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도 품앗이가 있다

                                     길 위에서 저자/ 이 정 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까 베란다를 통한 거실에 빗물이 흥건하다. 잠든 사이 소낙비가 한 바탕 지나갔나 보다. 창을 통한 바람이 태풍의 간접적 위력을 발휘하여 읽다 만 책장마저 휭 하니 저 편으로 떠밀어 놓았다. 잠이 오는 줄도 몰랐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잤으니 요즘은 신경이 노인처럼 무뎌져 있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지만 힘이 안 나고 생이란 생이 온통 푸석푸석하다. 누구를 그리워하는 지 무엇을 원하는 지 산다는 것이 늘 이렇다. 때론 힘들고 외롭고 아파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내면을 다스리기 위해 작은 사각 세상과 접촉하려고 컴퓨터 로그인을 한다.
  이미 확인했던 이 메일이지만 다시 읽어봐도 공격성을 띤 편지가 나를 향해 쏘아본다. 감정부터 다스리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내용들이다. 대인 관계에서 다소 소홀했던 우정을 인정하며 답을 쓰다가 시간 내서 만나는 게 좋겠다는 판단으로 이 메일을 덮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참 묘하다. 생텍쥐페러의 어린왕자에서의 어린 왕자는 장미꽃이 세상에서 한 송이만 존재 하는 줄 알았다. 어느 날 담장 아래 수 천 송이의 다른 장미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어린왕자는 다행이도 장미 꽃 중에 자신과 눈 맞춤을 한 꽃은 한 송이밖에 없음을 깨닫고 안도를 한다.
  인간관계란 게 어린왕자의 장미꽃처럼 한 송이만 존재 하는 게 아님을 확인하는 해피엔딩이다. 자신만의 꽃이라 믿었던 그 꽃이 또 다른 사람의 눈에도 예쁘게 띄기 마련이다.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배신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그건 배신이 아니라 스스로가 쳐 놓은 착각이라는 함정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다. 다만 각기 다른 겹겹의 특별한 관계로 다르게 어우러져 살 뿐이다. 그러나 다양하게 얽힌 다원적인 관계가 일상을 견고하게 만드는 길이다. 정서적 함량의 문제를 넘어 빙탄상애로 대인 관계를 엮어 나갈 수밖에 없다. 얼음과 숯은 서로 다르지만 숯불은 얼음을 녹여 물을 만들고 얼음은 숯을 품어서 숯으로 남기니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솔직한 건 좋은 성품이지만 자기주장이 지나치면 부담스럽다. 그 솔직함이란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만 얘기한다. 자신은 뒤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해하라는 얼토당토 않는 주문이 더욱 거슬리고 힘들어 눈물이 난다. 말이란 입으로 뱉어 버리면 그 순간부터는 날아다니는 먼지 같은 것이라 아무데나 달라붙는다. 날카롭게 얘기하면 칼날이 되어 상대편을 해하게 되지만 부드럽고 하면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따뜻해진다.
  좋은 대답을 듣고 싶으면 질문부터 좋게 해야 하는 법이다. 자기 분노 조절이 어려워 따지듯 대들면 결코 좋은 말로 응답해 주지 않는 게 사람 심리다. 배려와 소통이 절실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 문제가 순조롭지 않으니 모두가 외롭다. 공격성 이 메일이야 어떻게든 풀어지겠지만 이 기회에 나 자신의 처세술도 뭔가 올바르지 못한 점을 찾아 되짚을 일이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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