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다. 한동안 내리지 않았던 비로 먼지 옷을 입고 있던 초목들이 반가운 듯 비에 젖어 몸을 씻고 있다. 창밖을 응시하던 중 반가운 울림이 울린다. 전화기를 덥석 잡았다. 손자가 보고 싶은 터였다. 오고 가는 말이 길어진다. 통화로는 아쉬워 당장 가겠다며 대화를 끝냈다.

비 온 후라 그런지 볕이 더욱 화사하다. 하늘이 푸른데다 검푸른 등고선이 상반되어 또렷한 한 폭의 그림을 그린 듯하다. 길나서기 좋은 날씨다. 마당 여기저기를 손질하고 살핀다. 오래된 독이 뚜껑을 잃고 덩그러니 있다가 내리던 하늘을 오롯이 담았다. 너무 예뻐 담긴 물을 그대로 둔다. 집안을 손봐놓고 밤 비행기를 탔다.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빛이 거꾸로 쏜다. 하루의 피곤을 의자에 의지한 채 눈을 감는다. 사랑스러운 손자의 모습이 다가온다. 내 철없던 때도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추억의 한 편이 떠오른다.

라디오에서는 때때로 비가 내리겠다는 예보를 하였으나 막상 가뭄이 들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태풍이 온단다. 아이들은 그런 건 아랑곳없이 신나게 숨바꼭질하며 놀았다.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켜 눈을 뜰 수 없어도 신났다. 차츰 빗방울이 날리다가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비가 많이 오면 저수지 수문 관리사가 할머니 집 앞을 바삐 지나가곤 했다. 그날도 그분이 지나가고 저수지 수문이 열렸다. 어둑해지자 이미 불어 난 물에 저수지 물까지 합쳐져서 큰 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삼킬 것처럼 굉음을 질렀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지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구굴 구굴’ 더 크게 들린다. 밤사이 흙탕물은 깊은 내를 가득 채우고 용솟음치듯 내달렸다. 동네 앞에는 포로수용소에 주둔했던 미군이 놓았다는 넓은 나무다리가 있었다. 큰 트럭도 다닐 수 있는 튼튼한 다리였다. 삼촌 친구가 다니러 왔다가 가며 그 다리를 지났는데 건너자마자 곧바로 다리가 쓸려가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날 오후 쨍하고 나온 볕에 들판은 말끔해 보였어도 여기저기 태풍의 잔해가 나뒹굴었다. 어른들은 논에서 흙을 퍼냈고 우리는 냇물 구경을 했다. 크고 높다란 바위들이 온데간데없다. 침식이 일어난 바닥엔 푸르스름한 너럭바위가 생겨났고, 씻겨진 자갈 위로 물은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쉴 새 없이 벽을 치며 달린다. 며칠이 지나자 수문이 닫혔는지 물이 많이 줄었다. 냇가엔 다슬기가 새까맣게 붙어 있고, 숨었던 물고기도 물살을 따라 거슬러 올랐다. 또래들은 새로 생긴 너럭바위에서 조약돌로 소꿉놀이를 했다.

여름방학이면 할머니 집으로 가는 게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바위틈에 붙은 다슬기와 돌 밑에 숨은 가재를 보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방개는 물 위를 뱅글뱅글 돌았고, 물웅덩이엔 소금쟁이가 물 위에서 미끄럼 타고 노는 게 신기하였다.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큰 바위가 엉덩이를 물에 담그고 앉아 있었고 그 바위 위에 파랑새가 날아왔다. 동생은 발 주위를 맴도는 물고기를 잡느라 고무신을 집어 들고 헤매었다. 종일토록 그곳 친구들과 함께 물그림자 아롱지는 곳에서 해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해가 기울면 아이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어둠이 젖어 들면 별들이 먼저 돋아났다. 이어 개구리 합창이 울려 퍼지고. 마당에는 멍석을 깔고 모깃불도 피웠다. 하늘엔 견우와 직녀성 사이로 은하수가 흐르고 북두칠성이 밝게 빛났다. 동생과 나란히 누워 하늘에 하얗게 돋아난 별들을 바라보고 별자리 찾기를 하고 있으면 사람 사이로 반딧불이도 날아들었다. 형광색을 잡으려는 아이들의 소리가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그때는 그 소리가 가장 소란스럽게 들렸었다. 할머니는 손자 몸에 모기가 붙을까 염려하며 부채질하셨고 견우와 직녀성의 전설도 얘기해주셨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밤하늘에 사선을 그으며 반짝이던 반딧불이의 군무가 보이지 않는다. 은하수도 보이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옛날 생각에 잡혀 헤매던 중에 비행기가 하강한다는 안내 말이 흘러나온다. 눈을 번쩍 뜨고 동그란 창을 넘겨다봤다. 밤이라 먼지인지 안개인지 불빛이 아주 흐리다.

손자가 달려와 품에 안긴다. 보는 순간 나도 동심에 빠져든다. 유해한 pvc 소재로 만든 장난감을 늘 가지고 노는 손자가 안타깝다. 할머니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놀이공원이며 수영장이며 돌아다녔다. 인위적인 것들이라 그런지 쉬 피곤했다. 내가 사는 남쪽에 비해 미세먼지는 또 어찌나 심한지 숨이 가빴다. 다음엔 할머니 집에서 꼭 만나자고 손가락을 걸며 헤어졌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서는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고열에 기침이 매우 심해졌다. 몸살이려니 했으나 견디지 못해 병원에 실려 갔다. 의사 말씀이 “폐렴입니다.” 한다. 대기오염에 내가 잡혔다는 생각이 든다. 꼬박 한 달을 넘기고 퇴원 했다. 힘든 기분은 여전하다. 기운이 많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에 무서운 바이러스가 생겨나서 전 세계가 병들고 있다. 

그 많던 물고기와 다슬기 등은 어디로 갔을까. 반딧불이의 숨도 우리가 막았구나 싶다. 오염은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생물의 다양성을 위협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었다. 내 어릴 적 그곳은 지금 관광지가 되어 식당이 줄을 이었다. 세제로 오염된 물은 귀한 생명체들을 몰아내고 말았다. 잠자리도 드물고 메뚜기도 잘 보이지 않는다. 유해한 모기만 득실거린다. 이제 그 자리엔 어디서 왔는지 모를 키 큰 갈대가 대신하고 있다. 내가 할머니 집을 찾아갔듯이 내게도 손자가 오면 선물하고 싶었던 그곳의 환경이 그립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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