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비애선<2>

 한동안 허방을 짚는 듯 허수했다. 찡찡거리는 아이들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이들일랑 아랑곳없이 나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를 때린 그 손에 지나치게 힘을 몰아넣었던, 여전히 잡다한 일에 시달려 볼폼 없는 추레한 손이었다. 그 험한 손등 위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 하나가 포개졌다. 
그녀의 손 앞에서 맹목적이고 상습적으로 앓던 모멸감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어깨를 움츠렸던 날들에 대한 그 이유 앞에는 언제나 그녀의 손이 당당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 내 봐라. 어제는 손금 공부를 좀 했지.”
“뭔 손금?”
“우리 옆집 고시 총각 말이다, 자꾸 손금 좀 봐 준다면서.”
나른한 오후를 부추기는 지리 시간이었다. 그녀가 또 손 타령을 시작했다. 기어코 내 아킬레스건을 건드려 보자는 심사임에 분명했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칠판에 그려진 아시아 지도를 베끼는데 정신을 빼앗긴 척했다. 연필로 허리를 쿡 쿡 찔러댈 때까지 아무런 기척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아예 연필 잡은 내 손을 낚아채 가고 말았다. 그까짓 손쯤 내놓는 일에 샐쭉해질 게 뭐냐는 투였지만 그녀와의 사이에 손은 퍽 민감하게 작용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내 손의 입장이 그녀와 퍽 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창피함이었다. 보잘것없고 결함 투성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외면 받을 거라는, 그런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라는 창피함. 내 손은 누가 굳이 일깨워주지 않아도 잘 알았다. 반면 그녀의 손은 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시선을 집중 받았다. 그녀가 휘두르는 손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손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 능력을 부려 쓸 줄도 알았다. 그녀의 손은 내게는 차라리 폭력이었다.손을 단지 일을 하기 위한 도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나였다. 주인의 뜻에 의해 온갖 노동으로 비위를 맞추는 노예근성만 배어 있는, 솔직히 나는 그 손을 부려 먹는 데만 급급했었다. 그런 대접만 받으면서 자라온 손이니 그 꼴이 별수 있었겠는가. 내 손이 제일 먼저 창피함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녀를 만나면서 부터였다. 고시 공부를 하는 옆집 총각에게서 배우기 시작한 손금이라 했을 때, 또 알량한 손을 무기로 발림수작을 걸었으려니, 코웃음을 쳤다. 어디 핑계가 귀해서이지, 난전에 비단 펴 놓듯 제 손을 전시 
못해 늘 안달이던 그녀였다. 뭉특하고 거친 내 손을 강탈해 간 그녀의 집요함에 이길 재간은 없었다. 결국은 그런 각본으로 끝날 줄 알면서 잠시나마 주머니 안에서 시위를 벌인 건 내 어리석은 융통성 탓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 맘 언저리에는 늦가을 날 뒹구는 나무 이파리 같은 추레한 모멸감이 걸려들곤 했다. 교실 안은 아직 진정되지도 않은 소요의 잔흔들이 먼지처럼 떠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림으로 풀어보는 심리학 강습을 받고 왔다는 지리 선생님 탓이었다. 키만 멀쑥하게 큰 그 선생님의 실험 대상엔 언제나 맨 앞자리의 내가 단골로 잡혀 나가곤 했다. 백묵을 쥐고 선 내게 뭔 그림이든 맘대로 그려 보라고 했다. 차라리 토끼라든가, 나무라든가, 어떤 지시가 있었다면 좀 수월했을 것이었다. 미술 과목이 약간의 허영과 사치로 대접 받았던 건 너 나할 것 없이 어려운 시대에 얹혀살고 있던 때문이었다. 먹고사는데 별로 도움 되지 않는다, 고 밀쳐 둔 그림, 그런데다 타고 난 재주도 없는 나에겐 당연히 감당이 힘든 주문이었다. 나는 멍히 서서 선생님의 그 큰 키만 바라보았다. 암말 없이 빤히 바라보는 표정으로 재촉을 전하는 그 선생님을 위해 내가 그린 것은 동그라미 두 개와 삼각형, 그리고 네모 몇 개, 그런 거였다.갸웃, 고개를 움직이던 선생님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갔다. 싱긋 웃음까지 물고서는 칠판 앞으로 걸어간 선생님의 해석이라니! “소정연이는 지금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와, 하고 큰 웃음이 터져 나온 곳은 남학생 쪽이었다. 짓궂은 남학생들에게 심심풀이 땅콩을 와락 던져주고 만 것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얼씨구나, 한판 벌어질 놀림감일 게 분명했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어도 잔망스런 남학생들의 시선이 뒤통수에 걸려 자꾸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 소요쯤이야 아랑곳없는 옆자리의 그녀는 내 손금에 아주 심각하게 빠져들었다.
