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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거제찬가]'없어 질번한 거제문화유적'④장목진객사(長木鎭 客舍)<1>이승철:거제향토사연구가/시인/수필가
『어려웠던 그 시절 경제 발전을 하면서 유구한 거제의 문화유적지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헌신을 다해 보존하게 되었다. 그 실상을 상세히 기록해 둔다.』<필자>
*이승철: 거제군 문화공보실 근무, 언론, 관광, 문화재, 종교 업무담당, 포로수용소 유적지 보존에 일생을 바쳤다. 98년 정년퇴임, 국사편찬사료조사위원, 국가기록원민간기록원, 거제박물관 명예관장, 거제문화원 이사, 집필 거제시지, 장목면지, 거제향교지, 거제수협105년사. 연초면지, 사등면지, 동부면지, 거제도민요집, 거제도 설화집, 한려수도 칠백리, 환상의 섬 거제도등 거제와 관련된 책을 집필했다.

4. 장목진객사(長木鎭 客舍)<1>
장목은 거제도의 북단에 위치한 해안 변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부산, 진해, 마산 항과 인접해 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내륙의 문화가 부산, 김해, 진해, 마산 창원으로부터 전해져 왔다. 기후가 온화하고 해안 변 산록의 토질이 대체로 비옥하여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살았다. 자연적인 어패류와 풍부한 고기, 그리고 산야초를 식량으로 하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수도 패총(貝塚)을 비롯하여 거가대교 진입도로 부지 내에서 발견된 지석묘와 주거지, 분묘 등에서 출토된 돌칼, 무문토기, 옥구슬 등 다양한 유물은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들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간곡 마을 분묘 17호분에서 출토된 청동합(靑銅盒)과 청동시저(靑銅匙箸), 간곡 2호분에서 출토된 옥구슬은 귀족사회의 유물로 군장(君長)이나 부족장의 묘로 인정된다. 이런 유물은 당시 막강한 권력층이 장목지역에 존재 하였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장목지역에 부족사회 형태의 집단적인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증된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은 지금까지 장목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좋은 증거자료가 된다.

  조선시대 축성한 영등성을 비롯하여, 임진란 때 일본 군대가 축성한 왜성(倭城)과 장목진 객사 등은 많은 왜침을 당했던 고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특히 장목지역은 임진란 당시 서해의 관문으로 교두 부 역할을 하였고, 러일전쟁 당시는 일본 해군의 가근거지(假根據地)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장목지역의 문화유산은 거제를 대표 하는 유적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가, 임진왜란과 장목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군들은 그날로 동래성을 함락하고 천성가덕과 거제도를 침범 하게 된다. 장목은 부산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칩임을 당했다. 장목 구영에 영등성(永登城)의 진이 있었고, 장목 동쪽에 율천성(栗川城)의 진이 있었다. 그 두 진도 4월 중순경에 왜적에게 빼앗겼다. 
 
 전초기지였던 영등성과 율포성이 왜적에게 함락 당하자 거제도에 상육 한 왜군들은 창목 하청을 경유 고현 성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그런 위험한 사항에서,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진주진관(晋州鎭管)의 연락을 받고 고현성주 김준민 현령은 부하들을 데리고 진주성 방어에 나가고, 고현성은 의병장들이 모여서 방어를 하다가 왜적들의 손에 들어갔다. 5월 14일 경상우수영 이영남(李英男)장군으로부터 구원병을 요청받고 5월7일 옥포대첩을 처음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에 머물면서 작전지휘를 하게 된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장문포에서 지휘를 하게 된다. 아래 선조실록이 그 자료다.

 

