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바람 되어<1>

 가방을 챙기는 시간은 얼마 소용되지 않았다. 옷가지 몇 점과 오랜 세월 숨죽여 지냈던 정우의 일기장, 듣고 또 들어 닳기도 했 을 시디 몇 장뿐이었다. 그랬어도 아직 가방 안은 허수룩했다. 뭐 더 넣을 게 없나 이 방 저 방을 훑어보았지만 딱히 맘에 잡히는 건 없었다. 손가락 열 개가 다 잡히는 해를 살아왔건만 그간의 삶이 너무 허줄했던 것일까, 그 흔적은 겨우 가방 한 개도 다 채워지지 않는 부피였다. 비감이 슬쩍 어깨를 치며 저만치 달아났다. 현관 문 고리를 잡던 손을 놓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랬어도 행 여 잊고 챙기지 못한 여줄가리 하나쯤이라도 있겠지, 그 핑계모를 앞세워 다시 둘러보았다. 맘 다질 틈도 없이 아버지가 떠미는 등에 밀려 한 남자와 헛다리품만 산 세월이었다. 마음 드리지 못한 객식구로 연기한 세월만 벽의 땟자국처럼 신산스럽게 흩널려 있 을 뿐이었다. 버려지는 배신감 때문일까, 노려보는 그것들의 눈에 노여움이 고여 있는 듯했다.

그 사람 시간을 열심히 놀아주던 티브이가 멍히 날 쳐다보았다. 한 번도 진심으로 눈을 주고받은 적 없던 티브이였다. 거실 면적 에 비해 터무니없이 넓은 화면은 보란 듯이 흰목을 쓰고 앉은 것 같아 일부러 피하곤 했다. 이제 저 티브이는 그 사람의 남은 세월 에 큰 위안이 되리라. 안 방문을 열었다. 때묻은 화장대 앞의 사진첩이 횅댕그렁한 눈 으로 날 바라보았다. 언젠가 태국여행 때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 다. 산호섬이었던가, 유난히 모래가 하얀 바닷가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미렷한 얼굴의 남자는 입가로 미어져 나오는 행복을 억지로 삼키려 애쓰는 표정이었다. 여자의 어깨에 얹은 남 자의 손도 자리가 마땅찮은 듯 불안해 보였다. 뒷면을 열어 사진 을 꺼냈다. 그리고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편지봉투 위에 빈 액자 를 뒤집어 놓았다. 쥐고 있는 손에 사진의 무게가 부담으로 전해 졌다. 찢을까, 비틀던 두 손을 멈추고 우선 핸드백 속에 넣었다. 방안을 빙 둘러 보았다. 정말 유령으로 살았던 겔까, 남겨 진 건  느낌뿐, 당장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반역을 도모하는 역적처럼 한 달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를 했었다.
마치 완전 범행을 꿈꾸듯 버릴 거는 버리고 또 태울 거는 뒤뜰에 다 조용한 불꽃을 만들어내곤 했다. 내가 만약 그 사람에 의해 고 발당한다면 주도면밀한 이 계획 때문에 가중처벌을 선고받아 마 땅할 것이었다. 그러나 십여 년의 세월을 어떤 행위로든 지워낸다 는 게 허구픈 짓이란 것도 알았다.   

그 사람은 지금 필리핀 출장 중이다. 나는 이 편안한 떠남을 위 해 그 날짜까지 맞추어 계산했다. 행여 두고 온 무엇이 있더라도 서두를 필요가 없는 여유가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작별에 필요 없는 시간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나는 이 집에서 살았던 적 이 있었던가, 시각적인 확인이라면 완벽한 지움이었다. 뜬금없이 서글픈 느낌이 스쳤다. 뜨내기로 살았던, 강산을 한 번 변화시킬 수 있는 그간의 내 시간들에 가여운 맘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이 집에서 내가 꾸렸던 가방은 수도 없이 많았음을 깨달았다. 물론 늘 마음의 가방뿐이었지만 말이다. 그 사람은 오늘 오후 늦은 시각에 도착할 것이고 빈집이 풍기는 한기에 의아해 하거나 당황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통의 남자들처 럼 전화번호를 다급하게 누르거나, 안절부절 못하는 그런 장면은 기대할 필요가 없다. 다만 올 것이 이제야 왔구나, 시풍덩한 얼굴 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커피포트를 데워 두 개의 커피믹서를 넣 은 머그잔으로 티브이 앞에 앉을 것이다. 그가 즐기는 드라마 한 편과 탈북여성들의 수다가 무성한 프로그램, 그리고 함부로 드러내는 알몸이 단골인 화면을 찾아 수없이 심야영화 채널을 돌릴 것 이다. 그러다 리모컨을 손에 쥔 채 잠이 들 것이다. 이 모두는 그 의 습관이 그려내는 사실적인 그림이다.  

