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44]
     '그리움'  

   강    민   진

어쩌면 친형보다
도탑게 지낸 지기

정겹던 지난 세월
그립고 또 그립다

나보다 먼저 왔다고
그리 빨리 가시었나.


떠난 지 몇 해 건만
아쉬움 그대론데

한 잔 술에 잠긴 추억
달빛에 일렁이고

어느덧 새벽노을에
붉어지는 눈시울.


별빛은 제 알아서
말없이 사라지고

산방산 골골 채운
그리운 사연들을

거제만 바닷바람이
끌어안고 다독인다.

◎조홍시가(早紅柹歌)
  신축년 벽두에 닥친 북극발 한파가 매섭다. 코로나 19에다 혹한, 탐욕스러운 이기심과 무지몽매함으로 난개발을 일삼던 인간에게 자연이 보내고 있는 경고이지 싶다. 추위에 자리보전하다 글빚에 상머리에 앉았다.

 ‘무당칠 어당팔’이란 조어가 있다. 무식이 당수 칠단이고 어중잡이가 당수 팔단이란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얼추 맞는 말인 것 같다. ‘어당팔’이라, 영판 나를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업 작가도 아니건만 어중간은 글쓰기로 글빚에 노상 쫒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글빚을 갚느라고 출출하던 차에 감을 찾았다. 해마다 진영에서 감을 보내주는 난우가 있다. 지난해에 그가 보내준 감이 반은 홍시가 되어있었다.

 추운 겨울밤에 홍시를 보면 부모님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는 나훈아의 〈홍시〉도 가만 가만 불러보지 싶다.
 요새 사람 뿐 만 아니라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도 홍시는 부모님을 떠올리게 하는 과일이었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조홍시가(早紅柹歌)라는 시조다.
 선조 34년(1601) 박인로가 당대의 명신 한음 이덕형의 집을 찾았다. 그때 손님 접대로 일찍 익은 감이 소반에 담겨 나왔다. 참으로 소담스럽고 고왔다. 이를 본 노계는 육적회귤(陸績懷橘)의 고사를 생각는다. 그러나 감을 품어 가져가도 반길 부모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육적회귤은 효성이 지극함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인 육적(陸績)이 여섯 살 때 아버지 육강을 따라 구강에 있는 원술을 뵈러 갔는데, 원술은 손님인 육씨 부자에게 귤을 대접했다. 이때 육적은 귤 두개를 품속에 숨겼는데, 떠날 때 원술에게 인사를 드리려다 그만 귤을 땅에 떨어 뜨렸다.원술이 웃으면서 “육랑은 내 집에 손님으로 와놓고 어찌하여 주인의 귤을 감춰 가느냐?”고 말했다. 육적이 대답하기를 “저희 어머님이 귤을 좋아하시는 지라, 돌아가서 어머니께 맛보려 하려 그랬습니다.”하였다.

원술이 보건데 어린 나이에 모친을 생각하는 효성이 갸륵함에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는지 귤을 더 주었다고 한다. 육적회귤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육적은 자란 후 박학다식하여 천문과 역법에 통달하여 혼천도를 저술하고 역경(易經)에 주를 달았다. 육적회귤은 회귤유친(懷橘遺親)과 같은 말이다.

노계는 조홍시가에서 귤을 유자(柚子)라 했다. 지금은 귤이 흔하나 당시는 귤이 귀했는지, 아니면 귤을 유자라 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감 때문에 귤을 순우리말로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나 귤(橘)은 한자어다. 사람도 환경에 따라 변화함을 이르는 귤화위지(橘化爲枳·귤이 변하여 탱자가 되었다)란 말도 있다.

노계 박인로(1561-1642)는 조선 중기의 무인 겸 문인이었다. 9편의 가사와 70여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정철,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3대 시가인으로 불렸다. 대표작으로 위의 〈조홍시가〉와 〈누항사〉등이 있다.박인로는 어려서부터 詩才가 뛰어 났으나 32세 때인 1592년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함락 되는 곳이 많아지자 분연히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했다.

1599년 무과에 등과하여 수문장(守門將)을 제수 받았다. 그는 무인의 몸으로도 언제나 낭중에 붓과 먹이 있었고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詩情을 잃지 않았다.그는 ‘생애 전반부는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며, 비록 후반생부터 문인 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송강 정철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후반부는 향리에서 유가서를 읽으며 안빈낙도를 실천한 노계는 3권 2책의 〈노계선생 문집〉을 남겼다.노계는 우리 거제에 족적을 남겼다. 고영화 선생에 의하면“노계는 선조 32년인 1599년 구조라(助羅城) 만호(萬戶·성주)로 부임해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사졸들이 유애비(遺愛碑,善政碑)를 세워 덕을 기렸다. 당시 만호란 벼슬은 녹봉이나 토지가 주어지지 않아 생활기반인 둔전도 대부분 권력자에게 빼앗겨 그의 생활은 궁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구조라 유애비 내용은 ‘행만호박공인로유애비(行萬戶朴公仁老遺愛碑)’이며, 1600년 경자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흔적조차 없으나 당시 항리(구조라) 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효는 문자 그대로 백가지 행동의 근본이나 이를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식이 진정으로 어버이의 은혜를 깨닫고 섬기려 할 때는 그 어버이는 이미 돌아가신 다음이다. 기다려 주지 않은 세월만 탓할게 아니라 매사에 후회 없는 진심을 다하는 것이 늦었지만 효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해 본다.

