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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수필:서화 이양주] '관(觀) 치(治) 농(弄) '서화 이양주)2012년'수필과 비평'등단/‘2014젊은수필’선정/한국문협/계룡수필문학회/제8호인간문화재이수자/눌산문예창작교실수료

                         관(觀) 치(治) 농(弄) 

                                                         이양주

 마음을 소리의 선율 위에 놓는다. 맑고 고요한 물에 나를 비추는 느낌이다. 시를 느린 곡조에 붙여 긴 호흡으로 노래하는 정가(正歌)를 하고 있으면 소리 선(禪)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고요를 부르는 소리.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잠시 잔물결이 인 듯하나, 소리도 바람도 걸림 없는지라 마침내 고요해진다. 
  정가는 바르고 정직한 음악이다. 천천히 소리를 풀어내고 있으면 마음의 미세한 떨림이 거짓 없이 드러난다. 움직이는 나와 지켜보는 나. 마음이 왔다 갔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망상과 분별심에 사로잡히면, 곡조가 흔들리고 호흡이 짧아지며 탁한 소리가 난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들린다는 표현이 맞으나, 정가는 보이는 것에 더 가깝다. 나는 소리를 통해 나를 본다. 
  단선율의 수평적 음악인 정가의 기본은 평성(平聲)에 있다. 하나의 곧은 선율로 뽑아내는 평성을 제대로 하려면, 소리 주인이 평심(平心)으로 선율 위에 앉아 있어야 한다. 흔들고 굽이치고 치솟고 떨어지는 소리들은 기교를 부리거나 덧칠을 할 수 있으나, 평성은 가공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이 흔들림 없이 지속되는 상태, 흔들리지 않으려는 그 마음마저도 내려놓은 상태, 소리에도 무위(無爲)가 있다면 평성이 가장 가깝지 않을까. 
  숨의 노래. 목숨은 숨을 쉬는 것이다. 정가의 묘미는 끊어질 듯 말 듯 한 호흡에 있다. 숨을 잘 다스려야한다. 마음이 흔들리면 호흡 또한 안정적이지 않다. 들숨과 날숨의 분배, 마시는 숨과 내 쉬는 숨은 어느 것이 더 길고 편한가. 욕심내어 마신다고 숨이 길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시는 숨보다 내 쉬는 숨이 더 편하다. 채우기보다 비워야 더 편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몸이라는 악기. 소유와 무소유, 집착과 무집착도 또한 그러하리라. 나는 내 안의 중심에서 나오는 소리를 나의 호흡을 통해 나를 다스리는 시간을 가진다.
  네 살 적,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시조를 배웠다. 또랑또랑 시조를 외우는 어린 계집아이를 동네 사람들은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태산이 높다하되, 까마귀 싸우는 곳에, 어버이 살아신제.’ 아버지는 자식에게 하고픈 말을 시조를 통해 전하고자 헸을 것이다. 그때 외운 구절들은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았고, 삶의 굽이를 만날 때면 내게 말을 걸곤 했다. 
  사람들에게 한량이라 불리는 아버지는 물을 무척이나 좋아하셔서 여름이면 강물에 몸을 담그곤 하셨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강둑을 넘어 솔밭을 지나, 푸른 강물에 앉아 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 긴소리를 하시곤 했다. 아버지의 노래 속에서 청산이 흘러나와 강심에 앉았으며, 햇살에 잘게 부서지는 강물 위로 나비가 날아오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강물과 한 몸인 듯 했다. 먼 산을 바라보시는 듯했으나, 아무것에도 머무르지 않은 듯한 무심한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긴 노래도 강물도 천천히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살면서 푸른 달빛에 몸이 시려 뒤척인 적이 몇 번이던가. 어머니가 강물에 한 줌 재로 흘러 가버린 후, 아무리 돌아누워도 혼자라고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다. 생을 똑바로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곧 길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의지가 되어야 한다고,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나라며, 나와 독대하는 시간을 보냈다.   
  사람이 그리워서인지 나는 부쩍이나 귀가 밝았다. 어느 날 정가가 내 속으로 쑤욱 들어왔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노래였다. 외로움을 혼자 둘 수 없어 노래했다. 슬픔을 달래려 노래했다. 기쁨이 꽃 피도록 노래했다. 내게 노래는 위로였으며 가장 나다운 삶의 표현이었다. 
  세월은 무정(無情)한데 유정(有情)한 내가 산다. 내가 자란 고향의 강을 떠나 지금은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산다. 내 몸속에는 서툴지만 아주 오래된 나만의 노래가 있다. 세월과 함께 햇살과 달빛과 바람과 비에 젖은 노래들. 몸이 악기니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라도 노래는 가능하다. 소리에도 양지와 음지가 있어,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강함이 있으면 약함이 있고, 성한 것이 있으면 허한 것이 따라온다. 선율에 마음을 싣는다. 반주도 없는 외줄기 소리지만 소리의 여백이 그리 편할 수가 없다. 소리를 풀어놓으면 소리도 나도 주변에 녹아드는 느낌이다. 때론 우주가 나의 배경이라는 행복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밀고 당기고 죄었다 풀었다, 내면의 요구대로 내 식으로, 나는 내 신명대로 살고 싶다. 
  삶이 동시에 지닌 부질없음과 눈부심이여. 다음이라는 말은 이제 하지 않으련다. ‘더’라는 말도 하지 않으련다. 음악에서든 문학에서든 삶의 어떤 모습에서도 순간순간을 관(觀)하고 치(治)하고 농(弄)하기를. 살아 있어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아버지가 강물에 놓았던 소리를, 해 질 녘 바다에 내가 놓는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어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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