현관을 나와 계단을 내려서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귀문을 데크 벽에 대고 안을 살펴보았다. 조용했다. 바짝, 귀를 더 붙여 보았 다. 그러다가 얼른 몸을 세웠다. 지금 고양이는 없다, 그럼에도 나 는 계단을 내려설 적이면 버릇처럼 빈 벽 속에 귀를 대보곤 한다. 고양이가 떠난 지도 제법 되었다. 위험이 닥치면 목을 물어 새끼 를 나르던 누랭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미 노릇을 그렇도록 열심 히 하는 짐승이 또 있을까, 이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는 데크 속 빈 공간을 부질없이 살핀다. 대문을 열었다. 그 사람의 회색 자동차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 다. 마치 내 거동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눈빛에는 살기마저 감 돌았다. 몸을 도사렸다. 대문에 등을 기대고 잠깐 숨을 몰아쉬었 다. 그렇게 등을 돌려 세운 눈앞에 그 사람의 정원이 또 나를 감시 하듯 살폈다. 뜰은 이미 서리가을로 접어들었다. 불깃하던 단풍 잎도 가장자리부터 허옇게 돌돌 말려들었다. 등을 떠미는 계절의 힘에 속수무책, 가을은 이미 넋을 놓는 중이었다. 몇 잎 남지 않은 앙상한 은행나무가지, 그 옆에 붕어를 키우는 그 사람의 연못이 있 다. 붕어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이유가 누랭이 소행이라는 걸 알 고부터 그 사람은 한 길짐승을 적군으로 몰아 부치기 시작했다.

누랭이가 붕어의 천적이라면 누랭이의 천적은 그 사람인 셈이었 다. 이들 삼각의 관계는 붕어의 숫자에 의해 노골적인 적의를 드 러내었다. 엉거주춤 관망의 자리에 있던 나 또한 천적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 원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밤새 새끼를 나르는 누랭이의 모성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이 었을 게다. 붕어와 고양이, 그 사람과 나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 는 원형의 천적그래프 속에 갇히고 말았다. 그 사람의 밥상에서 생선 반 토막을 잘라내었고, 고기 반 접시를 덜어내어 붕어의 천 적인 고양이 밥그릇에 몰래 담았다. 그런 방법으로 나는 그 사람 의 천적으로서 충실했다.      캐리백을 손에 쥔 채 다시 바깥을 살펴보았다. ‘나는 그 가방의 음모를 다 알고 있다.’ 자동차는 그 말을 하고 말겠다는 듯 눈자리가 나게 쏘아보고 있 었다. 가방의 음모라니, 나 또한 눈씨에 힘을 모았다.  대문에 잠깐 기대섰다. 질질 끌려나온 가방은 주눅바치처럼 몸 을 움츠렸다. 어디에서 급조된 노여움일까, 필요 이상의 힘을 끌 어내 대문을 꽝, 밀어붙였다. 캐리백을 쥔 손에 힘까지 가세했다. 골목길을 걸어 나오는 내내 등이 가려웠다. 자동차의 감시를 받아 내는 등이 발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씨알처럼 남겨 둔 허세를 앞 세우고 걸쌈스럽게 골목을 벗어났다. 골목 밖에는 생경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달려가는 차들,

 바쁜 걸음들, 비슥맞은편 마트의 호객 소리, 늘 봐 왔던 풍경이었 다. 그런데 마치 처음 만난 여행지처럼 낯설었다. 그들 모두는 세 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돌아가고 있었다. 무리 속에 어울리지 못 하고 겉돌고 있다는 느낌, 뜬금없는 소외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내 맘을 눈치 챘을까, 터미널 방향의 버스가 앞에 섰다. 얼른 버스 에 올랐다. 정오가 가까워지려는 시각, 버스 안은 한산했고 구석 진 뒷자리를 골라 앉았다. 띄엄띄엄 앉은 버스 안 사람들 얼굴엔 시간을 견뎌내는 무료가 더께처럼 눌러 앉아있었다. 창밖을 바라 본다거나, 휴대폰에 눈을 맞추고 있다거나,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 통화를 한다거나……. 슈퍼마켓 상품처럼 다양한 표정들이 버스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그 무심한 얼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가면을 벗기 시작한 건 버스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일어선 남자 때문이었다. 허든거리던 붉은 점퍼의 남자가 통로에 쭈그리고 앉은 내 가방에 발길질을 한 것이 다. 피해자로 몰아세우려는 양 돌아선 남자는 가뜩이나 주눅 든 가방을 쏘아보았다. 불쾌감을 다 지우지 못한 얼굴로 남자는 버 스에서 내렸다. 그런 후 내 가방은 버스 안의 중심에 서고 만 것이 다. 모두의 눈들이 내 가방으로 죄다 몰려들었다. 휴대폰에 눈을 꽂고 있던 짧은 치마의 여자아이, 지팡이를 꼭 쥐고 앉은 노인, 뜬 금없는 선글라스로 분위기를 제압하던 중년의 여자, 무심한 척 가 면을 쓰고 있었지만 모두는 내 가방을 힐끔거리는 중이었다. 버스