〈홍시〉를 부른 나훈아씨는 정해년생 나와 동갑이니 나도 어느새 자식이 품어온 홍시를 받는 나이가 되었다.‘쏜살같다는 세월’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사는지가 꽤 되었다.“백세인생”을 노래한 이애란씨 후원회를 만들까 궁리중이다. 이 궁리를 시골 무지랭이의 흰소리라 그냥 웃어주길 바랄진저.(이후 다음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현대시조 발행인

.시조작품 〈그리움〉은 강민진 시인의 작품으로 3수 연작으로 수년 전 작고하신 교직 생활의 멘토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읊은 작품이다.

감상에 앞서 시인의 시작노트를 옮겨본다.
“30여년 교직생활을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 문득문득 생각나는 한 분이 계신다. 이분은 나의 젊은 날 교직생활의 멘토로서, 선배로서 때로는 형처럼, 친구처럼 25년을 살갑게 지낸 분이다. 누구보다도 교육에 대한 열정과 소신, 사명감이 높아 동료 교사들에게 귀감이 되신 참교사 이셨다. 특히 나를 친동생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셨기에 나또한 친형처럼 따랐다. 그런데 몇 해 전 급성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술도 오로지 소주만 즐기시어 절제의 주도를 몸소 가르쳐 주셨던 소탈한 분이어서 지인들도 가끔씩 생각난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멈추어 버린 상태이고 보니 이 분이 더더욱 그리워진다.”

첫 수는 먼저 가신 선배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오랜 교직 생활에서의 멘토였기에 그 정은 / 어쩌면 친형보다 도탑게 지낸 지기 /였다. 그 세월 헤아리니 / 그립고 또 그립다./ 절절한 그리움에 / 나보다 먼저 왔다고 그리 빨리 가시었나 /하고 투정하여 본다.

둘째 수에선 달 아래 자작하는 술잔에의 슬픔을 노래했다. / 떠난 지 몇 해 건만 아쉬움 그대론데 / 들이키는 / 한 잔 술에 잠긴 추억/은 달빛에 일렁이고 있다. 시간은 흘러 인시 / 어느덧 새벽노을에 붉어지는 눈시울/ 이다.

셋째 수에선 산방산 골에 스치는 그리운 사연을 읊었다.
새벽녘 눈을 드니 어느 사이에 별빛도 사라졌다. 뒷산 / 산방산 골골 마다 그리운 사연들만 / 가득하다. 그 사연들을 / 거제만 바닷바람이 끌어안고 다독인다. / 고 시인은 눈시울을 적신다.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않겠는가. 그리움에 이토록 가슴이 저리는데.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란 싯귀가 있다.
이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벗이 있다면 저 하늘 끝에 있어도 가까운 이웃같다네.
당의 유명한 시인 왕발(王勃)이 ‘촉주로 부임해가는 두소부(杜少府)를 보내며’라 제한 시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 살아만 있다면 그곳이 비록 하늘 끝이라 한들 무슨 대수랴. 산사람은 꼭 만날터니 말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거제면 내간마을을 두고 나는 명당이라 말한다. 풍수를 모른다 해도 뒤로 수려한 산방산을 두고 앞으로 청정한 거제만을 두고 있으니 배산임수인지라 어찌 명당이라 하지 않으리오. 사람이 그리워 가슴 저려 본 사람은 안다. 그 그리움이 어떤 것인지를. 달빛이 산방산자락에 가득한날 인시까지 혼자 술잔을 기울인 시인, 그날따라 사람이 그리웠다. 〈그리움〉이라 제한 시에서 그리는 그 사람이다. 살아있다면 하늘 끝에 있어도 좋으련만 그는 가고 없다.

‘其人風林’이라 題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1990년 송년 모임을 남한산성에서 가졌다. 이 모임에 장안의 奇人이 모였기로 모임의 이름을 ‘奇人會’로 붙였다. 다들 좋다더니 술이 한 순배 돌자 ‘奇人’이란 말이 직설적이라 격이 없으니 그저 그러한 사람이 모인 것인지라 ‘其人風林’ 어떠냐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리곤 기인풍림의 여섯 기인에 대한 면면을 소개했다.
사람의 일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수많은 만남 중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있기 마련이다. 만남으로 해서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고 인생항로가 바뀌기도 한다.
나에게도 소중한 만남이 있었다. 바로 ‘기인풍림’의 좌장인 J형과의 만남이다. 그는 경기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였다. 나보다 다섯 살 연배였던 J형은 무척 나를 아껴주었고 나도 형처럼 그를 따랐다. 선물로 드렸던 중국춘란 ‘송매’에 매료되어 밤을 새워 들려다 보았다는 그였다.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가졌던 필자의 난석전에서 객기를 부려 마련했던 ‘풍류의 밤’ 또한 그가 계셨기에 가능했다. 그가 95년 심장병 수술이 잘못되어 운명하셨다.
그가 떠난 지 26년, 그가 살아 있다면 내 삶이 얼마나 윤이 날까 하고 안타까워한다. 그가 주간으로 있던 ‘계간현대시조’를 내가 이어받아 발행하고 있으니 인연치고는 예사롭지 아니하다. 그는 가고 없으나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 있다.”

시인의 마음도 나와 같지 싶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자.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오승근이 부른 노래를 읊조려 본다. 차가운 마음에 부는 바람도 차갑다. ‘춘래불사춘’이 아니길 간절히 빌어 본다.<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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