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바람 되어<3>-마지막 회-

가면을 벗어 던지고 싶다. 그래서 인간인 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 벌거벗은 모습, 내 존재의 우연성과 철저한 고독을 보여주고 싶다. 항상 점잖게 불행해 하고, 점잖게 울고, 점잖게 기뻐해야 하는 고상한 형이상학자들, 그들의 가면은 사양한다.
 정우가 벗어버리고 싶었던 가면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금방이 라도 일어나 다음 장을 써 나가도록 제자리에 반듯하게 앉혀 놓았다. 서랍 속엔 열쇠꾸러미, 볼펜, 지우고 또 쓰고 덧칠로 그려진 악보와 그가 좋아했던 찰리 파커와 빌 에반스의 음반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가 밤바다를 누비며 루이 암스트롱과 넷킹 콜을 연주하던 알토 색소폰은 책상 옆에 주인을 기다리는 듯 단정하 게 서 있었다. 그 옆에는 키 큰 콘트라베이스도 무책임한 주인을 성토하는 언짢음을 함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재즈에 뭔 콘트라베이스씩이나! 내가 의아해 했을 때 진정한 재즈는 자유로움이라고, 목의 단추를 풀고 형식을 탈피하는, 그래서 재즈만이 가능한 영역이지. 하는 말로 시작했다. 모든 역사는 첫 시도에서 길을 만드는 거야. 처음에는 교회에서 오르간도 금지되 었어. 몬테 베르디 이전에는 발레 음악에나 쓰였던 악기였지만 오늘날 오르간 없는 교회를 생각이나 할 수 있어? 트롬본은 글룩이 최초로 극장에 끌어들였고 베토벤에 이르러 베이스 드럼과 함께 실내악에 사용된 거야. 음악의 역사라는 건 누군가 실험적인 시도에서 이루어진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야.

 정우의 자리를 찾아 앉아보았다. 멀리에 섬 하나가 설풋한 실루엣으로 그려졌다. 딱 이쯤이었다. 정우가 그의 색소폰과 연주를 시작하는 위치는. 지금쯤 그의 바람은 어디로 떠돌고 있는 겔까. 어쩌면 지금 내 곁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돌아온 게니? 그의 바람이 물었다. 다 알고 있잖아. 알고 있지. 나는 늘 너의 곁을 떠돌고 있었으니. 네가 지켜준다는 그 바람으로 살아보려 했어. 나는 노력했어. 그렇지만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어. 알고 있어. 누랭이가 이번에도 새끼를 낳았겠지. 모성애가 유별나다 했던가? 그래.
 고양이는 가장 안전하다 싶은 곳에다 새끼를 낳는 법이지. 계단 데크 속을 택한 건 네가 그 집에 있기 때문이었을 거야. 다섯 마리였어. 가끔 검정고양이가 다녀가곤 했어. 일가를 이룬 게지. 나는 그들 가족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어. 얼마나 자랐을까, 꼬마들의 바깥나들이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지. 검정과 노랑이 얼룩거리는 세 놈, 나머지는 제 엄마를 닮은 누랭이였어

 정우와의 원만한 대화는 음악이 없이 다음을 이어갈 수 없다. 그가 표현하는 모든 문자에 재즈는 주인처럼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음악은 그와 내가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길이었으며 아버지를 포함해 그의 식구들과 달리 나는 그를 가장 이해했다. 그가 작곡과로 진로를 정하기까지 아버지와의 갈등은 험난했다. 집안을 살리는 길이 오직 법대뿐이라 고집하던 아버지에게 내 간청이 미미하지만 도움이 되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늘 맘 아픈 여식에겐 우호적이었던 아버지였다. 정우는 미안하다 했다. 함께 진학하지 못하고 섬에 남겨지는 나에게. 그의 사진, 대학 엠티 때 친구에게 잡혔다는 해맑은 얼굴이 액자 속에 갇혀 있었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가자, 라며 색소폰을 쥔 다른 한 손으로 나를 잡아끌며 바닷길로 나갈 것 같았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죠. …….

