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85」

     잠자리                 

        김 용 호

가만히 잠 잔다고 잠자리라 부르겠지
어릴 적 우리들은 고개를 짤레짤레
날기를 짤레로 날아 짤레비라 불렀다.

蜻蛉은 한자말로 청마가 좋아해서
지전당골 한 켠에다 정자를 세웠는데
짤레비 발치에 날고 그림같은 蜻蛉亭.

◎억새밭에서의 소고(小考)
이상 기온 탓인지 근간엔 일교차가 심하다. 사계절이 점차 여름과 겨울 두 계절로 변해 간단다. 하지만 올가을은 좀 오래갔으면 한다. 길어진 겨울나기가 힘겹기도 하려니와 코로나19로 지친 나머지 왠지 가을을 오랫동안 붙들어 두고 싶어서다. 인근의 묵정밭에 드문드문 억새가 보였는데 오늘에사 보니 제법 어우러졌다. 묵정밭의 억새는 마치 점령군처럼 그 위세가 당당하건만 여태 이를 간과한 것을 보면 내 삶이 주변을 살필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버거운가 싶어 서글퍼진다. 억새를 거제에서는 새피기라 부른다. 새피기를 두고는 어릴 적이 떠오른다. 고향 마을에 새피기란 별명의 아저씨 한 분이 계셨다. 40대 나이에 머리가 온통 하얗게 새어 별명이 새피기가 된 것이다. 어느 사이에 나도 머리가 새피기가 되어 거울을 볼 적마다 씁쓸하다. 머리칼을 풀어헤친 억새가 발길을 유혹한다. 하얀 솜털이 바람결 따라 고갯짓하는 억새 곁에 누워 본다. 시리도록 마알간 하늘을 보노라니 가슴 한켠에 무언지 모를 덩어리 하나가 뭉클 치솟아 목이 멘다.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픔이 덩어리진 것이리라.

        정연한 질서 속에
        저승길을 비질하는
       
        뜻 모를 연민들이
        불차처럼 달려들어

        저녁 답 해넘이의 불길
        억새밭은 타고 있다.

 
        영혼이 부대끼면
        현란한 춤이 될까
       
        억새의 잉걸불에
        세상 근심 부려 볼까

        모진 연(緣) 바람 붙안고
        등신불로 태어날까.

        拙時. ‘억새밭에서’, 전문

 사람은 살아가는 도중 많은 악재(惡材)를 만난다. 건망증도 그 악재 중 하나다. 건망증은 나이와 정비례하는 것 같다. 나도 소싯적엔 기억력이 꽤나 좋다는 말을 들었으나 이제는 치매를 의심할 정도로 건망증이 심하여 민망할 때가 많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남에게 기억되기를 바라고 관심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은 욕구도 갖고 있다. 남이 자기를 기억해 주면 기분이 좋을 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기억해 준다면 더욱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지위가 낮거나 젊은 사람은 기억을 잘하나 지위가 높거나 연세가 드신 분은 기억을 잘하지 못한다. 부탁도 그렇다. 부탁을 받은 사람은 기억을 잘하지 못하나 부탁하는 사람은 그 반대다. 결국 약자 편에 있는 사람은 기억을 잘하는데 강자 편에 있는 사람은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 형편이다. 예외가 있는 모양으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정치인 모씨는 자기 후원회에서 500명에 가까운 후원인들의 이름을 얼굴만 보면서 일일이 소개하더란 말을 듣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귀인다망(貴人多忘)이라 옛사람들은 말했다. 귀한 사람들은 잘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돈푼이나 벌고 좀 출세하였다고 평소에 알던 사람을 몰라보거나 혹은 모른체 시치미를 떼기도 한다. 사람들은 작은 일엔 호들갑을 떨면서도 남의 큰일이나 불행에는 무신경 하는 경우가 많다. 베네딕트 카르프로는 1620년에서 1666년까지 독일의 라히프치히시의 고등민사재판소 소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재임 중 40만 명이 넘는 사람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하루에 다섯 번 이상의 사형 판결을 내린 셈이다. 그는 일요일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나갔고, 일생 동안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려 50번이나 정독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사람이다. 그는 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애견이었다. 어느 날 애견이 죽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아 그로부터 불과 2,3분도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40만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과 개 한 마리의 목숨을 비교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 교활함에 충격을 받는다.

