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27
   과일나무 많은 집 

     김  기   남
황금빛 태양마냥 높이 뜬 비파 열매
나무를 타고 올라 한입 베면 천상인데
키 작은 우리 누나는 하늘 보며 군침만.

가지 끝 달려 있는 빠알간 홍시 하나
갯가 간 울어머니 시장기 면하련만
행여나 떨어질세라 눈길 자주 보내고.

잘익어 맛깔스런 가을볕 홍로사과
고단한 울아버지 술안주로 따놓으면
철없는 어린동생들 먹고싶어 떼쓴다.

아담한 마당 안에 풍성한 과일나무
알알이 맺혀있는 소소한 이야기들
울식구 웃음 넘치던 어린 시절 그리운 밤.
   
◎ 말을 알아듣는 나무 
 나는 꽃이나 풀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믿고 있다. 「식물은 지금도 듣고 있다」의 저자 이완주 박사는 농작물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수확이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이박사는 응달에는 잎을 펼치지만 땡볕에서는 몸이 탈까 봐 잎을 접는 ‘괭이밥’, 낮에는 잎을 펼치지만 광합성을 하지 않는 밤에서는 잎을 접는 ‘자귀나무’, 사람의 근친상간과 같은 자기 수분을 피하려고 암술과 떨어져 있던 수술대가 벌이 오면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벌의 등에 꽃가루를 덮어씌우는 ‘매자나무’, 꽃밥을 치약처럼 짜서 그것을 옮겨 줄 곤충의 배에 붙여 주는 ‘수레국화’ 등 식물도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식물들은 본능적인 예지력을 갖고 거기에 대비하여 조절인자가 성장을 조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곧 식물도 느끼고, 생각하고, 계획적인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노숙한 농사꾼은 옥수수의 버팀뿌리를 보고 멀지 않아 태풍 같은 센 바람이 불어올 것을 짐작한다. 버팀뿌리는 옥수수 밑동의 줄기 마디에서 뻗어 나와서 땅으로 굽어 박히는 뿌리인데, 옥수수 몸체를 사방에서 받쳐 튼튼하게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옥수수가 살아갈 앞날에 큰바람이 있을 것을 예견하면 보통 때보다 굵고 튼튼한 버팀뿌리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일이다. 이곳 예술랜드 경내를 둘러보던 관람객 한 사람이 감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죽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멀쩡하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 감나무 밑동을 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작은 줄기가 몇 개 돋아나 있었다. 
 감나무의 둥치가 죽음에 대비해 뿌리 쪽에 새 줄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후 감나무는 정말로 큰 둥치는 시들고 밑동에 돋은 어린줄기가 죽은 둥치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를 다시 만나면 소주라도 한잔 나누고 싶건만, 어디에 사는 누군지 알 길이 없다. 
 대나무의 뿌리 뻗음은 무서울 정도다. 십 미터 이십 미터는 예사로 뻗는다. 그런 기세라면 세상천지가 대나무 숲이 될 법도 한데, 뻗을 만치 뻗고 나면 그 이상 뻗지 않는다. 그칠 줄을 아는 것이다.

 그 밖에도 노쇠해지면 솔방울을 많이 갖게 되는 ‘소나무’, 물기가 없으면 죽은 것처럼 오므려졌다가 비가 오면 파랗게 펴는 ‘바위손’, 자손을 널리 퍼뜨리는 ‘민들레’나 ‘도깨비바늘’ 등의 노력도 같은 이치다. 말을 알아듣는 꽃, 즉 해어지화(解語之花)는 양귀비를 지칭하는 말이다.  기회에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천보유사(天寶遺事)」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당나라 현종이 화창한 어느 날 총애하는 양귀비를 데리고 궁중의 연못인 태액(太液)으로 산책을 나섰다. 때마침 연못에는 연꽃이 만발하였는데, 꽃 사이에서는 가끔 물고기까지도 솟아올라 이 아름다운 절세의 왕비를 구경하느라 ‘첨벙! 첨벙!’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문무백관도 다투어 나와 황제 일행의 꽃구경 행차를 수행하고 연꽃과 귀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현종은 좌우 신하들을 돌아보며 몹시 유쾌한 표정으로 왕비를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다. “어떠냐, 연꽃도 곱지만 짐의 말을 알아듣는 이 꽃, 이 해어지화에는 비교가 아니 되겠지?”
 “예,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한 참 후에야 굽혔던 허리를 다시 펼 수 있었던 신하들은 일제히 양귀비를 쳐다보았는데, 흠뻑 웃음을 머금은 이 경국의 미녀는 더 한 층 교태에 젖어있었다고 한다. 난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겨울철 짐승들이 먹이가 부족하면 잎이 푸른 것이면 죄다 먹어 치운다. 춘란도 예외일 수 없어 잎이 뜯기어 몽당빗자루처럼 되기 일쑤다. 잎이 잘린 춘란은 잎이 성한 춘란보다 더 많은 꽃대를 올린다. 종족 보존을 위해서다.

