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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윤정희] 소망

                                                         소망

                                                                                                         윤 정 희

  장막에 쌓여서 숨만 쉬며 살고 있다.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있지만 그저 느낌일 뿐 앞도 뒤도 옆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흔들리고 좁은 틈 사이로 햇빛이라도 들어오면 낮이라 여기고 산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 칠 때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한다. 마치 누구에게인가 하소연 하듯이 윙윙 소리 내며 우는 것이 저 소나무로서는 최선의 표현이리라.

지난여름 모처럼 새벽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 동녘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한숨 돌리려고 앉은 자리 바로 밑은 아차 하면 바다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낭떠러지다. 그 아찔한 곳에 서 있는 작지도 않은 소나무 한 그루. 칡넝쿨이 칭칭 감고 있었다. 손바닥 같은 칡잎들은 자기 밑에 깔려 있는 소나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바다 건너 저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아침 바람에 부드럽게 살랑거릴 뿐이다.

적잖은 세월을 살아왔다. 그 속에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 다시는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슬프고 아픈 일에 싸여 절망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나에게 찾아온 아픔도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는 오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어느 스님의 말씀에 ‘힘들고 아플 땐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서 있어라.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마음을 들볶지 마라.’ 하시던 그 명언 같은 말씀이 내 인생에 언제나 큰 위로가 되었다.

이른 아침 칡넝쿨에 휩싸여 있는 소나무를 만나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흡사 인간사와 닮아 있었다. 지난봄까지도 소나무는 제 발밑에 있던 칡넝쿨이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숨통을 죄어올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자기의 불행을 예상이나 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몰아닥친 불행에 몸과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 오직 자신만이 감내해야 된다는 것도 안다. 이 아침 앞뒤도 없이 끝없는 상념으로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이런 저런 일로 가을 한 철은 그 길을 걸을 수가 없었다. 겨울 한가운데 햇살이 좋은 낮 시간에 모처럼 산책길에 나섰다. 여름에 보았던 소나무를 의도적으로 찾았다. 칡잎들은 어느덧 낙엽 되어 떨어지고 줄기만 얼기설기 나무를 감고 있었다. 소나무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헉’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남의 옷은 훌훌 벗어 버렸지만 자신의 옷은 누렇게 퇴색해 볼품없이 되어 버렸다. 누더기처럼 헐은 옷을 걸친 그 소나무는 가지 끝에 몇 잎만 푸른색을 띄고 죽은 듯이 서 있었다. 주위에 있는 많은 소나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독야청청이다. 마치 환자와 같은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어떻게 이겨 낼지 안쓰러울 뿐이다.

저 많은 나무 중에 설령 소나무 한 그루 고사했다고 벼랑이 무너질 염려는 없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 사실을 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둘러보게 만든다. 누구라도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남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듯이 말 못하는 나무지만 그 고통이 내 품으로 전율되어 오는 것 같이 나의 마음도 아팠다. 지난해는 가족들이 건강 문제로 참으로 많은 아픔을 겪었다. 한 해 동안에 너무 여러 가지 고통이 있었기에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불안하고 힘들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방송에서 오십년만의 추위라고 난리법석이다. 옷을 껴입고 껴입어도 냉기는 가시지 않는다. 나이와 건강은 비례하는가. 추위에는 육신도 본분을 잊어버렸는지 활동하기보다 따뜻한 한곳에 머물고 싶을 때가 많아진다. 마치 퇴색한 누런 옷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소나무를 연상케 하면서…….

생물을 소생 시키려고 봄비가 내린다는 우수도 며칠 전에 지나갔다. 자연의 섭리를 비켜갈 수 없는지 날씨가 많이 풀렸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크게 기지개를 켜보자. 저 산 너머 가까이 봄이 오고 있으리라. 활기찬 새봄의 기운을 받아 누렇고 퇴색한 옷은 벗어 버리고 새파랗고 싱싱한 새 옷을 갈아입은 그 소나무를 보고 싶다. 아프고 찌들었던 나의 마음도 편안하고 따뜻한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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