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14」
   낭패와 다짐

    윤 윤 주

시공을 훌쩍 넘는 토기를 손에 넣고
도공과 마주하듯 어르고 또 만지고
천년이 오늘 같아서 웃음 절로 나왔다.

눈썰미 앞세우고 나는 나를 믿었는데
앗! 불싸 가짜였네 얼굴이 달아올라
버리긴 아까운 화병 꽃을 꽂아 두었다.

고태에 눈길끌듯 물드는 찻그릇에
소담소담 정겨운 정 사람 향기 묻어나는
이야기 담는 그릇쟁이 요리하듯 만드리라.

◎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
  난은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넘어오던 중 은곡이라는 골짜기에서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외진 골짜기에서 문득 맑은 향기를 발하는 풀 한 포기를 발견한 공자는 탄식하며, “너는 왕자의 향을 지녔지만 어찌 이름도 없이 잡초 속에 묻혀 있느냐?(夫蘭當爲王者香 今乃獨武與衆爲伍)” 라고 한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공자는 많은 제자를 데리고 10여 년 동안 중원 천하를 주유하면서 뜻을 펴려고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 맑은 향을 뿜고 있는 한 떨기 난은 때를 만나지 못한 공자 자신을 비유한 것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이때부터 난은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한 군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난의 향기와 고귀함에 대한 찬미는 전국시대 초나라시인 굴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시 ‘이소(離騷)’에서 고결함과 충성됨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난을 애호하는 마음은 후에 필묵으로 난을 그리는 묵희(墨戱)로 발전하여 흉중일기(胸中逸氣)를 표현하는 방편으로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이러한 풍조는 북송대(北宋代)의 소동파에 의해 고취됐으며, 시·서·화 일체사상과 더불어 문인화론의 근간을 이루었다. 한편 남송이 망하고 나라가 몽고족인 원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은둔생활을 하는 문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때까지 대부(大夫)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학문을 연마해 왔던 사대부들은 원의 과거제 폐지로 정치를 떠나 시와 서화의 세계에 몰입하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다. 난세의 정신을 난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인물이 정사초(鄭思肖·1241-1318)다. 그는 본래 유학자지만 원나라에 의해 송이 멸망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강남지방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도교와 선(禪)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태극제련내법(太極祭鍊內法)과 같은 도교경전을 저술해 도교의 은둔생활을 비판하는 한편, 가을국화를 보며, “차라리 가지 끝에 향기를 머금은 채 죽을지언정 어찌 북풍에 휘말려 꽃잎을 떨구겠는가” 하는 비분강개한 시를 쓴 애국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송나라가 망한 뒤에 쑤저우(蘇州)에 은거하며 이름을 사초(思肖)라고 고쳤다. 송나라 왕가(王家)의 성(姓)인 조(趙)에서 초(肖)를 취해 송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자호인 소남(所南)의 숨은 뜻도 자리에 앉거나 누울 적에도 반드시 원나라가 점령해 있는 북쪽을 등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을 떠난 내력을 아는 이는 알고 있다
       늘 푸름 고집하던 속앓이 지병 하나
       나 홀로 고독의 등짐 등받이도 휘었다.

       야성을 잃고 나면 난도 난이 아니다
       햇살을 외면하는 반골의 그 생리는 
       날 세운 칼보다 무서운 원시에의 갈구다
                 拙詩, ‘산란15’, 전문

 정사초는 묵란을 잘 쳤는데 난의 뿌리를 그리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국토가 남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뿌리 내릴 곳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묵란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였기에 소문으로 정소남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원나라의 장수가 묵란화 한 폭을 청했던 모양이다. 완강히 몇 차례나 거절하였으나 끝내는 그려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정소남은 이제까지 그려오던 묵란화가 아닌 허공중에 뿌리를 모두 드러내 놓고 있는 난을 그려 내던지듯 건네주었다고 한다. 또 원나라의 지방관이 그에게 그림을 청했을 때 단호히 거절하면서, “내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내 그림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일갈(一喝)했다는 일화도 전해 온다.
그가 그린 ‘묵란도’는 뿌리를 드러낸 난(露根蘭)의 잎과 꽃을 간일한 필치로 그린 그림이다. 중앙의 꽃을 중심으로 잎이 양쪽으로 뻗어나가는 대칭구도를 보이고 있으며, 여백에는 화제가 쓰여 있다.