 출문도시욕 개권무비수 (出門都是辱 開卷無非羞),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박학(博學)적 학풍으로 유명한 형암(炯菴) 이덕무(李德懋)의 청언소품집(淸言小品集)에 나오는 글귀다. “문을 나가면 모든 것이 다 욕되고, 책을 열면 부끄럽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글은 미운 사람도 많고 싸울 일도 많은 온통 혼돈의 세상에 살면서 멀쩡한 얼굴을 하고 무지로서 외면하며, 속으로 곪아가고 있는 우리를 반성케 한다. 사람의 언행에는 관성이 있다. 관성에 의한 행동을 습관이라 말하고 있다.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에 관성이 붙으면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고 나면 훌륭한 사람으로 달라지지만 좋지 않은 습관에 관성이 붙으면 타락자나 파락호가 되고 만다. 흔히들 ‘인’이 배겼다고들 한다. 담배나 술에 인이 배겼다고 하지 않던가. 인이 배길 바엔 이왕이면 ‘시조’에 인이 배겼다 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이 ‘인’이란 것은 바로 숨은 병 ‘은(癮)’자의 발음이 전설모음화 되어 바뀐 것이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즐기거나 행하다 보니 갑자기 그만 둘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시조에 인이 배겼다면 모르긴 해도 축복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시조시인은 예의염치를 중히 여기고 많이 차리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억새꽃의 춤사위가 한창이다. 티 없는 가을 하늘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시조 작품 〈잠자리〉는 김용호 시인이 날기를 짤레로 날아 짤레비라고도 부르는 잠자리에 대하여 청령정을 곁들여 2수 연작으로 읊은 서정시조다.짤레비는 잠자리의 거제 방언이다. 짤레란 말을 설명하는 시인의 ‘시작노트’를 옮겨 본다.

   “짤레란 말은 딱 떨어지게 맞지 않은 경우를 말합니다.이를테면 사탕 열 개를 셋이서 나누어 먹으려면 딱 떨어지지 않아서 짤레로 하나가 남는 것입니다. 잠자리가 날 때에는 날개 쌍이 따로따로 움직여 마치 짤레처럼 뒤뚱거리며 나는 것입니다. 둔덕벌에 가득한 잠자리를 보며 청령정에 올라가 봅니다.“

 잠자리는 세계 각지에서 널리 볼 수 있으며 약 5,000종이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107종이 있다. 잠자리의 수명은 보통 1년 내외 이지만 특별한 종은 유충시절이 5~6년이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어릴 때 많이 보아 왔던 왕잠자리 등은 지금은 거의 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거제에서는 잠자리를 짤레비라 불렀다. 그래서 짤레비를 잡자고 가만히 다가가서는 “짤레비 꽁꽁 붙은 자리 붙어라 먼데 가면 코 빠지고 눈 빠진다.”는 노래를 부르곤 했다.

 청마 선생은 잠자리를 좋아 하셨다. 선생의 서재 이름도 청령재(蜻蛉齋)였으니 잠자리를 얼마나 좋아 하셨는지 짐작된다. 1949년 5월 상재한 제4시집의 이름도 「청령일기(蜻蛉日記)」였다. 이 시집의 제자는 배길기(裵吉基)가 쓰고 본문 글씨를 조원홍(曺垣泓)이 썼는데 이를 그대로 인쇄한 육필시집이었다. 시집 ‘청령일기’는 청마의 시정신의 배후인 동양적 여백의 세계를 보여 주는 「심산(深山)」 「그리움」 등 67편이 수록 되었다. 잠자리를 두고 시인은 / 가만히 잠잔다고 잠자리라 부르겠지 / 라고 첫수의 초장을 열었다. / 어릴 적 우리들은 고개를 짤레짤레 / 흔들었다. 짤레짤레 란 표현이 정겹다. / 날기를 짤레로 날아 짤레비라 불렀단다. / 잠자리가 날개를 짤레처럼 뒤뚱거리며 날아 짤레비라 불렀다는 방언의 어언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도 거제 사투리 박사의 진면목이 나온다.

 잠자리의 한자말은 蜻蛉이다. 청마 선생은 청령을 좋아했다. / 지전당골 한켠에다 정자를 세웠다. / 지전당골엔 청마의 묘소가 있다. 처음 묘소는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기슭이었는데 이곳에 동아대학교 건물이 들어서는 통에 경남 양산시 정관면 백운공원묘지에1981.3.29 이장하였다가 1997.4.5 둔덕 지전당골로 이장하였다. 거제시와 청마기념사업회(회장 양재성)는 지전당골 끄트머리에 청마를 기리는 정자를 세웠는데, 정자 이름을 청령정(蜻蛉亭)이라 했다. 편액은 서예가 一濤 朴榮鎭의 휘호를 둔덕출신 서각가 옥성종이 각했다. 청령정 발치에 고추잠자리의 군무가 한창이던 날 시인은 그림 같은 청령정으로 청마선생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청마의 고장, 둔덕골에 가을이 어우러졌다. 심심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청마선생의 시 「심산」이 절로 읊어진다.<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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