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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말수단편소설④] '영목항'<4>신말수:김만중문학상,부천민족상,복사골문학상 등을 수상한 지세포출신 여류소설가/해성고졸업

가겟집 그 여자를 기억해낸 건 두 사람이 휘저어 놓은 기억의 장애 때문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남루해진 기억이었다. 그 허름한 기억 속에 발톱을 깎지 못하는 여자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인유 때문이었을까. 순지였다. 30여 년 전 순지의 얼굴을 더듬어 만든 기억 속에 가겟집 여자를 세워보았다. 마치 셀로판지 위에 도장을 겹쳐보던 은행원처럼 조심스럽게 맞추어내면서. 가로로 그어진 잠자는 듯한 눈과, 얼굴을 분명하게 반으로 잘라 세운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발톱을 자르지 못하던 여자, 틀림없는 순지였다.

너 순지와 그렇게 친했으면서 몰랐었느냐고 보험가방을 풀어내던 명자가 말했다. 새로 나온 노후 상품이 있는데 너한테 딱 맞는 것이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명자는 새로운 보험 상품이 나올 때마다 ‘혼자 사는 너에게 딱 안성맞춤이다’라는 말로 찾아오곤 했다. 순지 소식은 듣니, 하고 묻는 내 말에 이때다 싶은 듯, 저녁을 먹고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순지 얘기를 끝맺지 못했다. 넌 그렇게 친했으면서 몰랐었니, 정말 등잔 밑이 어둡기는 하구나. 명자는 건성으로 혀를 차는 시늉까지 해댔다. 그 키 큰 할머니 있잖아, 그 할 머니는 첩며느리를 데리고 산 거야. 순지 엄마가 첩이었던 셈이지. 그에 기가 막힌 것은 그 할머니도 첩이었다는 거야. 그에 더 기가 막힌 것은 순지가 나이가 스무 살이나 더 많은 영감의 첩으로 앉았다는 거야. 뭐, 내림바탕인 게지. 물론 돈은 많았겠지. 걔가 어떤 애니? 물론 첨부터 첩으로 앉은 셈은 아니었지. 걔가 얼토당토않게 아주 괜찮은 집 남자를 물었단다. 그런데 괜찮은 남자 집에서 순지를 들이겠니? 천만의 말씀이었다 이거지. 그 후 몇 번인가 남자 실패를 본 모양이야. 지금 어디 대천인가 산다고 하더라. 물론 그 영감과 함께겠지. 그 많은 돈 아들들이 다 말아 먹었다는 말은 사실인지 모르겄다만 가스나 얼매나 성질이 더럽었노. 명자는 그날 노후 대책으로 내게 딱 맞는 보험 계약을 받아갔다. 명자에게 받은 증권만도 벌써 네다섯 개가 되는 셈이었다. 명자의 말을 기억해내지 않아도 순지는 틀림없었다. 순지는 제 발톱을 깎지 못했다. 나이든 할머니가 잘라주는 발톱이 맘에 안 든다며 발톱깎이를 돼지 여물통에 던져버리곤 했다. 그 순지가 여름방학 때 섬을 찾아오던 인유와 부딪쳤다. 순지는 그 인유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게 인유와 순지를 한꺼번에 잃을 뻔한 사건이었다. 내 유년에 처음으로 인유가 준 상처였고 주저앉은 상흔은 꽤 오랫동안 가슴 밑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내 깊은 상처를 그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은 모른 채 흘려보냈을지 몰랐다.

영조는 자꾸 보스댔다.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이 편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영조가 차낸 이불을 덮어 주었다. 기척이 없었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가만히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네시였다. 꿈속이었던가, 포효하는 왜목 마을의 파도와 꽃지의 노을, 잠시 서울을 버리고 감행한 이 떠남, 그리고 황급히 등을 돌리던 가겟 집 여자. 모든 게 꿈처럼 오버랩 되었다. 정말 꿈인가, 창가로 걸어갔다. 부유스름한 여명 속에 포구는 몇 척의 배를 안고 있었다. 아련한 슬픔이 내 감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밤안개가 자욱한 어느 달밤, 그 밤에도 이런 기분으로 울었던 적이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에 걸린 달, 개울 건너 둑에 흰머리를 풀어헤친 듯 바람에 날리던 억새풀, 전생의 편린인 양 나는 그것들에 습관적인 슬픔을 앓곤 했다.

