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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거제시조選-218」김현길 '낮달 보며 불 쬐기

   「금요거제시조選-218」

   낮달 보며 불 쬐기

 

 



 

 


    김 현 길

   으스스
   감기 기운
   야외 솥에 물 붓는다
   모닥불에 살찐다는
   옛말이 생각이나
   희멀건
   낮달을 바라보며
   융구릉불 지핀다.

   아무도
   오지 않는
   산밑 외 따른 집
   어슬녘 뒤숲에는
   깃을 찾는 산비둘기
   외로워
   솥이 흐느끼고
   능선 넘어 별이 뜬다.

시인상세프로필
▲김현길
1956년 거제 둔덕 출생/진주교대 대학원 졸/2005년 시사문단 시 등단/2013년 수필시대 수필 등단/2014년 현대시조 시조 등단/한국문협회원. 경남문협회원. 국제펜클럽회원/거제시조문학회 직전회장/시집:「홍포예찬」「두고 온 정원」「나의 전생은 책사」/시조집 : 「육순의 마마보이」 「봄날의 뒤란」/수필집 : 「비에젖은 편지」/장편소설 : 「임 그리워 우니다니」

◎중독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속도에 중독되었다. 속도가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차근차근 쌓고 익히는 과정의 즐거움은 실종된 지 오래다. 우리는 목표점에 무조건 가장 빨리 도착해야 하고 1등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짐승은 달리고, 인간은 걷는다. 이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걷지 않는다. 자동차가 나오고 나서 걷기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나오자, 인간은 걸어 다닐 때보다 더 바빠졌고 비행기가 나오자, 삶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편리한 기계가 나올 때마다 인간의 삶은 더욱 기계에 얽매이게 되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초나라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채소밭에서 일하는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굴을 파서 만든 우물에 내려가 항아리에 물을 길은 뒤에 다시 올라와 밭에 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끙끙거리면서 애를 쓰고 있었지만, 효과는 매우 적었다. 자공이 그걸 보고 한마디 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이랑의 밭에도 물을 줄 수 있습니다. 힘을 별로 안 들이고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어르신도 한 번 기계를 써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들어 자공을 힐끗 쳐다보고는 물었다.
 “어떻게 한다는 말이요”
 “나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기계인데 뒤쪽은 무겁고 앞쪽은 가볍습니다. 그것으로 물을 푸면 빠르기가 마치 물이 끓어 넘치는 것 같습니다. 흔히 두레박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노인은 성난 듯 낯빛을 붉혔다가 이내 바뀌어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우리 스승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소.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있게 되고, 기계를 써본 자는 반드시 기계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법이라오. 기계에 사로잡히면 뭔가를 꾀하려는 마음이 들어서 순수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하면 정서가 불안해진다오. 정서가 불안한 사람에게는 도가 깃들지 않는 법이라오. 내가 두레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도를 거스르는 게 부끄러워서 쓰지 않을 뿐이오.” 이 말에 자공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계가 있으면 기계를 쓸 일이 생기고, 기계를 쓰게 되면 기계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즉 자동차가 있으면 자연히 자동차를 탈 일이 생기고, 자동차를 타게 되면 자동차가 없으면 못 살게 된다. 컴퓨터가 나오니 컴퓨터 없이 살 수 없듯이 이제는 핸드폰이 없으면 못사는 세상이 되었다. 기계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위의 자공 이야기는 《장자》 <천지편(天地篇)>에 나오는 우화이다. 장자는 아주 먼 옛날에 이미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을 부리게 될 것임을 내다본 셈이니 장자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닫힘 버튼이 원래의 모양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닳아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심지어는 뭉개져 있는 것도 많다. 반면에 열림 버튼은 처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선 가려고 하는 층을 누른 후에,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닫힘 버튼으로 향한다. 수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눌러대니 원래의 형태를 유지할 재간이 없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데는 불과 몇 초 걸리지 않는다. 그 몇 초를 기다리지 못하고 닫힘 버튼을 눌러대는 것일까. 우리는 몇 초를 참는 여유도 알게 모르게 잃어버린 것이다. 속도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기다림 만큼 힘든 것도 없다.

