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50]
     '경이(驚異)'  
     홍천 은행나무숲에서

         심   옥  배   

        이천 그루 은행나무
        달 아래 보셨나요

        그것도 눈에 덮인
        나목의 은행 숲을

        내 눈엔 안간힘 쓰며
        산을 지고 있습디다.

        수려한 계곡이며
        마알간 강물 하며

        흠잡을 게 하나 없는
        빛 부신 둥근 白月

        새하얀 경이로움에
        눈이 절로 감깁디다.

◎봄처녀
 세상은 온통 회색이나 계절의 순환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해토(解土) 밟히는 사이 선잠 깬 장끼도 울고 제법 뭉툭하게 수선화 새 촉이 솟아났다. 조팝나무 실가지 끝엔 송알송알 좁쌀 같은 새봄이 맺혀있고 부는 바람도 살가워졌다. 우수가 지났으면 얼른 떠나야할 겨울이련만 미적거림이 얄밉기만 하다.혹한에 혼쭐이 났기에 물안개 피는 동부저수지를 바라보며 읊조리는 대춘부(待春賦) 는 더욱 절실하다.지인이 카톡으로 새싹이 솟는 영상과 함께 가곡 ‘봄처녀’를 보내왔다. ‘봄처녀’는 이은상의 시조를 가사로 홍난파(洪蘭坡)가 1932년 작곡한 가곡이다. 홍난파 선생은 이은상의 시가 마음에 들어 작곡하게 되었다고 한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 이은상 ‘봄처녀’, 전문

 시조 작품 〈봄처녀〉는 새봄을 처녀같이 우아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곡 ‘봄처녀’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동요풍의 애창곡이며 최초로 시조를 가사로 택한 가곡으로 선율은 단순하자만 아름다운 여운을 느끼게 한다.

 1930년 이후 가람 이병기선생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시조 시인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민족적인 리듬을 살린 작품을 발표한 분이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선생이다. 이 땅에 샛별 같은 시인들이 명멸했지만 노산선생 만큼 화려한 시인도 없을 것이다. 노산선생의 많은 시조는 가곡으로 만들어져 남녀노소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애창 되고 애송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의 문복(文福)은 아마도 영원히 이어가지 싶다.1932년 펴낸 첫 시조집인 「노산 시조집」에는 향수, 인생무상,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이 실려 있는데 특히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등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이 담겨 있다.
 
노산선생의 시조가 많이 작곡되어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고 넓은 층 사람들의 정서에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뜻 한다.흐르는 물과 같은 천의무봉, 정다운 사람과 마주앉아 정담을 나누는듯한 인정미가 노산 문학의 특징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람선생을 두보(杜甫)에 빗댄다면 노산선생은 이백(李白)에 해당 한다고 하겠다.노산선생은 작달막하고 다부진 체구에 주먹코와 부처님 귀를 가졌다. 특히 귀는 어깨에 닿을 듯이 크고 긴데 레슬링 선수에게서 흔히 보는 것 같이 쭈글쭈글 했다. 젊어서 조선일보에 있을 땐가, 엄동에 경주 토함산에 오르다가 귀가 얼어서 부풀어 오른 것을 그대로 두었더니 그렇게 크고 두터워 졌다고 본인이 말하는 것을 시인 김해성(金海星)이 어디에다 밝혔다.

 그러나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선생의 동경 유학 시절 (1925-1928년무렵) 회고기에 보면 그때에도 이미 그런 귀를 가지고 있던 으로 되어 있다. “노산은 단구(短軀) 풍모(豊𩛨)에 귀가 유난히 크고 쭈글쭈글 하다”고 했다.노산선생의 나직한 목소리, 해박한 지식, 유머와 위트, 천재적인 기억력을 바탕으로 한 좌담은 듣는 이를 매료시켰다고 한다.
 6권의 시집을 위시하여 50수권의 저서를 남기고 수십 개의 직함을 가지고 나라와 겨레와 한글을 사랑한 노산은 1982년 9월 18일 타계 하셨다. 향년이 만81수였다.백낙준(白樂濬) 박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장이 치러졌고 동작동 국립묘지 제1국가 유공자 묘역, 아웅산 순국자들의 무덤과 이웃해 있다.1932년 간행된 「노산시조집 (鷺山時調集)」은 선생의 29세 때의 소산으로 우리 문단 최고 고전의 하나다.(이후 다음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현대시조 발행인