         볕 바른 산자락에 누대의 터를 잡아
         한 탯줄 달린 식솔 힘줄보다 질긴 목숨
         미풍에 두 손 모두어 새벽기도 올린다.
                
         멍울진 이파리는 한 소절 성주풀이
         몰골이 그게 어디 난이라 이럴 건가
         몽당손 꼽아가면서 추스르는 음삼월.

         근본 하나 지키려고 선 채로 가눈 뼈대
         파열된 관절마다 도리질의 절규 소리…
         단전에 기를 모아서 꽃대 가득 올린다.
             - 拙詩, ‘山蘭16’, 전문   
 식물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데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도 당당해진다. 창밖에 요란한 빗소리가 들린다. 폭염도 씻기려나 귀 기울인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 게간 현대시조 발행인

 시조 작품 〈과일나무 많은 집〉은 김기남 시인이 과일나무가 풍성 하였던 어릴 적 고향집을 그리워하며 추억에 잠겼던 심사를 4수 연작으로 읊은 서정시조다. 시인은 시작노트에서
“어린 시절 작은 마당에 과일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던 집에서 살았는데 아무런 걱정 없이 뛰어 놀고 과일 따먹던 그때가 가끔씩 그리워서 적어 보았습니다. 옛집의 과일 중에 기억나는 것이 비파, 감, 사과인데 하나씩 사연을 담아 보았습니다. 비파는 천상의 과일이라는데 키 작은 누나는 맛조차 못 보았고 엄마가 맛나게 드시던 홍시는 까치나 참새 차지였고, 새콤하고 촉촉한 사과는 아버지께서 힘들 때 드시고 싶어 하셨는데 먹거리 부족하던 그 시절에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유난히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옛 추억에 눈물을 훔치곤 합니다. 그러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시조로 표현해 봤습니다.”

 너나없이 어린 시절은 추억의 보물창고다. 그래서 시인들은 시로 노랫말로 읊어 사람들을 회상하게 하고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한다. 감상자의 고향집에도 납작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고향집 소묘」라 제한 시에서 “유년은 낙과가 되어 발길마다 채인다” 하고 읊었다. 話者는 〈과일나무 많은 집〉에서 누나며 어머니, 아버지와 어린동생들을 차례로 등장시켰다. 어린동생들로 미루어 보아 칠 팔 명의 가족이었지 싶다.

 비파나무가 꽤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황금빛 태양마냥 높이 뜬 비파 열매다. 비파가 숙과가 되면 노랗게 황금빛으로 익는다. 바라만 보아도 군침이 돈다. 사내아이들 같으면 나무를 타고 올라 한입 베어 물면 천상인데 / 키 작은 우리 누나는 하늘 보며 군침만 / 흘린다. 키 큰 비파와 키 작은 누나, 그 대비가 흥미롭다.

 까치밥은 배려였다. 날짐승을 향한 배려였다. 감나무 가지 끝엔 하나 둘씩 까치밥이 달려 있었다. 갯가로 개발하려 가신 어머니, 그 어머니의 시장기를 염려하는 효심이 엿보인다. 그 홍시 하나면 / 갯가 간 울 어머니 시장기 면하련만. / 하고 이는 조바심이다. 배고파 본 사람은 안다. 그래서 갈시일적여감로(渇詩一滴如甘露 갈증 날 때 한 방울의 물은 단 이슬과 같다)고 명심보감에서 일렀다. 까치밥이언만 어린 마음에 / 행여나 떨어질세라 눈길 자주 보내고 / 있었다. 갸륵한 지고.

 가을볕에 잘 익은 사과 홍로는 때깔이 곱다. 그래서 더욱 맛깔스럽다. 가족 건사에 고단하신 아버지시다. 그 아버지 술안주로 따놓은 홍로 한 알, 철없는 어린 동생들이 제 것이라 때를 쓰고 있다. 아마도 아버지는 김치 한 자락을 막걸리 안주로 때웠었지 싶다. 정겨운 정경이 눈에 선하다.

 넓지 않은 아담한 마당, 비파며 감이며 사과며, 풍성도 하더니만. 떠나와 돌아보니 소소한 이바구들이 알알이 맺혀있다. 잠 못 들어 뒤척이던 밤, 옛 추억에 시인은 눈시울을 적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산선생의 '가고파'를 즐겨 부른다.

 연작시조, 그것도 4수 연작이면 만만치 않다. 각 수 마다 고심의 흔적이 보인다. '금요거제시조선'란에 세 번째 등장한 김기남 시인, 다음 작품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시인으로 해서 나는 또 고향집 납작감을 발길로 차고 있다.-능곡 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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