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 - 137」

   산다는 것은 

    허   원   영

서글픈 마음들이
한 방울 잉크라면

 저 넓고 푸른 바다에
 방울째 떨구어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좋겠네.

  찌르는 속 쓰림이
  차라리 병이라면

  오히려 마음만은
  개운할 수 있으련만

   버거운 세상사 모두
   저녁놀에 묻고 싶네.

  ◎버리기, 그 어려움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살아 온 세월의 무게만큼 가진 게 많아진다. 우리가 가진 것 중 80퍼센트는 버려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렇긴 하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느 것이나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여긴 나머지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하는 정신 현상, 이것을 현대의학에서는 저장강박증(貯藏强迫症)이라 하는 모양이다. 저장강박증, 영어로는 이름도 거창한 컴플시브허딩신드롬(Compulsive hoarding syndrome)이다. 

  저장강박증은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어떤 물건이던지 사용여부에 관계없이 계속 저장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증상이다. 이는 습관으로 절약이나 취미로 수집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심한 경우 치료가 필요한 행동장애로 보고 있다. 그 원인은 확실치 않지만 가치판단 능력과 의사결정이 손상되었기 때문으로 진단한다. 대표적인 예로 쓰레기로 온 집안을 가득 채우는 경우인데, 주로 노년층에서 나타난다. 물건은 말할 것도 없고 불편했던 심기들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아간다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물자가 부족했던 어려운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면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저장강박증 증세 같은 수집 보존 벽(癖)에 싸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습관이나 절약 취미로 수집을 하고 보존하는 것이 저장강박증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습성에서는 매한가지이다.

 나는 수집벽이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고 고질이 된 병이라 해야 맞는 말인 것 같다. 우표, 수석, 난, 민속품, 책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책에 대한 얘기를 할까 한다. 지난 2018년 5월, 포천시 신북면에 소재한 「현대시조문학관」의 준공식이 있었다. 필자가 발행하고 있는 계간 『현대시조』에서 건립한 것으로, 내가 관장을 맡고 있다. 그간 소장하고 있던 책 중에서 문학관에 필요한 만 권 정도의 책을 이곳에 옮겼다. 나는 소가 땀을 흘리며 끌 정도의 많은 책을 실은 수레와 천장까지 가득할 정도로 많은 책이란 뜻의 한우충동(汗牛充棟)을 들먹일 만큼의 대단한 장서(藏書) 소장가는 아니다. 그렇긴 해도 일단 입수한 책을 버리지 못하여 그 수량이 자그마치 2만여 권을 헤아리게 되었었다. 몇 차례의 이사 끝에 버린 책이 수천 권이나, 지인들이 보내오는 책과 기회만 있으면 사 모은 책으로 해서 오히려 불어났다. 

 서울 어느 아파트에 살 때의 얘기다. 어느 날 퇴근길이 빨랐는데, 아파트 한 켠에 버리는 물건을 쌓아놓은 곳에 버려진 책에 눈길이 갔다. 다가가 살펴보니 「월간 바둑」 과월호였다. 이 아파트에 나 말고 「월간 바둑」지를 모으는 사람이 있었나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월간 바둑」 과월호 수백 권이 꽂혀 있던 서가가 텅 비어 있었다. 버려진 그 책은 내 책이었다. 비좁은 아파트에 베란다엔 난이, 거실과 창고엔 수석이, 안방을 비롯한 벽면엔 온통 책이 차지하고 있으니 보다 못한 아내가 내가 출근한 틈을 타 그중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한 「월간 바둑」을 몽땅 내버린 것이었다.  시비를 걸었다간 이혼하자는 말이 나올까봐 아무 소리도 못하고 낑낑대며 다시 챙겨다 놓고는 「사단법인 한국기원」에 전화를 했다. 창간호부터 수백 권의 과월호를 기증하겠다고 했더니, 두어 시간 뒤에 아마바둑 4단증(당시 나는 아마바둑 3단이었다)과 김인 국수가 휘호한 한 뼘 두께의 바둑판을 들고 임원 두 사람이 찾아왔었다. 「월간 바둑」은 (사)한국기원의 기관지인데 과월호의 보관이 부실했던 모양이었다. 나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당사자에겐 천금 같은 경우가 이런 것이지 싶다. 벌써 40수년이 지난 옛날 얘기다.

