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왼쪽
오른쪽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칼럼 이금숙 여행이야기
[기고:이금숙 문화칼럼] '둔덕에 동랑의 예술혼 잇는 예술고등학교 유치를'이금숙; 시인/세계항공여행사 대표/전 동랑청마기념사업회 회장

지난 4월 12일은 동랑 타계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청마기념사업회 임원진이 안산 서울 예술대학교 캠퍼스를 찾았을 때 그곳에는 동랑을 추모하는 작은 전시회가 교정에서 열리고 있었다. 앝으막한 산기슭에 자리잡은 캠퍼스 전경은 아담하고 정겨웠다. 우리를 안내한 총장님은 유덕형 명예이사장님의 장남이셨다. 갈색눈의 이방인을 닮은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교정 곳곳을 소개하고 이날 개최되는 전시회에 대한 설명까지 소상하게 알려주셨다.

교정 곳곳 현수막에는 이 학교를 거쳐간 수많은 연예 예술인들의 얼굴들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학교를 빛내 준 대한민국의 대표 얼굴들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별 중의 별들인 그들의 사진에서 나는 서울예술대학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올해 이 대학교 입시 경쟁률이 28대 1이었다고 하니 대학교 문부터 연예인이 되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경쟁이 어떠한지를 알 것만 같았다.

전시회장 안에는 동랑의 일대기와 그의 작품 소개 및 활동 내용들이 벽면 가득 소개되어 있었다. 한때는 친일 행적으로 인해 동랑의 ‘동’자도 꺼내기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한국 연극계에서나 예술계에서 동랑의 지나온 삶에 대해 과는 과대로 표기하고 공은 공대로 표기해 동랑이 한국 연극계나 문단사에 끼친 공적에 대해서 재조명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몇 년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고향인 거제에서도 유족들과 문중에서 조심스레 동랑의 예술혼을 기리는 사업 및 묘소 이장문제 등을 검토하고 있다. 유명한 서정주 시인의 문학관을 방문해 보면 미당의 친일행적은 행적대로 전시관에 표기하고 문학적 업적은 업적대로 표기, 공과 과를 분명하게 알려줌으로써 많은 문인들과 관광객들이 스스럼 없이 문학관을 방문하고 시인의 예술혼을 기리고 있다.