시조작품 〈경이〉는 심옥배 시인이 읊은 2수 연작으로 자연과 작자가 한 덩어리가 되는 物我一體 物心一如의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시작노트」를 옮겨 본다.
“며칠 폭설로 도시가 잠시 멈췄던 올 겨울, 서울 친정에서 오도 가도 못한 날이었습니다. 베란다 넘어 보이는 하얀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큰 숨을 들이쉬었습니다.자연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온기를 가져다줍니다. 틈틈이 키워 온 화초로 작은 정원이 된 베란다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묵상과 기도를 하게 만듭니다. 그 온기는 고스란히 그리움이 되어 다시금 설레게 합니다.거제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고속도로 반대 이정표인 강원도로 운전대를 돌려 해 질 녘 홍천 은행나무숲에 닿았습니다.
2천 그루가 넘는 은행나무숲은 개인소유로 10월에만 문을 여는 명소입니다. 꼭 가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아무 거리낌 없이 숲을 내어 주었습니다.눈 덮인 그곳은 내 발자국과 白月 뿐이었습니다.나는 그때 들었습니다. 산을 지려는 나목이 된 은행나무의 안간힘 소리를 말입니다. 그것은 경이였습니다.산골 산장에서 길손에게 내어준 떡국 한 그릇, 그 인연은 뜨근한 그리움으로 남았습니다.”

시조 작품 〈경이〉를 읽고 나니 어느 사이에 홍천 은행나무숲에 가있는 자신을 본다. 그것도 눈 덮인 은행나무 숲이다.필자는 동부 저수지를 끼고도는 도로변에 심겨진 은행나무를 얼추 30년 동안 보아왔다.먼저 은행나무 얘기를 하여본다.옛날, 은행나무는 한국과 중국 및 동남아 일대에 자생했으나 이것을 파먹는 독한 벌레가 있었다. 마치 뽕나무의 상옹(桑雍)같은 못된 벌레였다.벌레들은 막강한 힘으로 은행나무를 하나하나 쓰러뜨렸다. 드디어, 은행나무의 시체는 온 산야에 즐비했다.

오만방자한 벌레들은 생각하였으리라. 징기스칸의 표한(剽悍)도 우리들의 위력만은 못할 걸... 하고. 그러나 그 뉘라 짐작하였으리오. 그들이 파먹고 있던 은행나무 전멸의 날이, 바로 그들 자신의 멸망의 날이었음을! 이렇게 해서 은행나무와 은행나무벌레는 운명을 같이 했다. 이를 일러 공도동망(共倒同亡)이라 한다. 창세기의 대홍수에도 노아의 방주(方舟)가 있었다. 그것이 간신히 사람의 생명을 이어주었다.그 무서운 독벌레의 창궐(猖獗) 속에서도 멀리 쓰촨성(四川省) 어메이산(蛾眉山)에는 독야청청한 몇 그루의 은행나무가 남아 있었다. 그것이 번식하여 다시 퍼진 은행나무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 옛날 조상들의 멸종의 위기까지 몰고 간 은행나무벌레의 횡포와 비참한 종말을 모르는 체. 우리는 다시 어메이산의 기적을 바랄 수는 없다. 은행나무를 보호해야 한다. 또 벌레가 붙으면, 그놈들은 제 죽는 줄 모르고, 은행나무를 모조리 쓰러뜨리고 마는 독종이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상옹(桑雍) 얘기도 하여본다. 상옹은 뽕나무 속의 벌레로 뽕나무를 죽게 한다. 상옹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전략가들의 책략을 모은 전국책(戰國策)에 나온다.여기서 주변에 간신을 둔 왕과의 대화에서 한 책사는 “무릇 상옹이란 바로 왕의 측근인 신하와 부인, 나이 어린 미녀들입니다. 이들은 왕이 혼취(昏醉)해 있을 때 왕에게서 자기의 욕구를 다 채우고 있습니다. 이들이 궁중 안에서 이런 짓을 할 때 그 많은 대신들은 그들대로 밖에서 법을 속여 제 욕망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월도 다만 그들의 겉만 비치고 있을 뿐 숨어있는 화해(禍害)는 감춰져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난 증오를 방비하고 있을 때 화는 사랑하는 사람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은행나무 벌레와 상옹 얘기를 하였음은 눈 덮인 은행나무숲의 白月을 말하려 함이다. 온갖 부정과 불의로 혼탁한 세상을 깨끗이 정화시킨 곳이 그곳이 아닌가 싶어서다./ 이천 그루 은행나무 달 아래 보셨나요. /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그 청정무구함을. / 내 눈엔 안간힘 쓰며 산을 지고 있습디다. / 하고 첫 수를 마무리했다. 산을 지고 일어나려는 나목의 은행나무숲, 온갖 오탁이 정화된 그곳에도 생명이 약여함을 시인은 보고 있다.
/ 수려한 계곡이며 마알간 강물 하며 // 흠잡을 게 하나 없는 빛 부신 둥근 白月 /이다. 그 경이로움이라니, / 눈이 절로 / 감길 수밖에.코로나19로 세상이 멈추었긴 해도, 산을 지고 일어나려는 은행나무숲이 있는 이상 곧 일상을 회복하리라 믿는다.〈경이〉로움을 전해준 시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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