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夕陽), 붉은 노을이 성포만 고래섬을 넘어가고 있다. 가조도 옥녀봉 정상에서 서글픈 시 구절이 들려온다. 천요하우/낭요가인/유타거(天要下雨/娘要嫁人/由他去.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날/ 엄마가 시집을 가네/ 갈 테면 가라) 엄마가 시집가는 날 회색빛 하늘을 보고 절규하는 천애고아의 처절함이 묻어있다. 이 시(詩)는 대륙무림황제 모택동이 2인자 임표가 반란을 일으키다 몽골사막으로 도망갔다는 보고를 받고 내뱉은 시 구절이다.

 서글픈 시에 이어 비애와 한탄 그리고 회한이 섞인 독백이 뒤따른다. “정복당한 자들은 설 땅이 없다. 천년만년 이어질 줄 알았건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지난달 하순 태상맹주 일준검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에 당해 보수무림에서 밀려난 전 거제태상맹주 한표검이다. 그는 지난 10년간 거제무림에서 가장 높은 권좌에 앉아 누렸던 영광의 세월과 지금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슬픔에 잠겨있다. 한시진 그리고 또 한시진... 오랫동안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안광이 갑자기 빛나면서 진해만을 뒤흔드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동귀어진, 대적필사!(同歸於盡, 對敵必死! 앞을 막으면 같이 죽는다. 적대시하는 자들은 반드시 죽인다).” 한표검의 60년 내공이 담긴 사자후로 깊고 깊은 진해만이 소용돌이치며 그 여파가 사등, 둔덕, 거제, 동부, 고현만을 넘어 거제무림 칠백리 해안을 뒤덮었다.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逆天者亡, 順天者興)
고현성.
 보수무림의 본산 국힘방 소회의실에 10인이 모여 있다. 지난 30여 년 간 거제무림을 주름 잡았던 전설적인 초 절정고수들이다. 전 거제무림맹주 한겸도장도 보인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분을 삭이지 못해 천령혈이 튀어나온 무인도 있다.
길송도인의 입에서 노성(怒聲)이 튀어나왔다. “이 무슨 개 같은 상황이냐. 도대체 태상맹주는 무슨 복안으로 호랑이를 산으로 풀어 주었단 말인가. 하책(下策)중에 하책이로구나”
“……..”
“……..”
“한표검이 무림대전에 출전하는 것은 기정사실, 그렇다면 보수무림의 우승은 물 건너간 것이 아닌가.”
“……..”
“……..”
길송도인의 말이 끝나자 전면에 있던 한 홍의노인이 분기탱천하며 고성을 질러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난 10년간 키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그토록 보살폈건만, 보수무림을 배신하고 무림대전 출전을 공표하다니 한표검은 사람도 아니오.”
“……..”
“……..”
“맞소이다.”
“암, 그렇고말고. 무림인 모두가 보수무림을 배신해도 한표검 그자는 그래선 안되지. 배은망덕한 넘” 한때 주군으로 모셨던 전 태상맹주 한표검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말석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한 백의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현 무림이 어지러운 것은 모두의 잘못이지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외다. 이런 상황이 되도록 여기 모인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이오. 또 태상맹주는 도대체 어쩌자는 거요. 참으로 개탄스럽소이다.”
“……..”
“……..”
또 다른 백의노인이 거들었다.
“나도 한마디 해야겠소이다. 작금의 거제무림은 태상맹주도 연초면, 무림맹주도 연초면, 무림의회 좌장도 연초면으로 향하고 있소이다. ‘연초면 너거가 다해먹어라’는 비아냥이 거제무림 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상황이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외다. 태상맹주가 보수무림의 중요사를 우리와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하겠다 이건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
“!”
“……..”
“……..”
“……..”
백의노인의 일침에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길송도인이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림대전을 1:1 구도로 만들어야 하오. 즉, 한표검과 보수단일화를 서둘러야한다는 말이오, 그렇지 못한다면 보수무림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오.”

 원로들의 난상토론을 지켜보던 전 거제무림맹주 한겸도장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정녕, 하늘은 보수무림을 버리는 것인가?” 이어 작금의 사태에 대해 현 태상맹주 일준검을 탓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 태상맹주 한표검을 탓하는 것인지 모를 독백이 이어졌다. “역천자망 순천자흥(逆天者亡 順天者興.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고,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자는 흥한다.)”

