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68]이덕재-'현충일 오후'

[금요거제시조選-68]
'현충일 오후'

이 덕 재

마을회관 어귀에서 공기놀이하는 노파
백발이 성성한데 손놀림은 경쾌하다
천진한 소녀 모습으로 지난 시간 줍고 있다.

도우미가 오지 않는 휴일의 오후여서
무슨 일 있으시냐 웃으며 물었더니
조기(弔旗)를 손짓하시며 눈시울을 붉힌다.

근년의 기억들은 하나 둘 놓으면서
군인 간 오라버니 오는 날은 언제냐며
움켜쥔 공깃돌처럼 남아있는 옛 기억.

◎ 금란(金蘭)·1
우정에 대하여는 전해오는 얘기가 많다. 우정은 산길과 같아서 서로 아끼는 마음이 오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져서 이내 산길은 묻히어 도로 산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속까지 툭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열자(列子)의 탕문편(湯問篇)에 백아절현(伯牙絶絃)의 얘기가 나온다. 춘추시대에 백아라는 거문고의 명수가 있었고, 그 친구인 종자기(鍾子期)는 듣는 명수였다. 두 사람은 마음이 맞는 탄수(彈手)요, 청수(聽手)였지만 불행히도 종자기가 병으로 죽고 말았다. 백아는 금도(琴道)에 정혼을 쏟아 넣어 일세의 명인이라 불리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자기가 죽은 후 두 번 다시 거문고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종자기라는 얻기 어려운 청수를 잃은 바에야 이미 자기의 거문고를 들어 줄만한 상대가 없는 비탄에서 온 것으로 참다운 예술정신을 시사하여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백아파금(伯牙破琴) 혹은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 하고 있다. 지음(知音)이란 말도 여기에서 비롯됐다.우정은 곧 믿음이다. 믿음이 없는 우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자의 믿을 신(信) 자는 사람(人)의 말(言)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말에는 믿음이 실려 있어야 함을 시사하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 옛사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행일치의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그런 사람이고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입이 있다고 하여 아무 말이나 지어내는 것을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다운 품위가 없는 말도 ‘사람의 말’이 되어도 안되겠지만 실현하지 못할 허언을 ‘사람의 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선 눈앞의 이익 때문에 눈이 어두워 ‘사람의 말’로 믿음을 심지 못하면서 말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하다.

송무백열(松茂栢悅)은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말이니 친구의 잘 됨을 시샘하기는커녕 기뻐함을 이른다. 간과 쓸개를 서로 내 보인다는 간담상조(肝膽相照)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숨김없이 친하게 사귄다는 뜻이고, 옛날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서로 사귄 고사에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문자가 생겨나고 문경지교(刎頸之交)는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 사이를 나타내는 말 등, 우정에 관하여 전해지는 성어에는 아름다운 사연이 담겨져 있다.금란지교(金蘭之交)라는 말이 있다. 친구사이가 너무 친밀하여 그 사귐이 쇠보다 굳고 그 향기가 난과 같다는 말이며, 친구사이의 사귐이 굳은 것을 금란지계(金蘭之契)라고 일컫고 있다.

사람도 친구 되어
한 십 년 어울려야

열 길 물속보다 깊은
그 속을 연다더라

아무렴 깊디깊은 속
속내를 보이고말고.

        사람이 난에다가
        정붙이고 사는 것도

        몇 년 묵은 된장 같은
        난우를 찾는 것도

        이제사 내 알 것 같다
        사람 사는 재미란 걸.
     -졸시, ‘사람 사는 재미’, 전문-

금란지교는 당나라 대홍정(戴洪正)이라는 사람이 밀우를 사귈 때 마다 그것을 빨간 표지의 장부에 기록하고 향을 피워 조상에 고하였다고 하는데, 그 장부를 ‘금란부(金蘭簿)’라 이름 붙인 고사에서 연유한 것이다.(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현대시조 발행인

시조작품 〈현충일 오후〉는 향리에서 이장을 맡고 있는 이덕재 시인이 마을 주민이며 치매 환자인 노파의 안스런 모습을 3수 연작으로 읊은 서정시조다.