1)선조 82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1월 5일(정유) 4번 째 기사 
  비변사가 장문포와 한산도를 지키는 일에 대해 아뢰다  
2) 선조실록 > 선조 29년(1596년) > 선조 29년 11월 > 선조 29년 11월 7일 
 “이원익(李元翼)이 이제 남방으로 내려가려 하니, 아무쪼록 백성들을 불러 모아 한산도(閑山島)·장문포(長門浦)를 충실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거제(巨濟)를 지키지 못하면, 다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선조 82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1월 9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이므로 원균을 절제(節制)할 것인데, 원균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감수하지 못하여 두 장수가 화합되지 않을 것이니, 일이 성공될 리가 없을 듯하다.’ 하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통제사란 직임은 한때의 필요에서 생긴 것이어서 그대로 둘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으므로, 이순신의 통제사라는 직명도 오히려 낮출 수 있고 혹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라 칭하여 이순신과 명위(名位)가 대등하게 할 수도 있으니, 신축자재하게 임의로 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는 대개 원균의 자급(資級)이 본디 이순신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감히 다시 아뢰어 번거롭게 하는 혐의를 피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신은 지난번 또 한산(閑山)의 주사(舟師)를 빨리 거제(巨濟)의 장문포(場門浦)3591) 에 진주하게 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제는 적이 와서 침범할 형상이 이미 드러나 눈앞에 닥친 일이라 매우 급박하므로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죄다 거제에 진주하여 수로(水路)를 제압하고 있다가 책사(冊使)가 나온 뒤에는 모든 오가는 적의 배를 곧 주사로 막아서 잡아 죽임으로써 적이 오는 길을 끊어야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속히 하서(下書)하여 이순신 등이 급히 진주하도록 엄히 신칙(申勑)하여 다른 말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소서. 
[註 3591]장문포(場門浦) : 장문포(長門浦) 
[註 3592]선봉(選鋒) : 정예한 군사 /이용현 문화재 전문위원과 필자가 자료 조사를 할 때 객사 기와장에서 康熙 五年년이란 글자가 발견되었다. 이 글자로 미루어 볼 때 이 건물은 임진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나, 장목진객사(長木鎭客舍)현황
○ 소  재  지 : 장목면 장목리 219-18번지
○ 규      격 : 건평 18.7평(61.85㎡), 대지 820㎡
○ 수      량 : 1동
○ 구조 또는 형태 : 목조와가
○ 소  유  자 : 거제시장
○ 관리단체 : 거제시장
○ 지정 연월일 : 1979. 12. 29
○ 연혁(유래)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9호

  장목진 객사는 조선시대(朝鮮時代) 거제부(巨濟府) 소속의 7진보(鎭堡) 중의 하나였던 장목포진(長木浦鎭)의 관아(官衙) 건물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임진년에 동구에 건립하였던 것을 서구로 옮겼다고 하며, 선조25년(1592) 정월 장목 별진장이 진영의 객사로 건립하여 평화축원의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재의 객사는 정조9년(1785) 당시 별장(別將)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있던 이진국(李瑨國)이 중건 한 것을 순조 2년(1802)에 다시 중수하였다. 1914년 3월부터 장목면사무소로 활용하다가 1953년 장목면 사무소가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서구마을노인정으로 활용해 왔다.

  1978년 폭풍우에 지붕 일부가 붕괴되어 퇴락직전에 있던 것을 서구 마을에서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을, 장목 해동병원 김종석 원장을 만나 복원대책을 논의 하여, 김종석 원장이 지역 주민들을 모와 놓고, 장목진 객사 복원대책위원회(위원장 김종석 : 해동병원장)를 조직하여 동아대학교 박물관 이용현(李容玹)과장과 함께 내가 자료조사를 하여 지방문화재로 긴급 지정을 하게되었다. 이 때, 추진위원장 김종석은 자료조사 및 경비 등을 자비(自費)로 부담하였다. 
  
이 건물은 양측에 툇마루를 갖춘 방을 1칸씩 두고, 중앙에 2칸의 마루를 둔 객사의 일반적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다. 높이가 1m가 넘는 막돌 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세워져 권위적인 입면을 보여 주며 외각의 기둥은 배흘림 두리기둥을 하고, 내부는 각주를 세워 입면의 위엄과 내부공간의 실용성을 동시에 취하고 있다. 
  또한 주두(株頭)아래 초익공(初翼工)을 두었다는 점도 공공건물로서의 정직성을 보여 준다. 구조는 내부에 높은 기둥을 세우지 않고, 도리 다섯 개로 지붕을 받치는 무고주(無高株) 오량(五梁)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 기와지붕으로서 전면에만 부연(附椽)을 두어 겹처마를 구성한 것이 특이하다.
 1) 거제시지에 조선 초기의 국방체재를 보면, 고구려시대의 중익(中翼), 좌익(左翼), 우익(右翼)으로 북방지역의 군익도(軍翼道)체제와 연해안의 영(營)과 진(鎭)이라는 남방지역의 진관체제(鎭管體制)란 것이 있었다.
2) 거제시지 진관체제의 특성은 중요한 군사기지를 거진(巨鎭)이라 하여 군사에 쓰일 거점(據點)으로 삼아 그 주위의 마을을 소속시켜 지휘한다는 것이다.
3) 거제시지 수군(水軍)도 진관체제에 따라서 국방임무를 수행 하였지만 내륙의 육군과는 달랐다. 그것은 행정 단위인 도(道)를 기준으로 수영(水營)을 설치하고 수사(水使)가 최고 책임자다. 그 관할 해안 포구에 포진(鋪鎭)또는 첨절제사(僉節制使=僉使)와 만호(萬戶)가 있었다.<계속>









 

박춘광 기자  gjtlin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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