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84」

         가을볕                  

        이 덕 재

묵은 논둑 나무 그늘 돌담에 기대앉아
억새에 취했다가 물소리에 빠졌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곤 도로 주저 앉았다.

어제보다 곱은 는 빠알간 잠자리들 
풀밭위 낮게 날다 가지 끝에 쉬었다가
애잔한 꼬리 흔들며 내게 성큼 다가온다.

소슬바람 닿기 전에 할 일은 줄섰는데
가볍던 엉덩이도 이제 꽤 무거워져
추성(秋聲)에 취한 농사꾼 일어설 줄 모른다.

◎ 牝鷄無晨(빈계무신)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이 있는데 마치 요즈음 날씨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갑작스런 한파에 메스컴에선 “가을을 잃었다”고 호들갑이다.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이고 보니 계절도 정신 줄을 놓았나 보다. 불경기에다 설상가상의 코로나19로 해서 죽을 맛으로 사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거기다 날씨마저 이 지경이니 사는게 말이 아니다. 기가 빠진 이 땅의 아버지,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기(氣)라는 글자는 ‘쌀을 솥에 넣어서 밥을 짓는 과정에 솥뚜껑이 들썩거리는 것을 보고 만든 글자’라고 한자사전에 소개하고 있다. 그래선지 기(氣)란 존재를 ‘힘’이라는 것에 귀착시키고 힘이라는 뜻이 들어있는 단어 속에는 반드시 기(氣)란 문자를 쓰고 있다.
여성분들이 싫어하는 말로 빈계무신(牝鷄無晨)이 있다. 서경(書經) 목서(牧誓),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암탉은 새벽에는 울지 않는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 망한다고 했다. 암탉은 낮에 알을 낳고 그 때에 울어야 하는 것이지, 때도 아닌 새벽을 알리는 시간에 울어 가지고 될 일이 아니란다. 장닭은 새벽에 울고, 암탉은 낮에 알을 낳고 울어야 집안이 제대로 된다고 말하여 왔다.

이 말은 여자가 남편을 업신여겨 집안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는 말로 쓰여 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변해도 많이 변했다.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여 여성들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고 인권도 신장되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속될 진데, ‘빈계무신’이 무는 낮도깨비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욕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가 빠진 아버지는 가정경제권을 아내에게 바쳤다. 그리고는 스스로 아버지의 권위도 포기했다.

맹모삼천을 뺨치는 엄마의 극성에 아이들은 황금만능을 뼛속깊이 깨달았고, 돈에 대한 창구가 일원화된 엄마의 위대함속에서 ‘마마보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이런 판국에 아버지의 훈육이 먹혀들 리가 없다. 우리의 주위엔 당당한 허우대에 번듯한 직장과 적잖은 경륜(經綸)을 갖추고도 어쩌다 같이 소주라도 한 잔 나눠보면 아내가 기다릴까봐 안절부절 하거나, 지금 누구랑 같이 있는데 어쩌구 하면서 꼬박꼬박 보고 하는 사내가 의외로 많다.

 아내의 눈길이 무서워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지 못하고, 아내의 거침없는 핀잔에 주눅 들어 하는 남자, 이럴 때 자식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체모가 어떠한지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선생’이라 칭한 도연명(陶淵明)은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해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평택현(彭澤縣)의 현령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에 퇴관성명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사전(史傳)에는 상관인 독우(督郵)의 순시 때에 출영(出迎)을 거절하고, “나는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했다고 적혀 있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질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 : 동쪽 울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 3.4행이다. 그의 시는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글을 아는 중국사람 중 위의 싯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이 천하의 도연명도 자식만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는지 “책자(責子)라는 시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열여섯에서 아홉 살까지 공부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그저 배와 밤 같은 군것질 감이나 찾는 서, 선, 옹, 단, 통이란 이름의 5형제를 꾸짖다 지쳐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며 탄식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대시인이 이러 할진데 평범한 이 땅의 아버지들이야 일러 무삼 하리오.  지난날 아버지는 지금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오로지 처자식을 위하여 땀 흘려 봉사하고 특히 자식이 원하는 것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물론 체면과 위신을 중히 여겼다.

   기침소리 멎으면 외려 덜컥 내려앉던 가슴
    가만히 귀 기울이면 잿불보다 가는 숨결
    달빛도 뒤꿈치 들고 약탕기에 댑니다.

    춘삼월 해는 길어 보릿고개 근근이 넘고
    투정의 끼니마다 애간장 태운 父情
    등 없는 의자에 앉아 회심곡을 부릅니다.

