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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미 수필30] '침목'우광미/수필가/궤적을 찾다 저자/ 한국 문인협회 회원/2020 경남신문 신춘문예수필당선자

                        침목

                                                    우    광    미

내 유년의 뜰에는 시골의 간이역이 있다. 아침에는 그 역으로 들어서는 기차소리에 눈을 떴고, 주어진 숙제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열차소리는 정겹게 내게로 다가왔다.

  집에 어른들이 없는 날에는 의례히 역 마당에 나가 놀았다. 그곳은 놀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고무줄도 하고, 사방치기도 하며 놀았다. 때로는 역무원 아저씨의 눈치를 살피면서 철길에까지 나가기도 하였다. 그리곤 레일에 귀를 대고 기차가 올 시간을 가늠했다. 병마개를 레일에 올려놓고, 열차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아이들은 납작하게 눌린 병마개로 딱지처럼 치기를 하며 놀았다. 개중에는 못을 레일에 올려 납작하게 만들어 칼처럼 사용하는 아이도 있었다.

  처음에는 철길에 나가 노는 것이 두려웠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까운 놀이터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늘 그곳에서 놀다 보니 학교 운동장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먼지가 폴폴 날리는 신작로보다 레일 위로 걷기를 좋아했다. 그러다 어른들의 눈에 띄면 눈물이 빠지도록 꾸지람을 들었지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레일 위를 걸으며 집에 오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좁은 표면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레일 위에서 몸의 균형을 잡는 놀이는 우리를 충분히 매료시켰다. 그 위에서 균형을 잡다 보면 아무런 잡념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쭉 뻗은 철길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온 정신을 모았던 것이다.

  친구와 한 쪽씩 레일을 차지하고 걷는 일이 많았다. 서로 누가 더 멀리 가나 내기도 하였다. 진 사람이 상대의 가방을 들어다 주기도 했다. 레일에서 떨어지면 온전히 걷고 있는 친구까지 끌어당겨서 떨어지게 심술도 부리며 놀았다. 물론 기분이 좋은 날은 그것이 다 이해가 되었다. 서로 당기기도 하고 밀치기도 하면서 집으로 왔으니까.

  하지만 서로 기분이 뒤틀어진 날은 말없이 레일 위를 걷기만 하였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눈길을 주는 법도 없었다. 상대가 레일에서 실수하여 떨어져도 웃음은커녕 돌아보지도 않았다. 레일은 두 사람의 간격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서로 접근할 수 없도록 정확하게 떼어 놓았다.

  레일의 일정한 간격은 침목이 지켜주고 있다. 레일 밑에서 받치고 있는 침목이 부품들을 물고 놓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두 레일이 평행을 유지하며 뻗어가는 것은 침목의 그 무뚝뚝한 심성에서 비롯되는 듯이 보였다. 아무리 육중한 열차가 달려들어 뒤흔들어도 전혀 동요함이 없다. 힘에 부쳐도 끝끝내 버텨내고 레일을 움켜잡는 일에 전념하는 코일 스프링. 두 레일이 깔깔거리며 즐거워해도 지나치면 안 된다고 일러주는 침목. 가까울수록 더 거리를 지켜야 함을 일깨워 주는 것들이다.

  분니가 발생하여 레일에 위험이 닥쳐도 코일 스프링은 온 힘을 다해 위기를 견뎌낸다. 열차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자갈이 부서지고 종내에는 생긴 분니를 제거해야 하는 철길.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를 악물고 레일의 간격을 고정시키기 위해 부품들과 침목은 온 힘을 다한다. 서로의 신뢰와 믿음이 있기에 이들이 최선을 다하듯 사람들에게도 관계 유지를 위해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있다 해도 일정한 거리는 간직해야 한다. 한순간 다투었다 하여 둘 간의 거리를 넓혔다간 영영 되돌아올 수 없으매 꼭 움켜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제 자리에서 스스로 곱씹어보고 반성하게 만든다. 그래야 다시 손을 뻗었을 때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조율되지 않는 일로 하루를 소비했다. 상대는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금세 등 돌려 나갈 사람처럼 성화를 부렸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내가 너무 경직되었다고 탓하는 눈치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등을 돌리면 모든 일이 끝이라며 당당해 했다. 지금까지 간직해 온 유대감을 송두리째 벗어던지고 각자의 길을 걷자는 듯이 성급하였다. 굳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보였다.

  우리는 서로 상대의 접근을 막아내고 있었다. 답답한 심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심사를 누구에게 펼쳐놓을 처지도 아니었다. 그냥 혼자 가슴에 담고 삭힐 일이었다.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며 지새운 밤이 몇 번이던가. 가슴 쓸어내리며 애를 태운 날이 얼마이던가. 이루지 못하는 잠결에 그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 후 미안하다며 보내온 그의 문자. 흐릿하게 보이던 문자가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미소를 머금고 선명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서운하기만 하던 가슴 한 편이 그리움으로 젖어올 무렵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우리의 관계를 받치고 있던 침목이 믿음으로 레일을 물고 있었다.

  그에 대한 서운한 감정 모두 실어 험한 말을 입에 담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얼마나 멀리 떠나가 있을까. 눈을 비비고 찾아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갔더라면 다시 그는 내게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침목에 물린 레일처럼 가깝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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