“니는 오래 살겄다. 이게 생명선이거든.” 
엄지와 검지 사이의 중간쯤에서 시작하여 손목 아래로 뻗어가는 선 하나를 주시하며 툭 뱉어낸 말이었다. 그녀가 유심히 드려다 본 내 생명선이란 게 유달리 선명하고 길었다. 금방이라도 손바닥을 차고 나갈 듯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는 제법 그럴싸한 표정으로 손바닥에 유심히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선이지?” 
닭 모이 쪼듯 콕콕 찍어대는 매끈한 그녀의 검지 끝에 꼬리처럼 붙은 금 하나가 붙들려 있었다. 약지와 소지 중간쯤의 감정선에서 두뇌선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지선, 짧았지만 분명한 금 하나가 옆으로 비껴 나가고 있었다. 탈선이었다. 모두 앞을 향해 달려가는데 저 혼자 옆으로 슬며시 빠져나가는 짧은 선, 가출을 시도하는 문제아 같았다. 
“야, 이거 개미 꼬리 같다.” 
그녀가 그 지선에 개미 꼬리로 비유했다. 나는 그때 개미에게도 이만한 꼬리가 있겠거니 짐작했다. 내 손금 안에 개미 꼬리가 살고 있다, 그녀는 내 손바닥에 그런 믿음과 의심을 함께 심어주었다. 내 생명선을 부러운 듯 쳐다보다간 슬며시 펴 보던 제 손바닥을 오므려 감추던 그녀, 그 수상스러운 기미를 놓치지 않고 이때다 싶게 받아 쳤다. 너는 어때, 하고는. 대답을 꼭 받아내야겠다는 맘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화중임에도 입을 닫아버린 그녀, 꽤 중요한 말을 감추려는 의도임에 틀림없었다. 당황한 듯 손을 감춘 그녀가 서둘러 연필을 잡았다. 급히 흘러내린 단발머리가 그녀의 자존심 강한 코와 다문 입을 잘 가려주었다. 흘깃 넘겨보니 그녀의 지리 공책에도 내가 그리고 있던 지도, 아시아 대륙이 얼추 모양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왜, 넌 안 보여 주니? 채근하는 내게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나는 너와는 좀 달라. 단지, 너
와는 다르다는 것뿐이야. 그러면서 여전히 대륙에 보금자리를 튼 나라이름들을 써 넣고 
있었다. 다르겠지. 나 또한 등뒤에서 조용해진 남학생들을 힐끗 쳐다보다간 필기에 들어갔다. 다음날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또 손바닥을 펴보라 재촉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어김없이 주눅이 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주눅부터 드는 내 버릇을 재미있어 했을 것이다. 그런 나에 비해 그녀는 좀 무거웠지만 분명했다. 제 손을 선전하기 위해 내 손을 이용한다, 나는 오직 그녀를 그렇게밖에 몰아붙이지 못했다. 고시 총각에게 들은풍월일까, 손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론도 장황하게 늘어놓곤 했다. 손이란 건 가장 섬세하면서 가장 많은 골짜기와 구릉을 가지고 있다.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주름은 얼마나 많은지 아니? 수다한 마디들, 가장 많은 관절, 이거야말로 신이 만든 예술품이란 거다, 라면서. 그녀와 함께 한 3년의 학교생활에 가장 많이 노여움을 탔던 적을 꼽아 보아도 역시 손을 언급할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 노여움조차 무시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견딜 수 없었던 노여움들은 어쩌면 나 자신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왜 그녀의 손 앞에서 먼저 기부터 죽을 생각을 했던가. 왜 내 손을 당당하게 대접해주지 못했던가.  그즈음 내 불행은 내 손의 정체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
다. 설거지물에 절어있는, 걸레 훔치기에 이력이 난, 투박하고 마디 거센 내 손. 모멸감이 개입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요구를 무리하다고까지 치부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무리하다, 그 잣대를 만들어 자신을 억울한 입지로 몰아넣은 것도 그 모멸감이 저지른 음모였을 것이다. 살짝 삼인칭 의자에서 봐준다면 그녀에게 횡포라는 말까지 합세하여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손 타령은 지극히 정상이었고 나뿐 아니라 누구 앞에서든 그랬다. 문제는 내 열패감이었다. 내 가여운 손에게는 고급한 그녀의 손이 충분히 폭력으로 작용될 수 있었다. 우월감과 열패감은 상대를 서로 이용해야만 효과를 보는 셈이기에 말이다. 