청마 유치환 시인의 친형이자 한국 연극계의 거목인 동랑 유치진을 기억하는 거제 시민들은 많지 않다. 만약, 둔덕 지전당골 청마의 묘소옆으로 동랑의 유해를 이장하면 매년 벽제 공원묘지에서 추모행사를 하던 대한민국 연극계의 크고 작은 별들이 거제로 모일 것이고 지전당골 청마시비공원은 전국의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찾는 유명한 곳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에 더해 현재 경남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학교(연극)를 거제도 둔덕중학교 인근에 세워 서울예술대학교와 손잡고 운영하는 예술고등학교를 유치한다면 둔덕은 청마기념관, 거제시립박물관, 폐왕성, 묘소등과 함께 거제 예술의 새로운 거점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전라북도 고창에 버려진 폐교를 동국대에서 미당 문학관을 만들고 난 뒤 마을 전제가 관광객들로 생활권이 바뀌었다는 것은 둔덕도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청마 기념관 건립 당시 ‘누가 청마의 무덤에 돌을 던지랴’라는 칼럼을 쓰고 난 뒤 청마의 친일문제를 논하던 사람들의 댓글이 47개나 달린 것을 보고 ‘참 무서운 세상이구나’ 라고 반문한 적이 있었지만, 동랑의 한국 연극사에 끼친 공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크고 대단하다. 바램이 있다면 10년 후 쯤 세상이 변해 거제도에서 동랑을 추모하는 연극제와 많은 예술행사들이 둔덕에서 개최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거제의 청마기념사업회도 이제는 동랑의 제호를 붙여 동랑 청마기념사업회로 예전의 명칭을 되찾아 조심스럽지만 동랑을 알리는 사업에 적극 동참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동랑 유치진-한국 예술의 큰 별
                     예술가로서의 동랑 유치진
연기자
동랑이 연기자로서 처음 무대에 선 것은 일본유학 시절 도쿄의 대학생들이 조직한 ‘근대극장’이라는 아마추어 학생극단에서였다. 동랑은 그곳에서 단역으로 무대에 섰다. 고골리의 『검찰관』과 『공기만두』에 출연한 것이다. 하지만 동랑은 무대에 서는 것이 충분히 매력적이고 흥분된 일이지만, 자신의 적성과는 맞지 않음을 느꼈다. 그 후 동랑은 아나키스트 극단인 ‘해방극장’에 들어가 그곳에서도 단역 배우를 했다. 한번은 쓰키지(築地) 소극장에서 공연한 이탈리아 극작가의 작품에 출연했는데, 아나키스트인 주인공이 저항을 계속하다 결국 처형당하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은 저항적 성격이 강한 탓에 일본 정부의 관여로 도중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본유학에서 귀국한 후 동랑이 또 다시 무대에 선 것은 극예술연구회의 창립공연작품인 고골리의 『검찰관』이었다. 2개월 동안 연습해 조선극장 무대에 섰으나 이번에도 역시 연기자로서 소질이 없음을 다시 느꼈다. 동랑은 자신이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 감성이 풍부해야 하는 연기자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극예술연구회에서 차기 공연 작품을 찾다가 동랑은 버나드 쇼가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작품을 공연하기로 했다. 극예술연구회 회원들에게 버나드 쇼는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사회극인 『무기와 인간』으로 결정되었고, 조선극장에서 막이 올랐다. 동랑은 이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키가 크고 마른데다 코도 오뚝해서 분장해 놓으면 서양인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동랑은 의외로 연기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결코 연기자가 되지 않기로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극작가
동랑은 대학 시절 습작으로 써놓았던 희곡 『토막』을 「문예월간(文藝月刊)」에 발표해 극작가로 등단했으며34) 극작가로서 『토막(1931)』에서부터 『한강은 흐른다』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에 걸쳐 총 40여 편의 희곡을 남겼다.35) 동랑은 『토막』의 탄생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집 한약방에 찾아오는 병들고 초췌한 농어민들을 통해 나는 통영에 많이 살고 있던 지주를 대단히 미워하였다. 이러한 미움은 곧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빼앗기고 짓눌리고 버림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묘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내 처녀작 『토막』도 그래서 탄생한 것이다.36)

『토막』은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참상을 가식 없이 묘사한 작품으로 일종의 비극적 빈궁 문학이다. 동랑은 『토막』을 완벽하게 공연하기 위해 『토막』의 무대와 비슷한 마포의 빈민굴을 제작진과 함께 답사해 무대를 만들었고, 당시 작품을 관람한 관중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우는 사람, 분노하는 사람, 환호하는 관중이 뒤얽혀 경성공회당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부 격정적인 관객은 분장실로 뛰어 들어와 동랑과 연출자 홍해성을 헹가래쳤고, 조금 뒤에는 춘원 이광수까지 찾아와 이 땅에 비로소 희곡 문학이 탄생되었다며 격려해 주었다.37)