태안반도 꼬리에 달린 영목항, 그 이름이 안고 있는 느낌은 결국 편안함이었다. 길들여지지 않음에, 익숙하지 않음에 나는 늘 민감하게 대처하려 했다. 새롭고 낯선 것은 두렵고 힘이 들었다. 아주 어렸을 적, 새 운동화를 샀을 때처럼……. 그런 날이면 밤새 신발에 흙을 묻혀 털어내고, 또 묻혔다간 털어내었다. 그런 후면 맘 편히 그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영목항은 어렸을 적 흙을 묻혀 털어낸 그 운동화 같았다. 그냥, 배 몇 척이 묶여있고 그 위를 그림처럼 표표히 갈매기가 날아가고 구름 물고 있는 하늘이 가끔 바람을 불러들이는 그런 포구, 내 기억의 틀에 끼어 맞추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꽉 들어맞을 것 같은 낯익은 마을이었다. 이곳을 다녀갔거나, 어쩌면 이미 이 포구를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밖엔 바람도 없이 조용했다. 해안을 끼고 앉은 길을 걸었다. 썰물 진 바다였다. 갯벌을 부끄럼도 없이 드러낸 바닷물은 너무 멀리 밀려나 있었다. 낚시라고 씌어진 가게 앞에 섰다. 마치 여기까지 걸어온 내 모든 이유를 그 속에서 찾아내려는 듯이. 불도 없는 유리 안, 자잘한 꽃무늬 커튼이 바깥세상을 차단하려는 듯이 길게 내려져 있었다. 나는 하염없이 서서 그 창을 바라보았다. 순지는 지금 자고 있을까. 어쩜 순지는 나 자신을 알아보았던 건 아니었을까.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얼마를 지났을까, 커튼 자락에 불빛이 매달렸다. 환해진 가게 안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나는 내내 그래왔던 것처럼 바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남자였다. 밖을 나온 남자는 어느새 내 걸음을 앞질러 저벅저벅 걸어갔다. 허벅지까지 오른 장화 차림의 남자는 바다가 시작되는 갯벌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바닷살이가 몸에 밴 듯한 그는 할아버지처럼 등이 굽어 있었다. 흰 머리카락으로 나이 들어 뵈는 남자, 명자가 말했던 돈 많은 영감쟁이일까. 그 남자의 등은 할아버지의 환영까지 싣고 길게 열린 갯벌 길을 걸어들어 갔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그 며칠을 섬에서 보내기 위한 속셈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등은 한없이 굽어 있었고, 눈꺼풀에 밀린 눈동자는 힘을 놓친 후였다. ‘그래 니 애비는 그렇게 죽었다. 불쌍한 내 새끼. 나는 니 아부지에게 흙이불도 덮어주지 못했다. 그 시퍼런 물속에 굴비처럼 꽁꽁 묶여 빨갱이라는 죄목을 달고 그렇게 투신 당했다. 절대 너그 아부지는 빨갱이가 아니었다. 모함이었제. 정서방이 자꾸 그걸 물고 늘어진다카몬 큰 오해다. 니 아부지 그렇게 묻고 이때꺼정 그 바다랑 한 번도 고운 맘 주고받지 못했다. 행여 니 아부지 신발 없어 저승길이 힘들까봐 실한 가죽구두 사서 던져 주었다. 신발 없어 저승 못 가지는 안 했을 끼다. 바다는 너그 아부지 무덤이다.’ 아버지의 무덤인 할아버지의 그 바다와 화해를 하기 위한 시간은 많이 필요했다. 그 먼 길 힘들 것 같아 신발을 던져 준, 누가 손 짓해 올 것 같아 두리번거린다는 할아버지의 바다.
‘나는 지금이사 인유랑 혼인 반대한 거 후회한다. 한동네서 훤히 알고 있는 니 아부지일 때문에 니가 맘 고생할 거 견딜 수가 없었다카이. 정서방 저렇게 나올 줄 알았으몬 차라리 아는데로 보내 속아 볼 걸……. 그게 평생 한으로 남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그 바다를 향해 남자는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내 시선에 등이 가려웠던 것일까, 

갯벌의 남자가 힐끗 뒤를 돌아 보았다. 나는 멀리에 서서 그 남자의 시선을 맞받아 내었다. 
아무런 불안도, 두려움도 일지 않았다.하늘은 푸름푸름해졌다. 그 하늘로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띄엄띄엄 떠 있는 갯벌의 바위서리도 점점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자는 어느새 바위너설 사이로 숨고 말았다. 천천히 가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가게는 아직 잠을 자는 중이 었다. 침묵으로 행하는 시위처럼 잔무늬 커튼만 창 전부를 가리고 있었다. 잠깐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예쁘게 가꾸기 위해 순지는 지금도 제 손을 아껴 쓸까. 그녀가 애착하는 손을 나이든 그 남자도 이해해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순지의 소유 중, 손은 어느것보다 소중할 터이니까. 가게를 두고 바다가 아침을 여는 해안 길을 되돌아 나왔다. 방 문을 열어도 잠에 빠진 영조는 기척이 없었다. 천수만의 철새도 봐야하고, 천여 명의 가톨릭 신자를 생매장했다는 해미성지도 가야하는데 영조가 푹 잠을 잘 수 있도록 나는 이불 속으로 가만히 발을 밀어 넣었다. <끝> 다음편은 '⑤황해여인숙'이 이어집니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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