 다른 한편, 고현성 최대주점 명월관에는 강호 소졸들의 축배소리가 요란스럽다. 보수무림경선대회를 끝낸 강호 하급무사들의 자축연이다.
“종우검을 위하여!”
“천세! 천세! 천천세!”
 며칠 전 보수무림경선대회에서 우승한 종우검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명월관을 넘어 고현성 전체를 들썩이고 있다. 명월관 대청마루 상좌에는 종우검이 수십여 무사들의 호위아래 근엄하게 좌정해 있다.
 종우검은 보수무림에서 비주류 외공무사 중 최초로 경선대회를 제패했다. 어느 날 홀연히 ‘필마단기’로 보수무림에 나타난 종우검, 그는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1천여 기마군단을 만들더니 순식간에 보수무림을 장악했다. 보수무림 경선대회에서 처음 선보인 그의 독문절학 ‘이기어검술’은 천하를 놀라게 했다. 차세대 대표주자로 강호(江湖)에 공인되던 범준공자를 단 10초 만에 제압하고 번개같이 보수무림을 낚아챘다. 보수무림뿐 만 아니라 진보,중도무림 무사들 모두 경악했다. 아무도 종우검의 필살검법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거제무림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고, 무림의 대원로들 까지도 그의 ‘이기어검술’ 경지가 몇성에 이르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허나, 종우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다. 종우검은 아무도 모르게 측근에게 전음을 보냈다.
“군사(軍師), 한표검과 그 무리들의 동태는 어떻소?”
“……..”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상세히 보고하시오!”
긴 침묵이 흘렀다. 한쪽에서는 종우검의 경선승리에 도취된 수많은 하급무사들의 흥청거림이 명월관을 휩쓸고 있다. 오랜 침묵 끝에 종우검의 군사(軍師)가 입을 열었다. 딱 한마디다. “그들은 사즉필생(死卽必生.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아난다) 이옵니다.” 종우검의 입에서 깊은 신음이 뱉어졌다.
“으음……” 종우검은 한표검을 잡지 못하면 이번 거제무림대전 승부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4년을 준비해온 밀본(密本), 보수무림은 궤멸 되는가?
  거제무림맹 후원 한 전각에 청색장삼의 한 중년인이 계룡산 정상을 그윽히 바라보고 있다. 거제무림맹주 광용검이다. 4년 전 무림맹주로 등극할 때와는 달리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가 범상치 않다. 무림맹의 독문절학인 ‘천하패도공’과 ‘황금무력공’을 9성까지 익힌 그의 공력은 구름 위를 거닌다는 ‘노화순청’의 경지에 다다른 듯 했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패도의 기운이 전신에서 내뿜어 지고 있다. 다만, 대우조선매각파동 때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자초하는 바람에 엄청난 내상을 입어 큰 아킬레스건으로 남아있다.
창가로 전서구 2마리가 날라들었다. 무림맹 첩보단의 밀지를 받아본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의 미간에는 미세한 불안감이 보인다.
“저쪽의 동태는 어떠한가?”
배석해있던 사마공자가 입을 열었다.
“한표검은 무림대전 출전을 선포한 뒤 행방이 묘연하고, 종우검 무리들은 경선승리에 도취해 있나이다.”
“음, 불나방 같은 넘들. 무림맹주자리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군.”
“……..”
“태상맹주 일준검은 내려왔는가?”
“아직은… 황실무림 석열공 취임식 문제로 바쁜가 보옵니다.”
“구상유취(口尙乳臭),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무명무사를 내세워 놓고 걱정도 안 된다 이말 인가. 일준검 그자에게 무슨 천지개벽의 묘수라도 있단 말인가. 참으로 가소롭구나. 푸,하하”
“……..”
“판세는?”
“3자대승, 2자필승 이옵니다.” 3파전일 경우 대승을 거둘 것이고, 1:1 2파전이라도 여유 있게 이긴다는 말이다.
“확실한가?”
“무림맹 첩보단이 최근 1주야 동안 강호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보고 내린 분석이옵니다.”
“음... 밀본(密本)은 언제 가동하는가?”
“어제 밤  자시(子時. 23시~01시)부터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사옵니다.”
그랬다. 지난 4년간 광용검은 책사 사마공자를 시켜 무림에 ‘밀본(密本)’을 만들었다. 일명 ‘천사단’이라 불리운다.
  이 ‘천사단’은 1004명의 무림낭자들로 조직돼있다. 대부분 보수무림 낭자무사들을 회유해 만든 비밀결사체이다. 이 ‘밀본’이 무서운 이유는 보수무림 곳곳에 숨어든 세포조직이기 때문에 보수무림맹 첩보단이 아무리 촉각을 세워도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데 있다. 진보무림 측은  ‘거제무림대전’이 열리는 임인년 유월 초하루 날 ‘밀본’을 일제히 봉기시켜 단 한칼에 보수무림을 궤멸시킬 준비를 완성한 것이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허나 보수무림은 상대의 계책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사분오열하면서 오로지 황실무림 석열공의 지지도만 바라보고 희희낙락 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2푼이 모자란다. 동남풍(東南風)을 불러라”