두 번째 작품은 『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농민이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고, 상업극단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래서 동랑은 농민극만이 연극을 나락의 늪에서 건져내는 유일한 길이라 믿고, 노동자들의 아픔과 분노를 표현한 『빈민가』 같은 희곡을 썼다. 『빈민가』는 동랑이 극예술 연구를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뒤 쓴 작품이다. 재동경 조선인극단인 삼일극장(三一劇場)에 『빈민가』를 제공해 스키지(築地) 소극장에서 최초로 공연했다. 또 다른 작품인 『소』도 일본에 있을 때 쓴 작품으로, ‘동경학생예술좌’ 창립공연 레퍼토리로 공연된 작품이기도 하다.38) 『토막』 『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 『소』 등으로 이어지는 농촌 소재의 사실주의 희곡들은 우리나라 희곡사의 금자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동랑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시대정신을 일깨우고자 사극(史劇)을 많이 썼다. 사극에 대한 동랑의 생각은 ‘과거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오늘과 잇닿아 있다. 오늘은 과거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과거를 말하는 것은 곧 현재를 말하는 것이며 현재를 음미시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동랑은 국립극장 개관공연작품으로 『원술랑』을 택했다. 신라의 패망을 통해 실국(失國)의 아픔을 표현한 『마의태자』, 광복 직후 미·소 양국의 군정을 한사군 시대의 상황에 비교 설정한 『자명고』와 『별』, 3·1독립운동을 다룬 『조국』도 같은 맥락에서 쓰였다.

동랑은 부산 피난 시절에도 작품을 썼다. 『순동이』 『처용의 노래』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가야금』 『장벽』 『통곡』 등이 이때 집필된 것으로, 『통곡』의 경우 동랑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 북한군 남침의 참상을 기록해 놓자는 의도에서 집필한 것이기도 하다.

연출가
동랑은 카이저의 『우정(1933)』 연출을 시작으로 1971년 드라마센터에서 자신의 연출 40년을 기리는 마지막 작품인 『사랑을 내기에 걸고(1971)』까지 총 100여 편의 작품을 연출했다.39)

극예술연구회의 경우 창작극과 번역극을 함께 무대에 올렸는데, 이때 창작극으로 동랑의 『토막』을 택했고, 번역극으로는 안톤 체홉의 『기념제』와 카이저의 『우정』을 택했다. 이중 동랑은 『우정』을 처녀 연출했다. 동랑의 처녀 희곡과 처녀 연출이 동시에 한 무대에 오른 것이다.

동랑의 처녀 연출은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당시 경성방송국을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또 동랑은 극예술연구회 공연에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피란델로의 『바보』, 자신의 창작극인 『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을 연출했다.40) 동랑은 무엇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출하면서 작품분석을 통해 희곡 구성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연출을 하면서 공부가 부족함을 느꼈고, 연출 수업을 받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랑은 국립극장장으로 재직하면서 『뇌우』를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는 1만 명만 동원해도 대성공작으로 평가되던 시기였는데, 『뇌우』의 경우 보름 동안 7만 5천 명의 관객을 동원해 화제가 되었다. 서울 인구가 고작 40만 명이었으니 서울 인구의 약 1/6이 『뇌우』를 관람한 것이다. 『뇌우』의 성공요인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동랑의 연출이었고, 두 번째는 당대 최고 배우들의 빼어난 앙상블이었다. 동랑의 연출은 치밀하고 혹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배우들이 피로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반복연습을 시키곤 했다.41) 동랑은 공연이 연습에 의해 숙달되는 무대적 행위라 믿었고, 희곡의 무대적 가변성을 폭넓게 인정한 연출가였다. 아울러 독회(讀會, reading)에 상당한 공을 들여 연습시간의 2/3 가량을 읽기에 할애하는 연출가이기도 했다.42)

예술경영자로서의 동랑
동랑의 가장 큰 꿈 중 하나는 극장을 갖는 것이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많은 극단들이 일본인들이 세운 영화관을 빌려 공연했는데, 당시 일본인 흥행 모리배들로부터 겪은 수모와 착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동랑은 국립극장 설립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한국무대예술원을 동원해 전국무대예술대회를 개최했으며 그곳에서 국립극장 설립을 정부에 건의했다. 국립극장 설립추진은 수백 년 간 이어온 우리 민족극의 확립을 위한 동랑의 숙원사업이었다. 동랑의 이러한 노력으로 신정부에서는 국립극장 설립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고, 결국 아시아 최초로 국립극장 설치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서울 충정로에 있는 부민관이 공식극장으로 지정되었다.43)

국립극장이 개관하자 동랑은 초대 국립극장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동랑은 ‘민족’이라는 커다란 공동체를 더욱 생각하면서 국립극장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군의 오락시설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극장시설은 형편없었다. 극단뿐만 아니라 교향악단, 합창단, 국악단, 무용단, 오페라단 등의 공연까지 고려하기 위해서는 무대 기능을 극대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1억 원이라는 돈을 융자 받아 극장 개보수에 착수할 수 있었다.