      마흔도 꽉 찬 마흔
      혹(惑)함도 지금은 없다

      부대끼는 바람 안고
      날을 세워 사는 목숨

      난과 돌 깊은 미망(迷妄) 속
      어슴푸레 열리는 문.

 
      세월의 잔 등에 업혀
      허구한 날 자맥질을

      허물도 사르고 나면
      흙으로 돌아 가는가
    
      던지고 사는 셈법들
      오늘에사 알 것 같다.
    - 拙詩, ‘터득의 書’, 전문.

 책을 그렇게 정리하고도 2천 권이 넘는 책을 붙안고 있다. 꼭 찾아보아야 할 내용이 하필이면 버리거나 남에게 주어버린 책 속에 있다는 것을 애석해하기도 했고, 지혜의 보고라는 인터넷을 두들기면 정보가 쏟아진다고 하지만 사이버 공간의 그 일천한 역사로는 서지(書誌)에 들어 있는 지식 모두를 저장하지 못함을 책을 붙안고 있는 변으로 삼고 있기는 하다. 소장품의 정리는 서두르지 말고 자식에게 미루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크게 자랑할 것도, 값나가는 것도 없고, 그것을 알뜰히 챙겨둘 자식들도 아니니 어쩌랴 싶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空手來空手去)고 했으니, 어차피 버리고 떠날 인생일진데 버리는 데 더욱 익숙해지리라 다짐해본다.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고 나면 팽나무 잎이 낙엽되어 깔려있다. 머잖아 나목이 주는 훈수를 겸허히 배울까 한다.(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현대시조발발행인 능곡이성보

시조 작품 .<산다는 것은> 허원영 시인의 작품으로 가을을 타는 여심을 2수 연작으로 읊었다. 살다 보면 서글픈 마음도, 괜시리 속이 쓰리는 일도 생긴다. 조락의 계절인 가을엔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달래기 위해 벗을 찾기도 하고 술을 찾기도 한다. 어떤 이는 하염없이 뚝길을 걷는가 하면 돌밭을 누비기도 한다. 겉으론 명랑하기만 한 시인인데 <산다는 것은>으로 한 시에선 우수가 배여 나오고 있다./ 서글픈 마음들이 한 방울 잉크라면/하고, 여는 첫 수의 초장에서 읽는 이를 조금 긴장하게 한다. 저 넓고 푸른 바다와 한 방울의 잉크, 그 대비가 자못 싯적이다. 그렇다, 서글픈 마음일랑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좋고 말고다. 코로나 19로 지쳤는가 싶다. 詩題를 <산다는 것은>으로 하였음을 미루어 보아 그렇게 여겨진다. 찌르는 속쓰림이 차라리 병이였으면 싶다는 시인, 속 쓰림이 병보다 더한 외로움일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병이라면 오히려 마음만은 개운할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의 상처가 꽤 깊은 모양이다. 버겁지 않은 세상사가 있던가, 버거운 세상사를 저녁놀에 묻을 수만 있다면 그 아니 좋을 손가. 언제부턴가 단양주 빚기에 열심인 시인이다. 그 단양주 한 잔이면 <산다는 것은>의 의미를 느끼지 싶다. 시인처럼 마음이 서글플 때는 나는 갯가로 가곤 한다.
 그리곤 ‘돌바보’라 제하여 이렇게 읊었다.
   
      무료한 날이거던  
      갯가로 가 보아라

      맨살의 오붓한 연정
      밀어도 들어가며
   
      수마된 인고의 세월
      어루만져 볼 일이다.

      물살에 시달리면
      상처도 윤을 내고

      남을 것만 남은 몸매
      청복도 배울지니

      심신이 고달픈 날엔
      갯가로 갈 일이다.
                                   <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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