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96」
     '사진첩'

   윤 미 정 

누렇게 변해버린 앨범을 들춰보니
그때의 시간들은 사진 속 일시정지
꽃처럼 활짝 핀 채로 깊은 잠을 잤나 보다.

함께한 일상들을 저장한 디카 사진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을 찍어본들
한 장도 인화 못한 채 용량 초과 삭제되네.

내 나이 어렸을 적 상큼한 사과처럼
아이를 기를 적엔 달달한 딸기향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날로그 그 시절.

  ◎ 겸손과 겸양
 《소학(小學)》은 중국 송나라의 유자징이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1187년에 편찬한 수양서이다. 내용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은 책이다. 이 소학에 ‘종신양로 불왕백보 종신양반 부실일단(終身讓路 不枉百步 終身讓畔 不失一段)’ 이란 글귀가 있다. ‘평생 남에게 길을 양보하면서 살아도 그 손해가 백보밖에 안되고, 평생 동안 밭두둑을 양보 한다 할지라도 한 단보를 잃지 않을 것이다’는 뜻으로, 겸손과 겸양의 미덕을 권하는 말이다.
 선종 후에도 추앙을 받는 김수환 추기경은 ‘겸손은 결코 외적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 앞에 공손한 자세를 취하거나 자기를 무조건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며, 겸손은 참으로 사랑 때문에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로 남을 배려한다 해도 평생 동안 이를 합쳐 보아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당시 이조 참의였던 이정암(李廷菴·1541-1600)이 황해도 초토사로 임명받아 서해안의 연안에서 왜적을 만나 싸우게 되었다. 그 일대의 의병 5백여 명이 2천여 명의 백성과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고, 성주인 연안부사는 도망가고 없었다. 해주를 함락하고 승승장구 쳐들어 온 왜병은 5천여 명이 넘었다. 왜군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자 이정암은 성안에 땔나무로 담을 쌓고 그 위에 앉아서 그의 아들에게 명을 내렸다. “성이 함락되면 불을 질러라. 내 몸이 적의 칼 받기를 원치 않으며, 또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어 모욕을 받는 것도 원치 않는다.” 합심하여 나흘간을 죽기 살기로 싸웠다. 죽고 부상한 왜병이 반이 넘었다. 왜적은 마침내 연안성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 연안성 전투는 당시 조선이 거둔 몇 안 되는 승리 가운데 하나다.
 조정에서는 이정암 공이 왜적에게 포위당했다는 말을 듣고 상하가 모두 위태로움을 근심하였다. 마침내 그의 승전보가 조정에 도착했다. ‘적이 8월 28일 성을 포위했다가 9월 2일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戝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

 단 두 줄뿐이었다.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서 벌어진 전투였는지, 세운 전과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적에게 입힌 타격이 어떠하였는지 입도 떼지 않았다. 승전보 치고는 융통성 없고 우직하기 짝이 없었다. 이 보고서를 본 조정의 뜻있는 사람들은 그의 겸손함에 감탄했다. ‘적을 물리치기는 오히려 쉬운 일인지 모르나 적을 물리친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김육(金堉·1580­1658) 선생의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나오는 얘기다.

     功名도 잊었노라 富貴도 잊었노라
     세상 번우한 일 다 주어 잊었노라
     내 몸을 내 마저 잊으니 남이 아니 잊으리.

  『甁歌』에 있는 김광욱(金光煜)의 작품이다.
 김광욱의 호는 竹所다. 광해군 때 판서까지 지낸 안동 사람이다. / 공명도 잊었노라 부귀도 잊었노라 / 광해군 때이니 현직(顯職)에 있던 김광욱의 심정이 읽힌다. 세상에 번거롭고 근심되는 일 다 될 돌려주고 나는 잊어버리겠다. / 내 몸을 내 마저 잊으니 남이 아니 잊으리. / 내 몸을 내 자신마저 잊어버리겠거니, 남이 어찌 나를 기억하겠는가. 세상도 잊고 근심도 돌려주고 산수간에 묻혀 살겠다는 얘기다. 그 시대상을 나타낸 노래라 하겠다.