정소남-노근묵란도

서화를 심화(心畵)라고 한다면 정사초가 난을 그릴 때 지면을 그리지 않는 것은 화의(畵意)가 난의 실상 표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망국한을 난을 통해 표현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 계간     현대시조 발행인

  시조작품 <낭패와 다짐>은 윤윤주 시인이 어렵게 구입한 작은 토기 화병이 가짜임을 알고 낭패한 심정과 좋은 찻잔을 빚으리란 다짐을 2수 연작으로 읊었다. 감상에 앞서 시인의 ‘시작 노트’를 옮겨 본다.

“작년부터 사기장 스승님과 공부를 위해 골동을 보러 자주 돌아다녔습니다. 역사의 풍파에도 손상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낸 작은 토기 화병은 나의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고른 토기가 맘에 들어 돌아오는 내내 만지작거렸습니다. 나름 골동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뒤에 보니 가짜였습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한 골동이지만 돌아오는 길에 저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준 최초의 골동으로 귀하게 여겨 꽃을 꽂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세간의 골동 수집가들의 제1장 제1과는 진품을 공짜로 얻는 것이며, 싸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눈 먼게 없나하고 발품을 판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기에 그 맛이 어떠한지 알고 있다. 

시인은 ‘웅천찻사발’을 재현하고자 수련 중인 줄 안다. 그래서 스승과 함께 자주 골동을 보러 다닌 모양이다. 때마침 손에 쥔 돈으로 작은 토기 화병을 입수했을 것이다. 심혈을 기울였기에 맘에 쏙 들어 만지작거리며 온갖 상상으로 뿌듯했으리라. / 시공을 훌쩍 넘는 토기를 손에 넣고 / 어찌나 좋은지 / 도공과 마주하듯 어르고 또 만지고 /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래서 / 천년이 오늘 같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 맘에 드는 골동을 입수한 심정, 어찌나 좋은지 웃음이 절로 나와 입이 귀에 걸렸다. 

여태 들인 공으로 해서 나름 골동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기에 / 눈썰미 앞세우고 나는 나를 믿었는데 / 이를 어쩌랴 / 앗! 불싸 가짜였네 얼굴이 달아올라 / 구겨진 자존심에 얼굴뿐만 아니라 귓불도 후끈 달아올랐으리라. 골동을 사서 돌아오는 내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었기에 / 버리긴 아까운 화병 꽃을 꽂아 두고 / 나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으리라.

도자기는 흙과 유약과 불로 만들어지기에 그 과정이 요리와 별다를 바가 없단다. 다음은 시인의 ‘시작 노트’ 뒷부분이다.  “다양한 종류의 흙으로 태토(도자기 원재료 흙)의 배합과 양념 같은 유약에 적절한 불의 조절이 조화로운 그릇의 맛을 내는 요리사의 요리과정과 유사합니다. 입이 아닌 눈으로 풍미를 느끼지만 입술이 닿는 느낌도 좋아야 하기에 좋은 찻잔을 만드리라 다짐해 봅니다.”

정성을 다하여 빚은 / 고태에 눈길 끌 듯 물드는 찻그릇에 / 소담 소담 정겨운 정을 담으니 사람 향기가 절로 묻어 난다. / 이야기 담는 그릇쟁이 요리하듯 만드리라. / 시인은 다짐한다. 시인이 손수 만들어 필자에게 선물로 준 찻잔에 차를 마시곤 한다.<낭패와 다짐>을 감상한 연후에 그 찻잔에 차를 마시며 시인의 마음까지 음미하리라.

 녹원 선생의 <차시 4>가 생각난다.

반야차 자꾸 마시면 청청한 무엇이 될라
반야를 반야로 마시면 결국은 부처가 되는 걸까
연일은 부처를 마시며 허허 웃음 웃어 본다.

<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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