안의 무료함은 순식간에 깨지고 술렁임이 은밀하게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가방은 지난한 내 삶을 여과 없이 투영하고 있었다. 아 무런 감흥 없이 살아온 십여 년, 정우가 떠난 후 도망치듯 안착한 그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가방이었다. 내 알몸이나 다름없는 가방 이 그렇게 타인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있었다. 모멸감으로 화끈 얼 굴이 달아올랐다.   버스 정류장을 예고하는 안내 멘트에 신경이 곤두섰다. 올바르 게 작동하지 못하고 고무줄처럼 제멋대로 늘어지는 시간에 조바 심이 일었다. 아주 한참 뒤였다. 기다리던 정류장이 다가왔다. 가 방 또한 덜커덩거리는 바퀴 소리로 제 불편한 심기를 함부로 드러 냈다. 남부 터미널에 들어섰다.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떠 나는 여행자들로 붐볐다. 섬을 향한 차표를 구입하곤 길게 이어진 의자에 앉았다. 뭍으로 이어지는 대교가 개통된 지도 오래, 섬의 조건을 버린 지가 얼마인데 티켓 꼬리에는 여직 섬이란 글이 매달 려 있었다. 20여 분이 지났을까, 구매해 둔 시간의 버스가 플랫폼 으로 들어왔다. 기사가 열어 둔 짐칸에 가방을 밀어 넣었다. 비로 소 해방이 된 듯 맘이 가뿐했다. 내 삶을 엿보려는 따가운 눈길은 이제 없다. 가벼운 걸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모든 게 다 제자리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나른해졌다. 내 옆 좌석엔 어떤 사람이 앉을 까, 미리 의자의 주인을 점치는 여유까지 얻었다. 어느 버스길이든 옆자리에 마음 편해 본 적은 없다. 나이 많은 이들의 지나친 관 심이나, 슬며시 어깨를 기대는 중년의 남자, 힐끗힐끗 눈돌림질을 일삼는 내 또래의 여인……. 그런 날이면 바늘방석이 되어버린 찻 길은 한없는 시간만 늘어지곤 했다. 네댓 시간이 소요되는 먼길의 시작이었다. 

 차표를 건네고 차 안을 빙 둘러보는 사람들을 살펴보 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무거운 가방 차림의 스무 살 남짓 여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푸수한 차림의 여자는 가족 선물로 무거워진 가 방을 선반 위에 밀어 넣고 휴 한숨으로 이내 속잠에 빠져들 것이 다. 번갈아 드나드는 고향 꿈을 맞아들이다간 종점에서야 기지개 를 켜는, 그런 여자라면 먼길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여자는 내 곁을 지나 종종걸음으로 보퉁이를 껴안은 할 머니 옆에서 앉을 자리를 살피는 중이었다. 안전벨트를 매는 여자 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이제 허튼 도박은 말자,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옆자리에 인기`척이 들렸다. 그랬어도 눈은 뜨지 않았다. 젊은 남자의 체취가 가만 코끝으로 밀려왔다. 몇 살쯤으로 살아가는 중 일까, 눈을 감은 채 속어림 내기를 해 보았다. 스물넷? 마치 준비 해둔 말이 듯 그 숫자가 저절로 입속에 머물렀다. 정우가 살다간 나이였다. 비밀이라도 들킨 양, 두 눈을 아프도록 감았다. 제법 졸았던 모양이다. 얼마를 달렸을까, 창밖을 바라보았다. 슬쩍슬쩍 스쳐가는 이정표가 아직 충청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 었다. 그때에야 생각해낸 듯 옆 자리를 살펴보았다. 헤드폰을 머리에 두른 청년이 두 손을 꼭 모아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도 옆자리에 대한 부담을 감은 눈으로 해결하려는 셈일까, 가만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무슨 음악일까, 남자는 얌전한 허밍으로 헤 드폰 속의 음악을 따라가고 있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 둔 손을 살펴보았다. 포개진 오른쪽 손등엔 푸르스름한 핏줄이 얼비 치었다. 어떤 비밀을 따라 살며시 숨어드는 길 같은 핏줄, 그 끝 의 손가락 두 개가 박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 었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손놀림에 넋을 놓고 앉은 내 시선에 따가움을 느꼈을까, 남자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곤 싱긋 웃었 다.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 남자는 다시 눈을 감았고, 헤드폰 속 의 선율에 계속 손가락 장단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내 눈길 또한 남자의 손장단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다시 남자가 눈을 떴다. 그 리곤 헤드폰을 벗겨 내었다. 벗겨진 헤드폰 속에서 소리가 미어져 나왔다. 
“라이언 킹이네요.”
엘톤 존의 곡이었다. 캔유 필 더 럽 투나잇. 
“네. 아우스쿨타테 버전이랍니다. 음악 좋아하시나 봐요.”
눈을 감았을 적보다 움직이는 입을 둔 표정이 훨씬 마음을 잡아 당겼다. 마주하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네. 소릿귀는 좀 밝아요.”  
필요 이상의 관심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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