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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진 전시89]'1951년 6.25한국전쟁 후 장승포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세브란스병원은 거제장승포 외에도 원주.청도에서도 진료활동을 했다.

1951년 장승포읍 장승포리 2구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의 모습과 당시 거제도에서 진료활동을 하던 의료진들의 사진이다.

세브란스병원은 서울이 함락한 이후 강원도 원주. 경북 청도에 이어 거제도에서도 구호병원을 세워 의료활동을 계속했다.
<관련기록들>

한국동란을 치루면서 서울역 앞의 세브란스병원 건물은 80% 이상 파괴되었다. 하지만 교수진과 학생들은 거제도, 청도, 원주 등에 새로운 병원들을 설립하였고 동란이 끝나고 옛 세브란스병원 건물은 일부분 복원되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승격되어 신촌캠퍼스로 이전하게 되는 1962년까지 사용하였다.

"60여 년 전 거제도에서 진 빚을 갚습니다." 

 

김애석씨가 지난달 27일 암병원 발전기부금으로 1천만원을 기부했다. 평양에 거주하던 김애석씨는 한국전쟁 당시(당시 15세) 아버지와 함께 이남했고, 피난 중에 부상을 입은 그녀의 아버지는 거제도 장승포에 임시로 마련된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1951년 당시의 입원비는 하루에 쌀 세 홉이었으나,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세 달 여 동안의 입원비를 내지 못하고 퇴원했다. 

김씨는 “평생 갖고 있던 마음의 빚을 더 늦기 전에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60년 세월이 흐른 것에 비하면 약소하다. 세브란스병원이 더욱 발전하고 좋은 일들을 많이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시기의 세브란스 병원 치과
한국전쟁(1950.6.25.)의 발발은 세브란스 의과대학 치과학교실과 세브란스 병원 치과의 역사에서 가장 큰 시련이 되었다. 1·4 후퇴 전까지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는 이동섭과 지헌택만 남아 있었고, 다른 교실원들은 군의관으로 입대하거나 사직한 상태였다.

세브란스 병원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치과에 남아있던 이동섭과 지헌택은 가능한 모든 치과 장비를 차에 싣고, 남는 장비는 부품을 빼서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이동섭은 이 치과 장비들을 가지고 거제도 장승포로 이동하였다. 초등학교 건물을 인수받아 세브란스 구호병원의 부속과로서 치과를 운영하며 진료를 했다.

이 시기에 거제도의 인구는 원주민 10만 명, 함흥, 흥남 철수 작전으로 실려온 피난민 15만명, 포로수용소에 갇힌 포로 10만 명으로 급증하고 있었다. 피난민은 모두 무료로 치료를 해주었는데 필요한 약품과 의료 소모품은 미8군에서 지원해주었으며 병원 직원들의 생활비와 병원 운영에 필요한 다른 비용들은 선교부에서 지원을 받았다.

전후 복구 시기의 세브란스 병원 치과
정전협정(1953.7.27.)이 체결되면서 3년 동안의 긴 전쟁이 끝났다. 한국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였다. 접전 지역의 치과의원들은 전부 파괴되었고, 수원, 인천 지역의 치과의원도 50%의 이재율을 보였다. 남한의 치과의사 피해 상황은 서울 개업의 214명 중 이재율이 80%이며, 실종·사망자는 100명 정도 되었다.

이 해 8월에 세브란스 병원 치과는 서울로 돌아왔다. 다행히 치과 건물은 파괴되지 않았으나, 치과 장비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동섭이 피난을 가면서 어렵게 싣고 간 장비로 진료를 재개할 수 있었다. 이동섭과 지헌택은 다시 진료를 시작하였다. 박용덕은 이 해 9월에 서울로 돌아 왔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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