국립극장 개관작품으로는 『원술랑(허석, 이화삼 공동연출)』이 채택되었다. 당시 예술인들은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인식시키고, 애국자들의 참모습을 형상화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을 우선시했다. 『원술랑』은 그러한 분위기와 국립극단의 첫 레퍼토리로 가장 잘 들어맞는 작품이었다.44) 국립극장의 1천 석이 넘는 3층짜리 좌석은 연일 초만원의 관객으로 통로까지 메워졌다. 열흘을 공연했지만 관객의 열기가 식지 않아 5일간 연장공연을 해야 했으며 총 6만여 명이 구경을 와 그야말로 해방 직후 최대 관객동원이라 할 수 있었다.45)

국립극장의 두 번째 작품은 『뇌우(조우 작, 유치진 연출)』였다. 이 공연 역시 관객에게 큰 호평을 받았는데, 공연이 있는 날이면 극장 앞에 자동차가 빼곡히 들어서는 등 7만 5천 명이라는 관객 수는 『원술랑』을 뛰어넘었다. 당시 “이 연극을 보지 않고는 문화인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할 만큼 지식인층의 호응도 대단했다.46) 『뇌우』가 관객들의 격찬을 받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무대장치를 들 수 있다. 『뇌우』의 무대장치는 무대미술가로 유명한 김정환이 맡아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무대 주변에 파이프를 설치해 비를 흘러내리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실감나게 천둥소리가 더해져 관객들은 집에 갈 때 우산 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다. 이때 천둥소리를 낸 것은 차범석이었는데, 연출자 동랑은 차범석에게 공사판에서 쓰는 함석판이 발광을 하고 2초 후에 소리를 내도록 연출을 주문했다. 빛이 먼저 보이고 소리가 나중에 들리는 물리적 현상까지 신경을 쓴 것이다. 동랑은 그만큼 세심하게 작품을 읽고 합리적으로 작품을 연출했다.47)

*34) 박영정, 『유치진 연극론의 사적 전개』, 태학사, 1997, p.57.
35) 정철, 『한국 근대 연출사』, 연극과인간, 2004, p.123.
36) 유치진, 『동랑 유치진 전집 09』, 서울예대출판부, 1993, p.107.
37) 유치진, 『동랑 유치진 전집 09』, 서울예대출판부, 1993, p.111.
38) 박영정, 『유치진 연극론의 사적 전개』, 태학사, 1997, pp.60~61
39) 정철, 『한국 근대 연출사』, 연극과인간, 2004, p.123.
40) 박영정, 『유치진 연극론의 사적 전개』, 태학사, 1997, pp.57~58.
41) 유민영, 『이해랑 평전』, 태학사, 1999, pp.249~250.
42) 김남석, 『한국의 연출가들』, 살림출판사, 2004, p.16.
43) 유민영, 『인생과 연극의 흔적』, 푸른사상, 2012, p.237.
44)국립중앙극장공연예술박물관, 『공연예술, 시대와 함께 숨쉬다』, 2010, pp.88~89.
45) 유민영, 『이해랑 평전』, 태학사, 1999, p.247.
46) 국립중앙극장 공연예술박물관, 『공연예술, 시대와 함께 숨쉬다』, 2010, p.92.
47) 김남석, 『한국의 연출가들』, 살림출판사, 2004, p.93.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춘광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슬금슬금 2024-05-22 23:09:26

    https://v.daum.net/v/20231029105103271
    온 인생을 불의와 권력 주변에서 따뜻하게 살았으면 잊혀져도 됨   삭제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