가무잡잡하고 짧은 손가락, 푸짐하게 살 앉은 손등이며, 잘 발달된 근육으로 똘똘 뭉친 내 손에 굳이 변명 하나쯤 끌어들인다면 일찍 엄마를 여윈 탓이었다. 늘 아침밥을 지어먹고 등교해야만 하는 내 손은 사실 살아가는 일에 더 급급했다. 한 번도 일의 그늘에서 벗어난 본 적이 없는, 시쳇말로 휴가라는 걸 누려본 적이 없는 내 손은 노동에 시달려 늘 힘들고 지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에고 부지런하게 생겼네. 자주 듣는 그 말이 내 손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얼마나 안쓰러웠으면 어린 손에다 그런 치사의 말을 생각해 냈을까. 그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버릇처럼 손을 등뒤로 감추곤 했다. 그날의 손금 강의는 두뇌선이었고 비교적 간단했다. 공부 잘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네. 한마디 던져 놓고는 버릇처럼 그녀는 제 손을 다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분명 가을날이었던 게 틀림없다. 학교 언덕 위에 빙 둘러선 미루나무 노란 이파리들이 배경 화면처럼 기억에 깔려있는 걸 보면 말이다. 박목월 선생님의 구두를 닦아주며 행랑채에서 배운 시라고 너스레를 떨어대던 국어선생님의 발상은 늘 파격적이었다. 아직도 전쟁의 잔해처럼 돌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은 피난민들로 북적대던 섬, 돼지 꼬리처럼 꼬부라진 북녘 사람들의 말투와 관습에 얼추 익숙해 가던 때였다. 시인 선생님이 주도한 시화전이 터미널 근처 ‘길’ 다방에서 열리던 날이었다. 다방에서 시화전이라니. 그 시인 선생님의 발칙한 시도로 다방 문턱을 넘나들 수 있는 티켓을 공짜로 따냈다는 들뜬 마음, 풋내 나는 단발머리와 까까중머리들의 호기심이 우르르 다방을 향해 몰려가는 오후였다. 보릿자루처럼 밀려들어온 바다와 맞물려 있는 버스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양말에 밴 핏자국을 본 후, 그때서야 절뚝거리던 희영이를 놀려먹으며 웃음을 터뜨리던 중이었다. 돼지 먹이를 머리에 이고 식당 문을 나서는 여자와 부딪친 건 그때였다. 그 여자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그녀와 나뿐이었다. 그녀의 엄마였다.인사를 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 내 손을 낚아채어 제지한 건 그녀였다. 손에서 흘러나온 힘은 분명했고 완강했다. 어떤 언어로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다.나는 결국 그녀의 엄마를 외면하고 말았다. 그녀 또한 무심으로 포장한 표정이었다. 어느 가수를 흉내 내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듣고 나는 정신을 가누었다. 러브 포지션 넘버 나인……, 핏대 높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신작로 길 위로 가증스럽게 흩어졌다. 소신 없이 모의에 가담하고 만 역적이 된 기분이었다. 내 맘속에 끓고 있는 건 분노였다. 그날 나는 다방에 걸린 시들을 제대로 눈에 담아낼 수 없었다. 붉은 단풍이 마구 뒹구는, 내 시화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다간 나왔을 뿐이었다. 입성이 추레한 한 여자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들었다. 불쌍하다 싶을 정도로 제 소리를 갖지 못한, 음전한 여인이었다. 읍내 학교로 통학이 시작될 무렵 이웃했던 한 사내아이는 뭍으로 진학했다. 바다는 진작 그 물속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다. 산도 마찬가지
다. 먼 곳에서 봐주어야만 비로소 그들은 산이, 바다가 되어 우리들 시선 앞에 서게 된다. 그 애가 떠나고 나서, 멀어진 그 거리에서 바라본 내 마음의 정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풋내 나는 사랑이었다. 그 아이가 없는 섬은 허허벌판, 아무 것도 없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 그렇도록 완벽한 무(無)의 지대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내 마음이 주도한 화학적 반응이었을까. 한 아이의 존재가 변화시킨 세상, 그건 어떤 원소로서도 납득되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종일 들었다. 그리곤 혼자 걸었다. 바닷길을 걸으면 정박해 있는 군함에서 색소폰 선율이 아련하게 울고 있었다. 