    비탈밭 일구시던 괭이는 천 근이셨고
    저승까지 가지고 가신 손발에 박힌 굳은살
    문설주 기댄 가슴에 옹이 되어 아픕니다.
              -拙詩, ‘아버지’ 전문

 아버지가 가정 책임자로서의 권위를 아이들 엄마 앞으로 고스란히 헌납 한 것은 되는 대로 편히 살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되는 대로 살기 위해서는 소신과는 담을 쌓고 비굴과 타협을 능사로 해야 한다. 또 편한 대로 살기 위해서는 원칙과 질서를 무시하고 반칙을 최상의 수단과 요령으로 신봉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원칙과 질서를 존중하고 지키는 사람은 융통성이 없고, 꽉 막힌 무능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 현실을 강하게 부정 할 수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세상물정이 이렇고 보니, 반칙과 줄서기에 익숙하지 못하면 출세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여 한 층 지능화된 비리나 고도의 부정행위가 돌발 아닌 항시 예비된 형태로 나타날 것이 뻔하다. 이래서는 될 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기가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살고 사회가 살고 나라가 산다.(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시조 작품 〈가을볕〉은 농사꾼 이덕재 시인이 묵정논의 풀을 베다 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추성에 취해 읊은 3수 연작의 서정시조다.감상에 앞서 시인의 ‘시작노트’를 옮겨 본다.

 “묵정논의 풀을 베다 그늘에 않아 땀을 식혔다. 예초기 소음을 벗어나니 온갖 자연의 소리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억새꽃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일어서려다 올려다 본 하늘의 푸름에 도로 주저 앉았다. 고추잠자리 군무가 보였다. 코앞까지 성큼 다가오는 발간 꼬리가 이채롭고 애잔했다. 할 일은 줄을 섰는데 가볍던 엉덩이는 무거워져 간다.”

추성(秋聲)은 가을철 바람소리다. 북송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가 가을의 소리를 묘사한 ‘추성부(秋聲賦)’를 내면서 가을밤, 책을 읽다가 문득 들은 소리를 묘사해 그의 문필이 날카로움을 세상에 알렸다.
조선시대, 가을 어느날 어느 벼슬아치의 환송식에 당대에 내로라하는 대학자요, 문장가요, 정사(나라를 다스리는 일)를 좌지우지하는 정치가들이 모였다. 이들은 학문과 지위가 쟁쟁한 정철과 유성룡, 이항복, 심희수, 그리고 이정구 등 다섯 대신이었다. 한창 잔을 돌리면서 흥을 돋우다가 ‘들려오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시제를 가지고, 시 한 구절을 읊어 흥을 돋우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정철이 먼저 운을 뗐다.

松江 鄭澈(송강 정철)

淸宵朗月 樓頭閼雲聲(청소낭월 누두알운성)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 소리”

 一松 沈喜壽 (일송 심희수)

 滿山紅樹 風前遠岫聲  (만산홍수 풍전원수성)
 “온산 가득찬 붉은 단풍에 먼 산 동굴 앞을 스쳐가는 바람소리”
 
 西崖 柳成龍   (서애 유성룡)

 曉窓睡餘 小槽酒滴聲 (효창수여 소조주적성)
 “새벽 창 잠결에 들리는, 작은 통에 아내가 술 거르는 소리”

 月沙 李廷龜 (월사 이정구)

 山間草堂 才子詠詩聲 (산간초당 재자영시성) 
“산골 마을 초당에서 도련님의 시 읊는 소리”

 白沙 李恒福  (백사 이항복)

 洞房良宵 佳人解裙聲 (동방양소 가인해군성)  
 “깊숙한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이날 저녁 그 자리에 모인 모두는 오성대감 이항복의 ‘여인이 치마 벗은 소리가 압권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이 아무리 유학의 궤범에 얽매어 살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 앞에서는 너나없이 한가지다. 그렇고 말고다.

예초기로 묵정논을 온통 점령한 풀을 베다 / 묵은 논둑 나무 그늘 돌담에 기대앉아 / 억새에 취했다가 물소리에 빠졌다가 / 구름 한 점 없는 마알간 / 하늘을 올려다 보곤 도로 주저 앉았다. / 억새꽃이며 물소리, 마알간 가을 하늘, 주저 앉지 않고 어찌 일어서랴.

고추잠자리의 군무는 가을 벌레소리와 함께 가슴을 저민다. / 어제보다 곱은 는 빠알간 잠자리들 /이다. 어디에 있다가 제철을 알고 왔는지 그야말로 신통 방통이다. 이 친구들이 / 풀밭 위 낮게 날다 가지 끝에 쉬었다가 / 제 이뻐 하는지 어찌 알고 / 애잔한 꼬리 흔들며 내게 성큼 다가온다. / 그 사랑스러움이라니.

수확의 계절, 부족한 일손에 마음만 바쁘다. / 소슬바람 닿기 전에 할 일은 줄섰는데 / 한 시도 가만 못 있고 설쳐대던 / 가볍던 엉덩이도 이제 꽤 무거워졌다 / 어디선가 수런수런 가을 소리가 들린다. / 추성(秋聲)에 취한 농사꾼 일어설 줄 모른다./ 한 폭의 가을 풍경화를 시인은 붓 끝에서 정갈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시인은 청복을 만끽하지 싶다.농사꾼 이덕재 시인이 있기에 구천골 가을이 그 의미를 더한다.<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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