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45」

    수 묵 화
-솔거미술관 소산 그림을 감상하며

    윤 윤 주

 달 비친 강물 소리
 농담(濃淡) 되어 번져가고
 

 경치는 한 몸 되어
 필묵에 묻은 애모
 

 흑백이 색으로 돋아
 죽어서 살아난다.

◎ 먼지 쓴 거울 같은 계절에 서서
 ‘욕속부달(欲速不達)’이란 말이 있다. 즉 “빨리하려면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찍이 공자께서 급히 서두름을 경계한 말이다. 우리 민족성의 하나로 격렬하고 급함을 말하는 이도 있다. 발효와 숙성의 음식인 김치를 주식으로 삼는 민족이련만 격렬하고 급한 성미는 김치와는 딴판으로 너무 대조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서두르는 습성을 두고 절기에 맞추어 농사를 지어야 했기에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다잡아 농사일을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말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급하고 빠른 것을 좋아하는 습성 때문인지 지방마다 이를 소재로 한 우스갯거리도 많은 모양이다.

 섣달 그믐날 장가를 와서는 다음날인 정월 초하루에 마누라를 쫓아내었단다. 이유인즉 시집온 지 2년이 되어도 애기를 낳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과년한 딸을 둔 한 시골 양반이 매사에 부지런하고 서두는 놈을 사윗감을 고르는 조건으로 내세웠다. 어느 날 총각 한 녀석이 뒷간에 드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 녀석은 허리끈을 풀 생각은 하지 않고 주머니칼을 꺼내 허리끈을 싹둑 자르는 게 아닌가. 그 급한 성미가 맘에 들어 옳구나 싶어 일을 끝내고 나오는 녀석을 붙들고 사위가 돼 달라고 사정을 하니, 녀석이 쾌히 응했다. 내친김에 한 달 안에 혼례 날을 잡자고 하니 이 녀석 깜짝 놀라 “한 달씩이나요? 그럴 것 없이 오늘 밤으로 해치웁시다”한다. 서두르는 꼴이 여간 맘에 드는 것이 아니다. 이 양반 그저 좋기만 해서 그날 밤으로 찬물을 떠 놓고 혼례를 치르도록 했다. 

 신랑 신부를 신방에 넣어주고 사랑에 앉아 있는데, 느닷없이 신방에서 딸의 비명소리가 자지러진다. 허겁지겁 달려가 보니 사위 녀석이 빗자루 몽둥이를 거꾸로 들고 딸을 개 패듯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놀라서 이 무슨 행패냐고 호령하니, 사위 녀석이 하는 말이 동침을 했으면 애를 빨리 낳아야 할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었건 간에 빨리 서두를수록 좋다고 여김을 빗댄 우스갯소리겠지만 어쩐지 듣기가 민망하다. 

 우리의 선인들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일러왔다. 일을 제때 하는 것이 우리의 교훈적 가치다. 서두르는 것을 생존의 가치관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우리에겐 오늘 할 일을 내일 하는 것 자체가 곧 패배를 의미하는 관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젖을 기다리기 시작하여 죽음의 시각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기다림이 연속되기에 사람의 생애란 하나의 기다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기다림을 잊어버린 현대인이 앓고 있는 조급증의 치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난 기르기가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흔히들 양란(養蘭)을 두고 기다림을 익히라 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한다.

   햇살이 눈부신 날 숲속에 가 보아라
   아무도 범접 못 할 매몰찬 언저리에 
   파랗게 힘줄이 돋은 난을 보게 될 것이다.

   비록, 산짐승에 찢기어 처연한 몰골이지만
   꼬장한 성깔머리 신운(神韻)하나 지닌 채로
   솔바람 귓결에 얹고 천수경을 외울게다.

   쇠절구로 바늘 빚는 천태산 마고 할멈의
   고래 심줄보다 더한 끈기나 동해를 하릴없이

   바라보다 망부석이 된 박제상 처의 서릿발보다
   무서운 기다림이 하나같이 부질없는 일이 아니라면 

   쏜살같다는 세월을 다 잡는 초래 방정일랑
   이젠 그만 떨고

   한 포기 민춘란이라도 
   난을 길러 볼 일이다.
 졸시(拙詩), ‘난에의 초대’, 전문.