 폰을 열어 어느 팝페라 가수의 노래를 그의 사진 앞에 바쳤다. 나는 알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바람이 되었을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그의 사진 앞에서 울지 않는다. 사진 속에 그는 없고 그는 이미 천 개의 바람이 되어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거라는 걸 믿기에. 밤을 비추는 그는 별이었고, 겨울의 흰 눈 속에도 그는 항상 있었으니까.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에도 그의 입김은 존재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지저귀는 새소리에도 그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으니. 떠나지 않았고 내 곁을 머물고 있는 그 느낌으로 나는 그가 떠난 십여 년을 견뎌내고 있었다.  정우의 방을 나왔다. 바닷길로 걸어 나왔다. 모래밭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지금쯤 그 사람은 집에 도착했을 것이고 내 부재를 확인했을 것 이다. 내 이런 행위가 그렇게 놀라울 것도 없는 사건일 것이며 사소한 일상으로 묻혀갈 것이다. 내 행적이 궁금해 아버지에게 위장 일지라도 통화할 사람도 아니다. 이게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전부이다. 언젠가는, 아니면 벌써 오래전에 일어날 일이 지금에야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마음 다질 뿐. 그는 내 노여움에 관심도 없었고 내 이름 같은 건 어느 적당한 세월에다 휴지처럼 버릴 것이다.

  하루에 두 번 밥그릇을 채워주고 청결한 물그릇을 준비하고, 내 나날의 톱니바퀴는 그들 일가와 맞물려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었어. 아, 고양이 눈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 있어? 제가 입고 있는 털의 빛깔과 똑 같아. 요술구슬 속처럼 오묘해. 그 속에 세상의 모든 비밀스런 빛이 다 숨어 있는 거 같아. 두려움까지 채색된 눈을 쏙 내밀던 새끼들. 그 눈들은 그즈음 살아내야 할 내 의미의 모두였어. 
그랬겠지.
 어느 해질 무렵이었어. 이층 창가에서 나무 우듬지를 스치는 바람을 살피고 있었어,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내 몸의 세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비늘을 세우니까. 햇살 맑은 날도 그래. 눈 오는 겨울날도 오래 기다린 친구이듯 설렘으로 맞곤 하지. 그 바람에 넋을 두고 앉은 내 눈에 도둑걸음으로 걸어가는 그 사람의 등이 잡혀 들겠지. 대야 가득한 물을 들고 눈치차림으로 걸어가는, 약간은 비굴스런 등이었어. 단번에 알아챘어. 그 사람의 대야가 무슨 용도로 쓰일 셈인지. 누랭이 일가가 거주하는 계단 옆 데크에다 대야 가득한 물을 쏟아 붓는 거야. 그것도 세 번씩이나. 물론 그 후 그들 일가는 떠났어. 햇볕 좋은 날, 데크 밖으로 나와 어미 품에 뒹굴던 다섯 마리의 새끼들, 그 부듯한 그림은 다시 볼 수 없었어.  그랬구나. 누랭이에 대한 그 사람의 증오는 혹여 내 몫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누랭이는 빌미에 불과했을지 몰라.   …….

 피투성이가 된 새끼의 주검을 물고 울고 다니는 누랭이를 본 건 며칠 뒤였어. 결국 그게 마지막이었지만 말이야. 얼마나 슬피 울고 다니는지, 내가 뒤따라가서 말했지. 내가 묻어줄게. 말끄러미 바라보던 누랭이는 가만 등을 돌리더라. 날 원망하는 눈빛이었어. 나는 그것들을 살리기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거든. …….바람이 파도를 실어왔다간 또 뒤로 밀어냈다. 그 바람이 내 머리카락과 노닥거리다간 바다 건너로 아련하게 멀어져갔다. 바람이고 싶어. 나 또한 천 개의 자유로운 바람이고 싶어. 파도를 밀어 내는 그 바람에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앉아 있었다.<끝>  

이로서 신말수 소설가의 '황해여인숙 단편소설집' 연재를 전부 마칩니다. 집필에 수고하시고 게재를 허락해 주신 신말수 작가님과 그동안 작품을 읽어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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