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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목 김주근] '현명한 선택(選澤)'김주근:아호 자목,시인,수필가,신한기업(주) 대표 

 70년대 이전에 우리는 가난했다. 한 끼를 걱정하면서 살았다고 부모 세대는 말을 한다. 그 분들은 80대 또는 90십대를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 생을 마감하고 있는 현실이라서 안타깝다. 70대를 살아가고 있는 형님들 중에 간혹 바닷가에 밀려온 소라껍질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당시에는 어린 나이에도 부잣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면서, 굶주림이라도 면해야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가슴속에 꼬깃꼬깃 접어둔 자신만의 치부(恥部)를 쉽게 들추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같은 처지에서 살았다고 하면서, 대화 중에 접어둔 인생 책갈피를 펼쳐 놓기도 한다. 지금처럼 직업이 다양하게 있는 것도 아니요, 먹을 것도 풍부하지 않았다. 


 어르신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염소가 먹는 풀들은 사람이 먹어도 된다.'' 라고 하셨다. 즉, 먹을 것이 없으면, 염소가 먹는 풀이라도 먹어서 배를 채운다는 뜻이다.어느 여인의 인생 이야기다. 60년도에 꽃가마 타고, 서방님 따라서 시집을 갔다. 당시에는 시댁 식구와 함께 살았다. 특히, 장남은 부모와 살아야 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남부터는 분가를 해서 살았다. 당시에는 딸을 시집보내는 조건으로 장남한테 보내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특히 그 여인은 키가 보통 보다 작고,  몸이 가냘프고, 덩치가 작아서 혼자서 하는 일도 힘에 부쳐서 늘 힘들어 했다. 신랑은 덩치가 크고, 우람하여 남자답게 생겼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식들을 낳고 오붓하게 살았다. 처가 친척들은 사위를 만나면 건강하고 든든한 모습이 보기에 좋다고 흐뭇해했다.

 어느 날 남편이 젊은 나이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아프지도 않았다고 한다. 밥도 잘 먹고, 일도 잘하고, 잠을 자는 중에 이상해서 손으로 흔들어 보니 인기척이 없었다. 무서움증이 들었다. 흔들어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얼마나 놀랬는지 오열(嗚咽)을 하면서 실신을 했다. 당시에는 교통편도 열악했고, 전화도 없었다. 병원도 몇 십 킬로 가야되고, 친척들에게 부고를 알리고 싶어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시대다. 살림이 넉넉한 집안 형편이면, 오일장이나 칠일장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삼일장으로 동네 사람들이 나무로 만든 상여로 공동묘지에 묻어준다.참 기고한 운명이다. 아내는 생과부가 되었다. 두 명의 자식들과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좌절감과 절망감만 엄습한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앞길이 깜깜하다. 우선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혀야 하지만 가진 것도 없다. 시댁에 의존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남편이란 기둥이 무너졌으니, 여인은 바람과 같은 존재다. 마땅한 직업도 없었다. 당시에는 직장이라고 해야 도시 부잣집에 식모살이하는 정도다. 

 과부는 받아주지 않는다. 걱정이 앞서니까 하루해가 십년이 가는 기분이다. 밤이 되면 보름달이 밤잠을 몇 번이고 깨운다. 캄캄한 밤은 지루하게도 길다. 차가운 바람은 매섭게 불면서 흐르는 눈물을 더욱 흘리게 한다. 동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새 출발을 하라고 한다. '내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두고, 어디로 가란 말인가?' 하면서 가슴으로 운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생활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에서 누구를 만나 보라고 주선(周旋)이 들어왔다. 며칠을 망설이고 있었다. 권유에 못 이겨  남자를 만났다. 그 쪽도 사별을 했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린다. 고심 끝에 함께 살기로 했다. 자식을 버리고 가야하는 기구(崎嶇)한 운명이다. 가슴이 구름에 갈라지듯 찢어지게 아팠다. 살아 갈 길이 구만리 같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그 쪽 자식들을 키우면서 살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친 자식들이 눈에 아련 거렸다. 보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 비유하랴. '언젠가는 꼭 만나야 한다.'고 입속으로 침을 삼키면서 가슴으로 다짐을 한다. 남편이란 사람이 구박을 하면, 바닷물이 밀려오듯이, 설움만 몰려온다. 참다가, 참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집안 숙모에게 전화를 했다. 그 동안 억압 받았던 지난날을 하소연을 하면서 못살겠다고 했다. 숙모는 "당장 집으로 와서 나하고 같이 살자"고 했다. 앞 뒤 가리지 않고. 곧 바로 버스를 타고 숙모 집으로 갔다. 숙모는 조카에게 동생이 사업을 하고 있으니, 직원들 점심밥을 지어주면서, 나하고 살자고 했다. 며칠이 지나갔다. 남편이 왔다. 숙모는 조카 부부와 아들을 앉혀놓고, 조카 사위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조카가 너희 집에 간 기간이 몇 십 년이 되었다. 시모를 모시고 네 자식을 키우면서 살았다. 식모를 살아도 한 달에 일백만 원은 받아야한다. 퇴직금 없이 일억을 주면, 조카를 보내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하고 살겠다. 선택해라" 하면서 다그쳤다. 조카사위는 생각하지도 못한 제안에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옆에 있는 아들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일억이 없으면, 논 두 마지기(4백평)를 누님 앞으로 등기를 해 달라고 했다.” 조카사위는 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 논 두 마지기는 안 되지만, '한 마지기 조금 넘는 논을 아내 앞으로 등기를 했다.'고 전화가 왔다. 어느 날 남편이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 집 아들이 논을 샀다고 한다. 여인의 나이가 팔십이 곧 목전에 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병원에도 가야하고, 수중에 돈이 있어야 한다. 노년에 돈이 없으면, 피폐(疲弊)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이다. 지금은 주위 사람들이 그 여인을 보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얼굴은 보름달처럼 십년은 젊게 보인다.”고 말을 한다. (202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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