다음은 시인의 ‘시작노트’다.
“현충일 해질녘, 새벽에 내려단 조기를 올리려고 마을회관에 갔다. 옆집 할머니 홀로 공기놀이를 하고 계셨다. 경쾌한 손놀림에 소녀 같은 눈빛이 요양보호사 도움을 받는 치매환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뜻밖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했더니 국깃대를 가리키며 혼잣말로 “오빠는 언제 오나.......” 하셨다. 바깥어른 돌아가시고 칠팔 년 사이 가벼웠던 치매증세가 조금씩 심해지는 것 같다. 최근의 일은 잠깐잠깐 잊으시면서도 현충일 조기를 보며 70년 전 전쟁 때를 기억 하시니.

알츠하이머는 치매의 대용어로 쓰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알츠하이머병은 치매의 원인이 되는 여러 질병 중의 하나로 전체 치매 환자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알츠하이머는 독일 신경병리학자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 (Alois Alzheimer,1864-1915)박사에 의해 1906년에 최초로 환자가 보고되었기에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치매(癡呆)는 라틴어 어원인‘dementia’의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갖다 쓴 것이다. ‘어리석을 치(癡)’에 ‘어리석을 매(呆)’로 된 치매는 그 뜻을 알고 보면 쓰기가 민망하다. 그래서 ‘백심증(白心症)’이란 용어를 제안 하는 이도 있다. 아무생각이 나지 않을 때 ‘머리가 하얘졌다’는 말을 하기에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이라는 치매보다는 백심증이 인간미가 느껴지는 말이다. 노망(老妄)이니 망령(妄靈)도 부정적인 인상이 굳어져 있지만 치매보다는 인간적이다.

春秋戰國때의 일이다. 화자(華子)라는 사람이 나이 오십인데 무엇이나 잊어버리는 기이한 병에 걸렸다. 자신이 누군지, 가족, 사는 곳, 이웃 등 하나 같이 잊어 버렸다. 가족들이 약이란 약, 수단이란 수단은 다 써 보았지만 도무지 낫지를 않았다. 사방으로 의사를 구하였더니 노국(魯國)의 어떤 의사가 소식을 듣고 와서 치료시킬 자신이 있다 하여 그에게 치료를 맡기자 얼마 후에 완치 되었다. 그러니 전 가족이 신기하게 여기고 의사를 칙사 대접하듯 하였다. 제 정신이 돌아온 화자는 웬 낯선 사람을 집안 식구 모두가 굉장한 대접을 하는 것이 의아하여 가족에게 물으매 “당신의 병을 고친 명의 이십니다”라고 의사를 소개했다.

화자는 “내가 언제 병이 들었나”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전후 이야기를 다 하여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던 화자는 벌컥 화를 내면서 “내가 모처럼 세상사를 잊고 편하게 사는 것을 가만두지 않고 또 고생을 하라고 남의 극락경을 깨트려?” 하면서 처자를 야단치고 의사를 쫒아 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잊을 수만 있다면 만사를 잊고 사는 것도 편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 마을회관 어귀에서 공기놀이하는 노파 / 그 손놀림이 경쾌하다. 백발이 성성한데도 그 모습은 천진한 소녀 같다. 줍는 것은 공깃돌이 아니라 지난 시간이었다./ 천진한 소녀 모습으로 지난 시간 줍고 있다/는 종장, 노파와 공깃돌, 시간 줍기의 연결고리가 튼튼하여 크단한 감동을 준다. 요양보호사가 휴일에는 오지 않는 모양이다. 무슨 일 있으시냐니 조기를 손짓하시며 붉히는 눈시울이다./ 근년의 기억들은 하나 둘 놓으면서 /도 지난 세월의 기억은 선명하다. / 군인 간 오라버니 오는 날은 언제냐며 / 남아있는 옛 기억 /은 하나도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누가 나에겐 치매와 같은 불행이 닥치지 않는다고 장담하겠는가. 〈현충일 오후〉를 감상하자니 뭔지 모를 서글픔이 새끼 물오리가 일군 물살처럼 잔잔히 밀려온다.凡事를 놓치지 않는 시인의 혜안에 찬사를 보낸다.<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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