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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박주희] 씨앗 하나약력) 중고교 사회과 교사 역임/ 2020<수필과 비평> 등단/계룡수필문학회 회원/독서 및 글쓰기 수업

 

화려한 선홍빛에 눈길이 멈췄다. 햇살에 비치는 자태가 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우아함과 향기로움이 묻어나는 꽃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한동안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콩꼬투리처럼 그 속에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있다. 씨앗이다. 단풍나무의 씨앗이다. 꽃이라는 착각이 들 만큼 묘한 매력을 지닌 씨앗을 다시 한 번 세심히 살펴본다. 씨앗이라면 자신의 자손을 멀리 퍼트릴 방안이 있을 터인데, 달고 맛있는 과육이 없다. 바람결에 쉽게 날아갈 수 있는 솜털도 없다.

씨앗 하나를 조심스레 뜯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만지면 부스러질 듯 얇고, 길쭉한 타원형을 그리고 있다. 두 장이 쌍을 이루어 나란히 붙어있는 모습은 곤충의 날개를 연상케 한다. 바람만 잘 받는다면 가을 들판을 수놓는 고추잠자리들처럼 멀리까지도 날아갈 수 있을 듯하다. 관상용 꽃이 아닌 씨앗에게 주어진 임무. 종족 번식의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단풍나무의 씨앗처럼 나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선한 눈매와 훤칠한 키. 비교적 준수한 외모 덕분에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서 좋은 인상을 준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호감을 갖고 이야기를 먼저 건네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만남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도 그럭저럭 지나갔다. 이제 곧 닥쳐올 시간은 나를 막다른 골목길로 내모는 듯하다. 벗어나려면 수고로움을 감내하더라도 되돌아 나와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나를 포장했다. 자신감이 넘치고 유쾌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진짜 꽃이 될 수는 없었다. 첫인상에 비해 부족함이 많은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하는 듯 돌아섰다. 어긋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긴장감과 부담감은 커져갔다. 멀어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볼 때면 내 모습은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꽃이 아닌 모습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 사람들을 멀리하기도 했다. 목소리는 작아졌고 작은 떨림마저 섞여 버렸다. 사람들을 원망하며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점점 움츠러들었다. 골목길의 어둠은 어느새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사귐이 서툴렀던 것일까. 부족한 나를 인정하지 못해서일까.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풍나무 씨앗을 조심스레 손바닥 위에 다시 올려본다. 내가 씨앗이라면, 씨앗처럼 생겼다면, 그렇게 생긴 이유가 있을 터이다. 내 안의 나를 천천히 다독여 보았다. 자신감은 없지만 배려심이 있다. 지루하지만 차분함이 있다. 어리석지만 선함이 있다. 답답하지만 인내심과 끈기가 있다. 소극적이지만 신중함이 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이 아닌 내가 가진 본질적인 모습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단풍나무의 씨앗처럼 나에게도 주어진 임무가 있을 것이다. 꽃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단풍나무의 씨앗들은 모태에서 멀리 떠날수록 햇빛과 양분을 충분히 받아 큰 나무로 자랄 가능성이 있다. 바람이 없으면 멀리 날아가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멀리 날아가기 위해 떨어지는 순간부터 일 초에 서른 번 정도는 돌아야 하는 것이 숙명이다. 한 줌의 바람이라도 흘리지 않도록 몸을 흔들어대며 아껴야 한다. 기다리던 바람을 만나지 못하면 큰 나무 아래에서 싹을 틔우지 못하거나 설혹 싹이 돋았다 해도 보드기로 생을 마감하기 십상이다.

한참 들여다보던 씨앗의 타원형이 움직이며 내 얼굴로 바뀐다. 설렘과 욕심이 가라앉으며 빙긋이 웃고 있다. 꽃이 아니어도 좋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씨앗이라도 좋다. 어쩌면 일 초에 서른 번을 돌면서 그 가치를 빛내고 있는 씨앗이라는 게 행복할지도 모른다. 운 좋게 바람을 잘 만나서 멀리 날아가 큰 단풍나무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나뭇잎이 곱게 물들 때 씨앗으로 태어나, 바람과 함께 여행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마음 설레는 봄기운이 만발할 때, 단풍나무 가까이 내려앉아 작은 싹을 틔우고 주변의 나무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으로도 족하다. 있는 모습 그대로 편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인정하고 사랑하면서 지내고 싶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를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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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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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양리꽃남방 2023-03-16 22:24:12

    오후에 볕좋은 창가에 앉아 읽으면 좋을 글입니다. 음악을 틀어 놓고 낭송으로 들으면 더욱 좋을 것 같구요. 글은 놀랍도록 글쓴이를 닮는다는 말이 참인가 봅니다. 잔잔한 여운 담아갑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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