때를 기다린 것을 두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회자된다. 그는 20년 동안을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때를 기다리다 최초로 일본 통일을 완성하여 막부시대를 열었다. 먼지 쓴 거울 같은 겨울의 시작이다. 쇠망치를 갈아 바늘을 만든 천태산 마고 할멈의 고래 심줄 같은 끈질김으로 겨울을 견디자. 그래서 계묘년의 봄을 맞자. 계묘년의 봄은 임인년의 봄보다 따스하리라 믿어 마지않는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현대시조발발행인 능곡이성보

≪감상≫
시조 작품 〈수묵화〉는 ‘솔거미술관 소산 그림을 감상하며’라는 부재가 붙어 있다. 경주 엑스포공원 내에 있는 솔거미술관은 소산 박대성 화백이 830여 점의 작품 기증 의사를 밝히면서 건립 구상이 시작되었고 2015년 실크로드 경주 엑스포 개막에 맞춰 문을 연 곳이다.윤윤주 시인은 이 미술관에서 먹의 농담을 이용한 소산의 수묵화를 감상하면서 그 감흥을 단수로 읊었다.145회에 이른 「금요거제시조選」에 처음으로 단수 시조가 선을 보였다.

 시조는 원래 時節歌調라 하여 시절을 노래한 시였다. 그리고 詩題를 붙이지 않았다. 더더구나 연작이라 하여 여러 수를 엮어서 한 편의 작품을 이루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시조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단수에 있다, 연작이라 하더라도 수마다 떼어 놓고 보아 한 수 한 수가 다 작품이 되어야 한다.

기회에 소산 박대성 화백을 살펴보기로 한다.

소산(小山) 박대성(朴大成) 화백은 1945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였고 7남매 중 막내였다. 4살 때 빨치산의 습격으로 당시 한의사로 주변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부친이 변을 당했고 자신은 왼팔을 잃었다. 칼라가 판치는 현대미술계에 검은 먹색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그의 저력을 두고 ‘불편을 즐기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소산은 16년 전 경주의 남산 자락에 당호를 불편당(不便堂)이란 작업실을 짓고 스스로 유배 생활과 같은 불편을 감수하는 고행의 길을 택했다.소산은 삼고에 시달렸다. 불편한 몸으로 인한 신체적 고초, 좋지 못한 예술적 배경으로 인한 사회적 고초, 작품 양식의 바람직한 변모를 위해 스스로 만든 고초 등 즉 삼고에 시달리면서도 편한 길을 외면하고 불편함을 즐기고 살아왔다. 그리하여 그에겐 수묵화의 대가, 마지막 한국화가, 인간 승리의 표본 등 숱한 수식어가 붙어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술은 고행을 먹고 자란다”며 열정과 끈기를 전수하고 있다. 어찌 위대하다 하지 않겠는가.

시인은 시작 노트에서
“부산시립미술관 수집 위대한 여정 특별전 이건희 컬렉션에서 그 유명한 한국 근현대 작가의 대표작품들 속에서 소산 박대성 선생님 그림을 만나서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지금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과감한 붓 터치와 감각적인 표현은 젊은 시절의 패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시조는 현재 경주 솔거미술관에 전시된 소산 선생님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느낌을 단수로 적어 보았습니다.

 글로서 이미지를 그려내는 일이나 그림으로 이미지를 적어내는 일이나 고뇌와 인고, 노동의 인내가 없다면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밤이 되면 달빛 경치에 먹물로 그려 놓은 듯한 한폭의 수묵화를 보게 됩니다. 밤이면 색이 숨어들고 생명의 향기와 소리는 더 선명히 들려옵니다. 작품은 무채색이지만 대상 본질의 색이 순수하게 묻어나오는 경험, 나의 상상의 그림이 다시 그려지는 나만의 감상이 되어 살아납니다.”

수묵화(水墨畵)는 채색을 가하지 않고 먹의 농담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 달 비친 강물 소리 농담 되어 번져 가고 / 있다. 달 비친 강물 소리가 화폭 위에 농담으로 번져 가고 있단다. 초장부터 그 표현이 예사롭지 아니하다. 경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맥을 잇고 있다는 소산 화백, 그가 그린 산수화는 경치와 한 몸이 되었을지니 필묵, 즉 붓과 먹에 묻은 애모는 고행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소산의 수묵화, 흑백이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련만 색깔로 돋아나 생생히 살아나고 있다. 해동이면 솔거미술관으로 가보리라. 거기서 약여 하는 생명의 향기와 소리를 들어 보련다. 내가 시도 하는 ‘自然藝術’, 그 왜소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말이다.능곡 시조교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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