 장목만에 위치한 이수도(島). 오월 들면서 알지 못할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섬 맨 뒤끝 한 초옥으로 이름 석 자만 대도 알만한 무림고수들이 몰려들고 있다. 맨 선두는 옥포만에서 날아온 전 경남도의회 건설단주 해연객이다. 이어 행규검, 수환객등 무림고수들이 줄을 잇고 있다. 모두들 호위무사 수십 명을 대동하고 있다. 멀리 선자산, 노자산, 산방산자락에서 출발한 하급무사들은 산넘고 물건너 장목항에서 돛단배를 타고 이수도에 도착했다. 줄잡아 1천500여 무사들이 모여들었다. 무당 장문인으로 추대된 한표검의 목소리에 일갑자(60년)의 내공이 뿜어져 나왔다.
“동지들! 본좌의 뜻을 받들어 주어 정말 고맙소이다.”
“........”
“........”
“노부는 거제무림을 위해 마지막 혼을 불사를 것이오. 힘을 보태 주시오.”
“존명!(尊命!)”
“존명!(尊命!)”
“존명!(尊命!)”
이어 백호짜리 대형 양피지가 펼쳐지면서 무당파 태상장로의 브리핑이 시작됐다. ‘현재 거제무림의 한표검 점유율은 보수무림 3할, 진보무림 1할5푼, 중도무림 6할이다. 해서 한표검의 지지기반은 전체 거제무림의 2할9푼을 넘는다. 보수무림의 1할만 더 뺏으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가능하다.’ 태상장로의 브리핑을 듣던 한표검이 입을 열었다.
“역천(逆天)의 계책을 구체적으로 말하라!” 태상장로는 옆에 있던 죽간을 펼치며 설명했다. “주군이 보수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3할, 1할만 더 뺏어오면 4할이 완성돼 종합 점유율이 단숨에 역전됨으로써 2강구도가 형성되나이다.”
“……..”
“이 분위기는 중도무림과 진보무림에도 직간접 영향을 미쳐 광용검과 일천초 이내의 1:1 승부가 예측되옵나이다.” 태상장로의 보고를 듣던 1천500여 무당파 무사들의 눈빛이 번득였다. 뭔가 새로운 희망을 엿본 것이다.
“보수무림 1할 견인은 가능할 일인가?”
“이미 보수무림 흔들기를 시작했나이다.”
“확률은?” 잠시 머뭇거리던 태상장로는 광장의 무사들이 모르게 전음으로 대답했다.
“5:5 이옵니다. 허나 나머지 2푼이…”
태상장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표검의 얼굴은 결전의 의지가 뚜렷해졌다. 해연객 휘하 무당파 무사들에게 장문인 한표검의 명이 떨어졌다.
“보수무림 표미무림!(保守武林 飄靡武林!)”
보수무림 표미무림, 보수무림을 무차별 흔들라는 명이다. 무당파 1천500여 무사들은 이수도를 떠나 각자 은거지로 신형을 날렸다. 표표히 날아가는 휘하무사들을 애틋한 눈길로 지켜보던 한표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에도 태상장로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만큼 극비를 요하는 일이었다.

나머지 2푼을 채울 방책은 있는가?”

  “……..”
반시진이 지나도 태상장로의 응답이 없다.
“정녕 비책이 없는 것인가?”
태상장로는 무겁게 입을 열었으나 말끝을 흐렸다.
“동남풍(東南風)...”
“으음, 동남풍(東南風)이라...” 한표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동남풍,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에서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대첩에서 불러온 신풍(神風)이다. 밤이되면 바람은 육지에서 바다로 분다. 다만 일 년에 딱 하루 평소와는 반대로 바다에서 육지로 바람이 분다. 이 현상을 무림의 현자들은 동남풍이라 부른다. 동남풍을 이용해 제갈공명과 왕건은 화공전을 펼쳐 그 유명한 ‘적벽대첩’과 ‘나주대첩’을 이뤄냈다.
새벽이 다되도록 한숨도 못잔 한표검, 거제무림 싱크탱크인 구천동 현자촌(賢者村)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과연 1년에 단 하루만 출현하는 동남풍을 한표검이 현자촌(賢者村)에서 빌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계속>박기섭(전 러시아 프리마미디어통신 한국특파원)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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