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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희수필 28]남극의 봄윤석희:수필가/시인/신곡문학상수상/수필집「바람이어라」,「찌륵소」펴냄·눌산 시창작교실 수료

마젤란 해협을 건넜다. 낯선 침입자에 항거하듯 파도가 거칠다. 아주 먼 곳까지 온 거다. 냉랭한 바람, 황량한 대지, 음울한 하늘 외엔 아무것도 없다. 하도 호젓하고 쓸쓸하여 눈물이 돈다. 기분까지 가라앉아 영화 “피아노”의 음울한 분위기가 연상된다.

불모의 땅이라도 대륙의 끝자락이 아닌가. 한반도의 땅 끝 해남에 다가 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도 뱃전에서 주위를 바라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설렘이 일고 서서히 들떠진다. 목숨 걸고 뱃길에 나선 옛 사람들의 숨결이 전설처럼 스며든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찾아 여기 온 것일까. 나는 또 왜 여기 있는가. 

칠레의 꽃의 섬 칠로에의 카스트로에서 출발했다. 버스로 서른아홉 시간 드넓은 파타고니아를 남으로 달려 푼타 아레나스에 닿았다. 이곳에서 펭귄 서식지를 잠시 보고는 다시 우수아이까지 열다섯 시간을 더 내려온다. 참 긴 여정이다. 이곳이 남극점에 가까운 대지의 종점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한계점이 되는 곳이다. 호기심 하나로 버텨온 며칠간의 고행이다.

처음에는 가슴이 다 후련했다. 좁은 땅덩이에서 나고 살은 내가 텅 빈 대평원을 맘껏 달려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통쾌했다. 신도 났다. 그런데 얼마가 지났을까. 따분해진다. 몇 날을 똑같은 경관만 보자니 지루하다. 사막과 다름없는 풀 한포기 없는 백사지가 마음까지 말라붙게 한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차마저 드문 길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잿빛 하늘은 빛도 볕도 없다. 아스라한 지평선도 계속 이어지니 시들하다. 풀밭이 보고 싶고 숲이 그립다. 침침해진 눈을 푸른 하늘에 씻고 싶고 오감을 간질이며 스쳐가는 명주바람에 감기고 싶다.

아직 한여름이 되지 않아선 가 보다. 미처 깨나지 못한 풀들은 모두 죽었는지 땅 속에서 잠만 잔다. 울에 매달린 양의 주검이 가끔씩 차창에 비친다. 먹이 찾아 무리를 벗어난 야마가 바짝 야윈 몰골로 허둥댄다. 안쓰럽다. 지킬 것도 담을 것도 없으면서 천연목장의 가시울이 여름을 채비하고 열 지어 서있다. 을씨년스럽다. 그나마 삼 개월이 지나면 다시 해가 뜨지 않는 겨울이라나. 기나긴 겨울과 순식간의 여름이 이어지며 봄이 오지 않음을 말해준다.

봄기운이 닿지 않는 곳에 무얼 찾아 갈 것인가. 생명이 없는 곳에 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사로잡는 화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놀라웠다. 분명 삭막한 대지를 깨우는 봄의 전령이다. 키 세워 뽐내지 않고 고개 들어 자만치 않으며 아무도 봐주지 않는 들판을 지키고 있다. 여린 잎으로 언 땅을 밀어 올리며 맨 먼저 달려 나와 새 생명의 탄생을 전하고 있는 거다. 움을 틔우지도 새싹을 돋우지도 못하는 땅에서 아지랑이처럼 퍼지는 생명력. 드넓은 광야를 혼자 차지하고 있는데도 욕심스럽지 않고 청아하게만 보인다. 경이롭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민들레 벌판이다. 가도 가도 저 말고는 보이는 게 없다. 문명의 때 묻지 않고 사람 손 타지 않아 더욱 애틋하다. 노란 대지가 천상의 화원이다. 어떤 화가의 그림 속에서도 본적이 없는 찬란한 노랑에서 자연의 힘이 느껴진다. 화사하다. 봄이면 들녘에 지천이라 언제 제대로 봐준 적이 있던가. 절로 피었다 지려니 무심히 보아 넘긴 봄의 화신. 객지에서 느닷없이 지인을 만난 듯 반갑고 고맙다. 귀하고 갸륵하다.

“여기 이 들판에도 봄이 있어 너희가 왔구나. 혹독한 추위에 기어이 살아남아 새 생명을 보여주는구나.”
미친 듯이 자꾸 말을 건다.
“공허 속에 살아 있기에 더 예쁘고 신기하다고, 혼자 있기에 더 대견하고 돋보인다고.”
 노란 웃음으로 민들레가 화답한다. 볕이 있는 동안 부지런히 일생을 살아내야 한다고.

민들레는 옹기종기 등을 맞대고 추위를 이기는가 보다. 칼바람 불어오면 땅에 바짝 엎드려 이웃과 몸을 부비며 견디는가보다. 파릇한 잎들은 차가운 땅의 냉기를 치마폭으로 막아서서 꽃대를 세운다. 서로서로 보듬어 안고서 스스로의 체온으로 다른 꽃을 따듯하게 감싼다. 언 땅속에서 여린 생명을 지켜내느라 뿌리는 또 얼마나 안간힘을 쏟을 것인가.

불모의 땅에 생명의 빛을 발하는 민들레처럼 나도 서둘러 또 다른 봄을 맞는다. 봄기운에 근질근질 온 몸이 간지럽다. 움츠림 속에서도 새 움이 틔고 있나보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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