Why! Oh, why, must I go on like this!
 Shall I just be alonely, stranger on the shore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 내 아픔이었고 사연이었다. 나는 왜 이래야만 하나! 마치 해변의 길손 같구나! 열여섯 봄, 내 인생에 최초로 앓았던 상실감이었다.여름 방학, 신작로를 향한 내 방 유리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왔어.” 
그 아이의 환한 얼굴이 창에 걸려 있었다. 저물녘이면 애잔한 뱃고동 소리를 앞세우고 포구로 들어서는 여객선이 그를 실어다 준 것이었다. 허허롭고 상처 났던 내 세상은 그 아이로 인해 치유가 시작되었다. 그 아이가 방학 동안 잠시 머무르던 때에 제일 먼저 한 일은 내 짝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손이 예뻐. 하고 그녀를 미리 소개할 때부터 미진(微震) 같은 불안이 내 마음을 훑고 지났다. 후회가 내 등을 집적거렸다. 그러나 이미 약속은 톱니바퀴처럼 척척 소리내며 잘도 돌아갔다. 졸라대는 그녀를 내치지 못한 것 또한 그녀 앞에서 매몰차지 못한 내 버릇 때문이었다. 팥빙수 가게였다. 그녀와 나, 그리고 그 아이가 만났던 곳은. 남극의 펭귄 그림이 벽 전부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녀를 앞에 두고 그 아이와 내가 앉았다. 팥빙수 세 그릇 앞에서의 그럴 듯한 미팅중이었다. 내 신경은 온통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곳만 따라다녔다. 그 아이 앞에서 유난히 유체스러운 그녀의 손, 가지런히 정리된 숟가락의 위치를 다시 바꾼다던가, 아예 두 손을 탁자에 걸쳐 놓고 그 아이에 겨냥을 대는 것이었다. 물론 그 남자아이의 눈도 그녀의 손을 힐끔힐끔 따라다녔다. 그 아이의 눈이라고 어디 다를까. 그 아이와 그녀가 내게 비밀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은 그 손이 활약하던 팥빙수 집의 만남 이후였다. 그 해 여름방학, 나는 오랫동안 오누이처럼 지내던 한 남자 아이를 마음에서 떠나보냈다. 그것도 그녀의 손이 한 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여름 이후 내 시선은 멍해졌다. 산패된 내 마음의 사주로 눈빛조차 조삽해갔다. 슬펐던가. 그 슬픔은 위험수위를 제멋대로 넘나들었다. 아픔이었다. 아픔이 몸에 붙으면 삶은 더 고단해지는 법일까, 엄마를 먼저 보내고 피폐해진 아버지의 짜증이 고스란히 내 몫의 고통으로 달아 붙기 시작했다. 불행은 악성 바이러스처럼 떼지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여전히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짝지였고 단지 마음을 감추는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가면은 훌륭한 보호막이었지만 감추어 둔 내용은 서로 달랐다. 내 것은 그녀 앞에 들키고 싶지 않은 생가슴을 잘 보호해 주었다. 그랬어도 그녀를 내치지는 못했다. 아니 내칠 곳이 없었다. 날이 새면 한 교실에서, 책상 짝꿍으로 또 만나야하는 그녀를 떠난다 해도, 너울가지 변변찮은 내가 다시 안주할 곳이 마땅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집은 울벽도 없이 학교 담에 기대 있었다. 내려다보면 루핀지붕 위에는 큼지막한 돌이 이곳저곳에 뒹굴었고, 길게 이어진 돼지 축사에선 냄새가 진동했다. 학교를 파한 후, 그냥 담을 죽 미끄럼 타듯 내려가면 그녀의 마당이었다. 부엌 방, 그녀의 앉은뱅이책상 앞에는 늘 두 무더기의 사탕이 놓여 있었다. 