다. 찻잎은 구취를 제거한다. 입으로 들어온 것보다 입으로 나간 것이 세상을 더럽힌다 했던가. 세상을 향해 내뱉은 허한 말들이 때로는 내게 족쇄가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했다. 그간 내가 한 무심한 말들이 산화되고, 정화되어 희망만을 말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나의 바람까지 바구니 속에 담아 내려왔다.

  차를 만들 때는 살청(殺靑)의 과정을 거친다. 모름지기 세상에 존재하는 유정물들은 각자의 독이 있다. 차가 가진 독성을 제거하고 생엽의 풋내를 없애 좋은 차향을 만드는 과정이다. 오래 전 대나무의 푸른빛을 죽이기 위해 불을 쬐는 행위도 살청이라 하였다. 종이가 없던 시절 대나무에 기록을 남겨야 했는데, 갓 자른 생(生)대나무는 수분이 많기에 필사가 어려울 뿐 아니라 벌레가 생기거나 또 심하면 햇볕에 갈라질 수 있었다. 그래서 직접 불을 쬐는 작업을 해 대나무의 푸른빛을 죽인 것이다. 무릇 살아있는 것들은 자기를 버리고 나서야 더 긴 생명을 얻는가 보다.

  조선 후기 승려 초의와 추사의 신분을 초월한 돈독한 우정에도 차는 매개자로서 한몫을 하였다. ‘홀로 마시면 신의 경지에 이른다’라는 초의 선사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시음을 하기 위해 주변 이웃들을 불렀다. 차를 대접하니 모두 맛이 좋다며 고마워 한다. 범속한 내가 도에 이르는 차를 음미하기는 힘들다. 차맛은 향으로 분별되지만 정으로도 마시는가 보다. 사람 사이의 정, 이보다 더한 맛이 있을까.

  호젓한 시간이면 발효가 잘 된 차를 마시며 세속에 물든 나를 헹구어 본다. 사람도 고달픈 생의 질곡을 지나온 자가 자신을 내릴 줄 알듯이 수구 아래 찻잎의 시간을 바라본다. 햇차 한잔이 미뢰에 남긴 향기가 온몸의 집착을 내리게 하는 깨우침은 아닐까. 속절없이 가는 봄날의 그 허무함도 차 한 잔에 위로를 받는다.

무언으로 지혜를 가르치는 5월의 차밭에서 나는 무얼 찾았는가. 들었는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더욱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라 봄바람에 전해져 오는 듯하다. 대나무도 살청을 하고 나서야 오래도록 보관될 역사가 씌어 책으로 남고, 찻잎도 오래도록 좋은 향을 유지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덮고 상처마저 아물게 하듯이 자신이 선택한 일을 소명처럼 생각하고 이처럼 항아리 속에서 곰삭아 누군가의 가슴에 푸르게 살아나는 찻잎이기를 소망한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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