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32]
                                         '옹 기'
                          

                                          이 덕 재

                         큰 처남 신접 날 때
                      장모님이 주셨다는

                      숨 쉬는 옹기 세 개를
                      정성 들여 실어 왔다

                      언제나 눈길이 닿던
                      앙증맞은 것들을.

                      아파트로 이사하는
                      홀로 된 처남댁은

                      옹기는 늘 밖에서
                      바람쐬야 한다면서

                      우리집 장독대에다
                      낙점 주고 있었다.

                      대 이은 고부 손길에
                      윤나는 옹기들이

                      도란도란 정담들을
                      나누는 것만 같아

                      불룩이 나온 배처럼
                      내 가슴도 부푼다.

◎勿哭辭(물곡사)
 해학(諧謔)은 안 좋은 것을 빗대어 비웃는 ‘풍자(諷刺)’와는 달리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이다. 풍자와 해학이 담긴 글은 시대를 막론하고 세월이 하수상 할 때 자주 등장하고 잘 먹힌다.
 조선조 선조 연간 39세로 요절한 길 위의 선비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호방한 성격에 시, 술, 검, 퉁소를 좋아하여 조선 최고의 풍류객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35세 때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는 길에 명기 황진이를 만나려 지금의 개성에 들렸다. 이미 황진이는 중종 연간에 단명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임제는 그녀의 무덤에 술잔을 올리고 추도시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곳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어 하노라.

낭만이 가득한 그의 행동이건만 고답적인 조선사회는 비난일색이었다. 어명을 받고 임지를 가던 중 관복을 입은 채로 천한 신분의 기생무덤 앞에서 잔을 올리고 시를 읊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파직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천하 명기와 대작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한스러웠을 뿐 이런 수모를 개의치 않았다.

임제는 동서 붕당의 현실 정치를 개탄했다.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영혼이 자유로웠다. 연암 박지원의 〈낭환집〉 서문에 그의 일화가 남아 있다. 임제는 부친이 성인이 된 기념으로 준 준마를 평생 타고 다녔다. 어느 날 모임이 끝나고 말을 타려하자 한쪽은 가죽신, 다른 한쪽은 나막신을 신었다고 하인이 말렸다. 그러자 백호가 꾸짖었다. “길 오른쪽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 사람들은 나막신을 신었다 할 것 아닌가,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붕당에 대한 그의 해학이었다.

임제가 남긴 일화가 많다.
사람들은 임제를 두고 기인이라 하였고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여 사귀기를 꺼렸으나 그의 시문은 널리 애송되었다. 말과 퉁소로 전국을 주유하던 임제는 병을 얻어 고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로 돌아왔다. 1587년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임종에 아들들이 슬피 울자 그 유명한 「勿哭辭」를 유언으로 남겼다.

          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 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

          사이팔만 개호칭제
          유독조선 입주중국
          아생하위 아사하위
               물곡

사방의 나라마다 모두 황제라 칭하는데 오직 우리만 자주독립을 하지 못하고 속국노릇을 하고 있다. 이 욕된 처지에 살면 뭐하고 죽으면 뭐하겠느냐. 나죽어도 곡하지 마라. 왕정과 사대부들은 싸잡아 비난한 독설이자 비겁한 시대가 창피하다는 뜻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도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임제가 통탄한 비겁한 시대는 40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재현되고 있다.

뒷날 국문학자 조윤제는 「한국문학사」에서 “임제는 기개가 백두산 같을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울적한 기분을 자학하여 많은 시를 쓰고 또 소설 「수성지」를 썼다”고 평했다.
사학자인 호암 문일평 선생도 그의 유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의를 표했다. “임백호의 멋진 생애에서 가장 감격적인 장면은 그의 위대한 임종이다.” 언제 나주에 들리어 백호선생 무덤에 잔 한번 올리고 싶다.(이후 다음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현대시조 발행인

시조 작품 〈옹기〉는 이덕재 시인의 작품으로 3수 연작의 서정시조다. 시인은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애살이 많다.

첫째 수에선 언제나 눈길이 닿던 앙증맞은 옹기를 실어 왔단다. 그것도 / 큰 처남 신접 날 때 장모님이 주셨다는 / 그 옹기다. 숨 쉬는 옹기 세 개는 처남댁에 갈 적마다 눈길이 닿던 앙증맞은 옹기였기에 정성을 들여 싣고 왔다.

둘째 수는 처남댁의 마음을 읊었다. / 아파트로 이사하는 홀로 된 처남댁은 / 아파트 베란다에 옹기를 둘만도 하건만 / 옹기는 늘 밖에서 바람쐬야 한다면서 / 시인의 장독대를 들먹이곤 했다. 이를 시인은 장독대에다 / 낙점 주고 있었다 / 고 감칠맛 나게 표현하여 시조의 格을 살리고 있다.

셋째 수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옛말을 떠올리게 한다. ‘감히 청하진 못하나 본래부터 바라던바’라는 의미다. 옹기를 갖고 싶었으나 차마 달란 말을 하지 못했다. /대 이은 고부 손길에 윤나는 옹기들이 /다. 장독대에 놓인 윤나는 옹기들에 봄 햇살이 내려 따스한 정감이 어려 있다. 마치/ 도란도란 정담들을 나누는 것만 같아 / 시선이 오래 머문다. / 불룩이 나온 배처럼 내 가슴도 부푼다 / 고 천석군이 된 마음을 읊었다.

피천득 선생은 수필 〈송년〉에서 “새색시가 김장 30번만 담그면 늙고 마는 인생”이라 했다. 그 김장 30번을 담그는 용기가 바로 옹기(甕器)다.고려청자, 조선백자, 분청사기 등은 한국의 도자기 문화에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왔음은 주지의 일이다. 그런가하면 옹기는 비록 예술적 가치에선 홀대를 받지만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젓갈 등 발효음식과 더불어 생활용기의 역할을 도맡았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옹기를 끊임없이 만들고 가꾸어야 했다. 그러기에 옹기의 생활문화는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역사만큼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소박한 신앙을 그대로 품어 간직 하고 있다.장독, 쌀독, 물독, 젓갈독 등을 통해서는 고유의 음식 문화를, 동이, 장군, 시루에서는 일상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성주단지, 조상단지, 터줏가리, 조왕종발, 칠성 등은 여인들의 소박하지만 절실했던 신앙을 짐작케 한다. 초가의 굴뚝엔 연통으로 쓰이는 등 그 용도는 다양하고도 요긴했다.

 이렇듯 옹기는 그릇으로서만이 아니라 수많은 삶의 요소들을 담고 있기에 우리 문화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매개체였다.시인은 시골 태생인지라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룬 초가집과 감나무 아래에 자리한 소박한 장독대를 줄 창 보고 자랐다. 곳간, 부엌 풍경과 손때 묻은 살림살이 등은 하나 같이 어머님의 삶이 녹아 있기에 그 정경을 가슴에 지니고 살고 있다. 그래서 옹기에 대한 애착의 면면을 시조 작품 〈옹기〉에서 보여 주고 있다.농사꾼이라 자처하는 시인은 누가 뭐래도 한가락 하는 시인이다.<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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