키가 장대 같은 그녀의 할머니가 동그마니 얹어둔 사탕 중 한 무더기는 내 몫이었다. 삼대의 여자만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집이었다. 허방 짚듯 허수한 구석이 움츠리고 있긴 해도 숨 막히는 남자들의 거센 입김이 없는, 말하자면 권위에서 무장 해제된 그 자유로움이 은근히 부럽기도 했다. 여자들만의 집단에서 굳이 막강한 한 권력자를 꼽으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이 그녀를 택할 터였다. 제일 말단 서열이면서 집안을 맘대로 휘두르는 그 세력의 정체가 경이롭기만 했다. 대쪽 같은 어깨, 힘을 잔뜩 넣은 걸음새에도 자신의 권력을 매달고 다니는 듯했다. 한 번도 그 등을 굽히거나 제 주장을 주머니에 넣는 걸 본 적이 없는, 그렇도록 강한 자아는 그 손만큼이나 대표적인 상품이었다. 그 어깨에 감추어둔 겔까, 그녀의 출생 또한 일급비밀이었다. 한 집 가장의 존재로 근본을 따지던 고루한 시골바닥에서 그녀의 집안 문제는 은근히 질시 받던 미스터리였다. 나중에, 아주 나중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누군가가 내게 비밀이라며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의 엄마가 첩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할머니 또한 첩이었다고.말하자면 첩며느리를 데리고 사는 할머니 당신도 첩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한 번도 그녀에게서 아버지란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기억으로 퍼즐을 맞추어 나가면 제법 그럴 듯한 알리바이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또 가을이 돌아오고……. 읍내에서의 3년을 끝으로 그녀와 헤어졌다. 어느 날 내가 근무했던 우체국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주소도 없는 봉투지만 대구 소인이 찍힌 봉투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읽었던 건 편지 끝자락에 붉은 글씨로 마무리한 『추신』란이었다.
『PS: 비애선』
내가 전에 말했던 너 손금 말이야, 생각나? 개미 꼬리라고 내가 말했을 텐데.너에게 꼭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건 비애선이야. 혹은 배신선이라고도 해. 비애선은 아주 큰 비애감이나 배신감을 맛보게 되는 사건을 겪는단다. 사랑하는 사람을 불의의 사고로 잃는다든지, 믿었던 사람에게 큰 배신을 당한다든가 대강 이런 해석이야. 참 그리고 개미에 꼬리가 있다는 말은 글쎄…….세월이 기억의 바닥에 눌러 붙으면 어떤 모양으로 변할까. 그녀의 기억은 고압 전류처럼 가끔 내 몸을 찔러대곤 한다. 그 통증은 내 세월에 기생충처럼 붙어 함께 살아왔다. 그랬음에도 나는 지금 그녀가 살다간 세 배만큼의 삶을 누리고 있다. 그녀에게서 충분히 우월감을 느껴도 괜찮을 삶의 길이이다. 그녀의 삶을 그 손금이 주도했다면, 이렇게 지겹도록 발전한 문명을 누리는 나 역시 손바닥에 그려진 무수한 지문들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20대, 찬란한 청춘의 한가운데서 꼭 목숨을 내놓아야했던 것도 분명 가다가 손을 놓아버린 생명선, 그 꽈리형 막쥔손금의 소행이 아니었을까. 내 깊은 상처를 개미 꼬리 같은 그 비애선이 주도했던 것처럼……<끝>다음작품은 '안개'와 '내 영혼 바람되어'로 전체적인 게재가 끝납니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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