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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미 수필31] '결'우광미/수필가/궤적을 찾다 저자/ 한국 문인협회 회원/2020 경남신문 신춘문예수필당선자

                                       '결'
 
                                                             우    광     미                                                                    (2020 '수필미학 가을호'에 게재된 작품}   

한없이 무르고 여린 것에도 날이 있다. 제 몸에 숨긴, 서슬 퍼렇게 벼린 날. 어쩌면 모진 생명력의 상징이자 한 생의 꽃을 피우기 위한 다짐이다.
  거침없이 내리던 비가 그쳤다. 화분에 숨어 사는 달팽이 소행일까. 기르던 신비디움 꽃대가 속에서부터 녹아내렸다. 연초록의 눈부심이 진갈색의 액체로 흩어졌다. 낮엔 화분을 돌려가며 볕도 골고루 쬐어 주고, 새벽에 깨면 발걸음이 먼저 가 눈정도 주었던 터였다. 무엇보다 여러 날 그리던 세밀화의 오브제가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낭패다. 당장 다른 식물로 바꾸려다 햇볕 좋은 곳에 두었다. 시멘트도 뚫고 올라오는 풀의 생명력을 생각하며 자연의 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보름쯤 지났을까, 날카로운 창끝인 양 흙을 뚫고 나오는 새순의 기백이 가상하다. 돋아난 새순을 자세히 보니 미세한 결이 있다. 자랄수록 도드라질 정체성이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고유의 결을 지니고 있다. 결이란 범속한 하루하루가 만들어 가는 지문이자 살아온 방향이다.
  식물의 지문을 살핀다. 관찰의 시작이다.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줄기의 형태와 매달린 잎맥의 방향, 꽃이 피어나는 모양새. 이 모두가 자연의 조화로움이다. 하지만 곧고 바르게만 자란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언제나 순방향만 있는 게 아니다. 역방향도 있다. 꺾인 가지에 상처가 굳어진 자리, 차마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이파리 하나에도 존재의 의미는 있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비록 화려한 꽃을 담진 못해도 고단한 시간을 견뎌낸 신비디움줄기가 생명의 본질에 더욱 근접한 오브제가 아닐까. 자연스럽다는 말은 어색함이 없이 온전한 평화가 깃들어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역경을 견뎌낸 평화야말로 더 큰 가치를 지닌다.
  식물 세밀화 그리기는 시간을 거슬러 대상의 지난 날을 읽어내는 일이다. 실물을 옮기는 과정은 실제와 간극이 있다. 보고도 손으로 그리면 형태가 틀어져 잦은 수정을 한다. 그 후 채색을 할 땐 결 방향을 따르는 것이 요령이다. 오래 몰입하다 보면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땐 물러서서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자연을 오차 없이 그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본질을 벗어나지 않은 다름은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그 다름에 의해 자신의 개성이 스미게 된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린 이의 정성이 깃든다면 그림에는 생명이 부여된다. 모든 일에 때가 있듯, 꽃도 저마다 필 때 순서가 있다. 각자가 가진 결대로, 사람도 저마다 자신의 꽃을 피우기 위해 곤궁한 날을 온몸으로 견뎌낸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림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바탕에 깔려있다 지워지는 선처럼, 살면서 천둥 번개와 비에 젖지 않은 게 어디 있겠는가. 이렇듯 사람을 대할 때도 선한 마음으로 그가 지닌 결을 읽고 상치 않게 할 일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고개를 끄덕인다. 생을 짚어보면,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날을 꽃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걸 깨닫는다.
  한때는 화려한 꽃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제는 작고 소박한 풀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마다 결이 다르지만 무리로 어우러져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 평온해진다. 어느 곳에 있어도 생경하지 않게 자신의 존재는 배경으로서 운치를 더한다. 이 꽃들 중에는 누군가의 손가락에 끼워주며 우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더러는 화관을 만들어 쓰고 언젠가 만날 인연에 대한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날 중에 가장 강하면서 약하기로야 풀의 날 만한 게 있을까. 억센 바람엔 먼저 눕고 고요해지면 먼저 일어서는 지혜로움도 있다. 풀밭에 가면 비릿한 냄새가 난다. 생존을 위한 날것의 비린내. 긴장과 생명력, 군집의 장엄미에 절로 숙연해진다. 
  허리를 굽힌다. 때론 무릎도 굽혀야 보이는 존재들. 더러는 벌레에 뜯어먹혀 상처도 있지만, 저 거친 몸짓 뒤에 숨은 눈물이 있다. 저항에서 나오는 강인함. 때때로 사는 일이 오뉴월 한기처럼 몸을 파고들면, 길섶 풀들의 결을 바라본다. 여린 마음자리가 어머니를 닮았다. 
  잠시 느리게 걷다보니 산책로의 토끼풀이 만발해 있다. 생의 환희처럼 바람의 길을 마중하고 있다. 코끝에 스미는 풀향기, 한아름 마음보따리에 담아 언젠간 그림에 옮겨 놓고 싶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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