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을 여는 시(227)

  지워진 지문 

  일산 곽상철 

인감증명 발급기에서는
내 지문을 기억하지 못한다

잔잔한 호수에 이는 풍문이듯 고요한 마음에 이는 그리움의 파문이듯 새긴 나만의 흔적. 억센 노동의 수고로움이 만든 상흔이 출생의 흔적을 뭉개갔다. 이젠 어떤 얄팍한 검문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의 신분이다. 재물이나 직업으로 상대적인 차별을 받지 않는 저들 척도의 그물코에 걸리지 않는 바람을 닮아간다
사랑한다던 입술의 가벼운 언약의 결인도 지워져 버렸다. 남은 흔적마저 추억을 휘감은 파문의 타래를 풀며 부질없다며 부질없다며 기억의 늪에서 멀어졌다. 오직 자신과의 다짐을 찾으려 낡은 레코드판 위로 방황하는 일그러진 축음기 바늘이듯 홀로 비틀거리며 서글픈 곡조를 뒤적이다 왠지 낡은 지문을 꾹 누르면 지워진 흔적이 주마등처럼 겹겹의 창으로 토해낼 듯 불쑥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면

눈이 먼 지문 대신에
눈동자로 날 증명하려.

감상) 

눌산 윤일광시인

지문(指紋)은 손가락 안쪽 끝에 있는 살갗의 무늬다. 사람마다 모두 자기만의 고유한 지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인감증명 발급기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지문이 지워졌다. 그건 ‘억센 노동의 수고로움이 만든 상흔’이다. 얼마나 힘든 노동의 현장에 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지문이 지워지니 좋은 점도 있다. ‘검문에 걸리지 않는 자유’ ‘재물이나 직업으로 상대적인 차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가 정작으로 하고 싶은 말은 손가락 안쪽의 지문이 지워진 것에 대한 애달픔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 ‘기억의 늪’조차 지워진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지문을 지문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리움의 파문’으로 승화시킨 시인의 탁월한 언어력이 놀랍다. 예사롭지 않는 시인의 언어감각에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지문이 없으면 어떠랴. 아직 나에게는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눈동자가 있는데. 눈동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시적 감각 또한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눌산문예창작교실 제공)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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