     누르고 기다리면 저절로 닫히는 문 
그 문은 엘리베이터 문이다. 가려는 층을 누른 후에 몇 초만 기다리면 저절로 문은 닫히건만 손가락은 곧장 닫힘 버튼으로 향하누나. 그리곤 사정없이 누르고 심지어는 닫히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손톱 끝으로 반복해서 신경질적으로 누르는 사람도 있더라. 수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닫힘 버튼을 누르고 긁어대니까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수밖에, 여유를 잃은 부끄러움에

     망가진 닫힘 버튼에 눈길 주지 못한다.
        -拙詩, ‘망가진 닫힘 버튼’, 전문

 1843년에 증기기관차를 처음 타 본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는 말을 남겼다. 당시의 기차는 시속 40㎞ 정도 불과 했지만, 시속 12㎞ 남짓한 마차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빠르게 느껴졌다. 하이네는 전율과 공포를 느낀 나머지 경치를 구경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철도의 빠른 속도는 하이네에게 길가의 꽃이나 나무 같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앗아가 버렸다. 엘리베이터 문은 보통 7초 정도 열려있도록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 7초를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기계라는 괴물에 지배당하고 있는 인간, 속도에 중독된 지도 모른 채 불행을 향해 그 속도를 더하고 있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능곡이성보시조시인계간현대시조발행인

《감상》
시조 작품 <낮달 보며 불 쬐기>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산 아래 외딴집에서 희멀건 낮달을 바라며 융구릉불을 지피는 외로운 심사를 2수 연작으로 읊은 김현길 시인의 작품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맹상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국시대 제나라 왕족인 맹상군은 사군자 (제, 맹상군 · 조, 평원군 · 위, 신릉군 · 초, 춘신군)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식객이 3천명이 넘었다. 심지어 도둑까지도 사귀어 위기를 당할 때에 그들의 도움으로 탈출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계명구도’라는 고사성어도 전해진다. 특히 식객 풍환과의 만남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맹상군은 제나라 재상으로 민왕을 모시다가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왕이 경계하여 쫓겨났다. 그러자 3천여 명의 식객도 흩어져 풍환만 남게 되었다.

 어느 날 맹상군이 풍환의 기지로 복직하게 되자 식객이 다시 몰려들었다. 이에 맹상군은 과거 일을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풍환은 ‘부귀다사 빈천과우(富貴多士 貧賤寡友) 즉, ‘부귀하면 친구가 많고 빈천하면 친구가 떠나는 것은 세상의 섭리’다 말하며 그들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침 저자에 사람이 들끊는 것은 아침 저자가 구경거리가 아니라 살 물건이 많아 사람들이 찾는 것이고, 파시에 사람이 없는 것은 파시에 시장이 볼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살 물건이 없기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다고 했다. 풍환의 말은 천만번 맞는 말이다. 그래서 명심보감 성심편에도 빈거요시무상식(貧居鬧市無相識) 부주심산유원친(富住深山有遠親)이라 했다. 가난하게 살면 시끄러운 시장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고, 부유하게 살면 깊은 신속까지도 찾아오는 친한이가 있느리라. ‘鬧’자는 시끄러울 '요'자다. 문안에 저자가 있으니 시끄러울 수밖에. 시장통에 돈 없는 사람이 서 있으면 모두가 외면을 한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치면 국밥이라도 사달랄까 싶어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밥 사주고 술 사주는 사람에게는 따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 주위에는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늦은 시간에도 부르면 달려가는 친형제보다도 더 친하다. 그러나 위급한 지경에 처하면, 재산이 모두 날아가고 빈털터리가 되면, 그 많은 친구들은 속절없이 떠난다. 이것이 세상인심이요 인지상정이다. 
  
 감기가 돈 떨어진 줄 어찌 아는지 시도 때도 없이 엉겨 붙는다. 모닥불에 살찐다는 옛말이 생각나서 감기 기운을 떨치려 야외에 놓인 솥에다 물을 붓고 융구릉불을 지피는데 희멀건 낮달이 보였다. 궁끼가 가득한 터라 보이는 낮달도 희멀건 할 수밖에. 융구릉불은 사전에도 없는 불로, 활활 타는 장작불이 아니라 손쬐기에 알맞은 융글융글 이는 불을 일컫는 거제 둔덕 지방의 사투리인 것 같다. 시인이 돈 떨어진 줄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누가 오리오. 거기다 아내까지 평택으로 돈 벌러 갔으니 (금요거제시조선 - 147 ‘평택으로 돈벌로 간 아내’ 참조) 아무도 없을 수 밖에. 해진 어슬녘에 뒤숲에는 산비둘기의 깃을 찾는 소리만 들리누나. 그 소리가 시인의 귀에는 솥이 외로워 흐느끼는 소리로 들린다. 멍해진 눈길은 어느 사이에 능선 넘어 뜨는 별에게로 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 인격이고 나발이고 아무 소용이 없다. 시인에다 시조시인, 수필가에다 소설가가 무슨소용. 아무도 오지 않는 산 아래 외따른 집에 시인이 능선 넘어 뜬 별을 바라 보고 있구나. 그러나 그 눈빛은 살아 있을진저.
―능곡 시조 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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