 때론 연어와 장어의 지혜도 새겨볼 필요가 있지 싶다. 바다에서 알을 낳으려고 강으로 돌아오는 소하성 어류인 연어나, 그 반대인 강해성 어류인 장어들은 강어귀 완충 지역에서 체내의 염도와 수중 체온의 염도가 같아질 때까지 며칠이고 기다리며 배회한다고 한다. 기다리지 않으면 삼투압 작용으로 체내의 수분이 급격히 증감되어 죽게 된다고 한다. 당장 손해를 보는 듯해도 비켜서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산을 올려다보기도 하는 여유나 불어난 강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지혜가 절실할 때가 한두 번이던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화는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과 겸양의 마음이 없음으로 생긴 것이 대부분이다. 자신을 한껏 낮춰 겸손 한다면 많은 것이 정화되고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 계간 현대시조 발행인

 지난 9일 매스컴에서는 배은심 여사의 별세 소식을 전했다. 배은심 여사는 1987년 6·10 민주 항쟁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시다. 내가 배은심 여사의 별세에 조의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되었다. 그 사진은 최루탄에 피격당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었다. 이 사진 한 장은 한국의 민주화를 불렀다. 이토록 사진 한 장의 힘은 강력하다. 사진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관점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진은 국가 간 전쟁을 종식시키기도, 또 다른 사진 한 장은 인종 갈등에 관한 고민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시조 작품 〈사진첩〉은 윤미정 시인이 누렇게 변한 앨범을 들춰보면서 느낀 소회를 3수 연작으로 읊었다. 감상에 앞서 시인의 ‘시작노트’를 옮겨본다
“진작부터 사진을 정리하리라 마음먹었기에 거실바닥에 사진첩을 펼쳤습니다. 내 어린 시절, 남편 전역, 결혼, 아이들 어릴 적사진들을 보면서 추억의 나래를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나보다 더 훌쩍 자랐고 제가 봐도 풋풋하고 이쁜 아가씨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여인이 되었지만 사진 속 그날로 돌아가 미소 지었습니다. 지금도 남편과 함께 디카에 많은 사진을 찍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제 폰 안에서 잠들다 용량 초과로 삭제될 것입니다. 아날로그 그 시절,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하고 아련한 것 같습니다.”

첫 수는 누렇게 변해버린 앨범을 들춰보니 / 그때의 시간들은 사진 속 일시정지 / 되어 있었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 사진 속의 시간들은 / 꽃처럼 활짝 핀 채로 깊은 잠을 잤나 봅니다. / 그 잠은 영원한 잠이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깨어 날 줄 모르는 그런 잠이다. 아니 깨우고 싶지 않은 잠이리라.

 둘째 수에선 일상에서 만지고 있는 디카에 대한 감회다. / 함께한 일상들을 저장한 디카 사진 / 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을 찍어본들 / 꼭 꼭 저장만 할 뿐이다. 예전처럼 사진관에 필름을 맞기고 인화된 사진을 받아 들었을 때의 즐거움, 그리곤 그 즐거움을 고스란히 앨범에 채웠건만. 이제는 / 한 장도 인화 못 한 채 용량초과로 삭제되고 만다. / 그 아쉬움 이라니.

 셋째 수에선 추억을 반추한다. 소싯적을 떠올리면 그 상큼함이 사과 같다. 그런가 하면 아이를 낳아 기를 때는 그 향기가 달달한 딸기 향과 같았다. 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날로그 그 시절이란다.

 시조 작품 〈사진첩〉에서는 ‘앨범’ ‘디카’ ‘용량초과’ ‘아날로그’ 등의 용어가 등장했다. 어감이 어색하거나 생소하지 아니하고 쉽게 다가왔다. 현대시조도 세상의 추이에 따른다고 하겠다. 이런 용어를 무리 없이 구사하는 시인의 詩作 솜씨가 날로 세련되고 있음을 잘도 보여 준다 하겠다. 시인이 저장한 디카 속의 사진들 중에는 시조창작교실 정경이며 문학기행에서의 명장면들도 포함 되었으리라. 재주와 열성을 지닌 시인,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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