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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거제찬가]'없어 질 번 한 거제문화유적 '기성현지(岐城縣址) 긴급 발굴'이승철:거제향토사연구가/시인/수필가/소설가/사진작가/ 전 거제시 문화재담당공무원

 제2의 고려국

의종 왕이 3년 동안 살다간 둔덕에는 그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다. 농막의 남쪽에는 대비장(大妃庄)을 설치하여 안주시킨 안치봉(安胎峰)이 있으며 하둔리 접경에는 자주방(自主防)과 여관(麗關)을 두었다. 여관은 고려 사람이 와서 살았던 관문이란 뜻이다. 그곳 산록에는 방어성지가 있다. 또 산록에는 망루를 두어 감시케 하였다. 둔덕천 건너 방하리 남쪽에는 고려 시종무관 및 귀족계급의 사해(死骸)를 매장한 고려 무덤이 있어 유품의 출토가 종종 있었고, 지금도 그 자리에는 많은 고분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당시 나루터가 있던 곳은 술역(水驛)이라 하고, 군마를 키우던 곳은 마장(馬場), 농사를 짓던 곳은 농막(農幕), 과수원을 하던 곳은 시목(枾木), 기성관 앞에는 옥터가 있었다하고, 옥동(玉洞)이라 한다. 옥터는 죄를 지은 사람을 가두던 곳이다. 상둔은 나라에서 권농관을 두어 농사를 짓던 농토가 있던 곳인, 둔전(屯田)이라 하여 윗 둔전, 아래 둔전이라 한다. 견내량은 의종왕이 건넜다고 전하도(殿下渡)라 부르던 것이 어원이 바뀌어 견하도가 되었다가 견내량이라 한다. 신라 때 축성된 기성(岐城)을 의종왕이 이 성 아래 피신 와서 살았다고 피왕성(避王城) 또 왕에서 폐위(廢位) 되었다고 폐왕성이라 부르기도 했다. 공주가 우물을 길렀던 공주샘, 신선 마고할매가 의종왕의 복위를 빌었던 마고덩걸과 제신암, 의종을 보필했던 빈 정승의 무덤이 있는 빈 정승 묘 등 곳곳에 의종 왕과 관련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의종 왕이 피신 와서 3년 동안 살면서 작은 고려국을 연상케 하였던 둔덕의 유적지가 정밀하게 발굴 조사되어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그 시대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국제적인 관광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지역의 문화유적지를 조사하였다. 기성현지 발굴 후에 정년퇴임 하여 그 일을 마무리 짖지 못했다. 지금도 이곳을 지날 때 마다 그때 그 순간 없어지던 유적을 발굴한 것이 가장 큰 보람으로 느낀다.   

둔덕기성(岐城=廢王城) 과의 인연
 둔덕기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9년 가을, 심봉근씨가 대학원 논문자료 조사를 하러오면서 성지 답사를 같이 했다. 심봉근씨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좋은 인연을 갖고 있다. 그런 인연으로 심봉근 씨가 동아대학 박물관장, 문화재 위원 동아대학 총장을 지낼 때 까지 거제의 문화재 지정과 발굴에 많은 관심을 갖고 나와 같이 많은 일을 했다.
  그 당시 둔덕에 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심봉근씨가 부산서 배를 다고 오고 나는 성포에서 그 배를 타고, 통영에서 둔덕 하둔으로 가는 배를 탔다. 하둔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점심을 때우고 걸어서 기성(폐왕성)까지 갔다. 거림 마을 뒤 산골짜기를 따라 오르는 길가에는 돌 너더렁이 있었다. 그 돌밭을 기어오르면서 이 돌이 기성(폐왕성)을 축성 할 때 사용 했던 돌이라 생각하면서 성위로 올라갔다. 

남쪽 성벽 일부가 무너져 있고, 대체로 잘 남아 있었다. 성안에는 작은 우물이 있고, 그 옆으로 집터가 있었다. 조선시대 기와조각이 나 딩굴고 폐허의 돌담장이 있었다. 이곳이 현재의 우물지 였고, 집터로 추측 되는 곳에는 조선시대부터 가축을 기르던 곳으로 전해져 왔다. 서쪽으로 통영항과 견내량이 내려다보이고, 북쪽으로 진해만과 연결 되어 있다. 동쪽 산방산 아래서부터 비옥한 전답에서 읶어 가는 벼가 황금 들판을 이루고 있었다. 성위로 한 바퀴 돌면서 축성의 역사를 반추해 본다. 산 정상에 이렇게 거대한 성을 축성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 되었으며, 이 돌은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을까? 성벽의 돌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같이 좋은 장비로도 축성하기 어려운 성을 인력으로 짧은 기간에 축성하였다는 것은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엄청난 큰일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성을 싸면서 희생 된 사람은 얼마나 많았을까? 신라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 까지 이 성벽이 거제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방어성지로 돌담 벽 이끼에서 옛날의 역사가 흐른다.  그때 처음 본 성은 산 정상에 돌로 성벽이 산 정상에 퇴를 두른 모양으로 싸여 있어서 신기해 보였다.  성곽의 돌은 어디서 가져 왔으며, 어떻게 운반 하여 돌을 사각으로 다듬어 이가 딱 맞게 축성 하였을까? 성벽을 보면서 감탄을 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울 때 이 성을 축성 하면서 어디서 잠을 자고 그 많은 사람이 무엇으로 어떻게 먹고 일을 했을까? 그 당시 축성과정을 상상해 본다. 

전해져 오는 말에 의하면 이 성을 축성 하고 남은 돌이 성 아래 골짜기에 쌓여 있는 돌이라 한다.  지금 같이 장비가 좋을 때도 이런 성을 축성 할여면, 여러 해 걸릴 것인데 농방기를 피해서 짧은 기간에 축성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 되었을까? 그때를 연상해 보면서 이성의 중요함과 가치성을 느꼈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1호로 지정을 했다. 그후 심봉근 박사가 수차래 다녀가면서 국가문화재로 지정해야겠다고 하여, 2010년 봄에 둔덕면 사무소에서 문화재 관계자와 전문 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심봉근 동아대 전 박물관장과 필자가 참석 하여 국가 문화재의 필요성을 강론 하여 그해 8월 22일 사적 제509호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성을 축성 할 때 나라에서 여러 날 공을 드렸는데, 그날 밤에 하늘에서 마고(麻姑) 할머니가 내려와서 가조도 북쪽 앞 바다에 있는 섬을 부수어 그 돌을 치마폭에 담아 와서 하룻밤에 이 성을 축성하고 버린 돌이 성벽 남쪽 계곡에 쌓여 있는 돌 너더렁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불가사의한 일에는 언제나 전설이 있다. 이끼긴 돌담 성벽은 지난날의 숫한 역사를 증언한다. 이 성에 오를 때 마다 정중부의 발란에 쫓기어나 3년 동안 살다간 의종 왕의 한스런 흔적들이 석양의 구름처럼 떠오른다.
 

 

박춘광 기자  gjtlin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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