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소감

한참 동안 하늘을 보았다. 올려다본 기억이 언제이지 가물가물한 하늘을 요사이 부쩍 보는 일이 많아졌다. 며칠 전 반가운 소식을 받고 나서는 더 자주 하늘을 보는 것 같다. 가을빛 가득 담은 푸르고 맑은 하늘에 눈이 부시다.

 모른 척 외면했었고 잊고 지냈던 꿈을 다시 꺼낸다는게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가슴까지 파고들던 따뜻했던 바람과 그 바람결에 꽃향기 가득했던 어느 봄날, 가족들의 응원과 격려 속에 가슴 속 가장 단단한 곳에 묻어 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 보리라 다짐했다. 뿌리로 씨로 잠들어 있던 그 어린것들이 잠에서 깨어나던 그 날. 그 봄날을 잊을 수가 없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눌산문예교실에 등록을 하고 첫 수업을 기다리던 며칠은 두근거림 그 자체였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이럴까. 찬 바람을 이겨내고 핀 매화꽃을 보는 것처럼 설레이고,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들떠있었다. 눌산 선생님이 밝혀 주시는 길에 첫발을 내딛던 그날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 강의에 귀 기울이고 함께 하는 문우님들과 발맞추려 애쓰다 보니 내게도 이런 영광된 시간이 오는가 보다. 다시 꿈꿀 수 있게 도와주신 선생님, 용기를 준 가족들, 좋은 길벗으로 힘 돋아 주시는 문우님들께 이 영광을 돌린다. 더 좋은 글을 쓰라는 격려임을 알기에 「문장 21」에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햇살이 참 좋다. 하늘을 보는데 주책없이 자꾸 눈물이 난다. 

 <등단작품>
다섯 살의 가출

“할머니~ 할머니~”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나를 할머니라 부르는 사람이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누구냐고 묻는다. 키가 작아 벨을 누르지 못해 늘 문을 두드리는 아이는 큰 소리로 제 이름을 말한다. 
이제 겨우 오십이 된 나를 녀석은 처음부터 할머니라 불렀다. 고춧가루가 여기저기 묻어있는 앞치마를 하고 김치통을 나르던 모습이 그렇게 보였을까. 제 엄마 나이로 본다면 할머니로 보이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 낯설어 이모라고 몇 번을 알려줘도 소용이 없었다. 할머니로 시작된 호칭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바뀌지 않아 이모라고 불리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아기 엄마는 늘 미안해했지만 녀석에게만은 나는 그냥 할머니다.
이상한 건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관계가 진짜 할머니와 손주처럼 되어갔다. 길을 가다가도 장난감에 자연스레 눈이 가고, 수시로 문을 두드리는 아이를 위해 좋아하는 간식도 미리 챙겨둔다. 서랍 한편에는 혹시 몰라 제집에서 가져다 둔 옷도 두어 벌 들어있다. 봄에 노란 고무신을 사 줬더니 좋아하며 자주 신고 다닌다. 날씨가 더워지니 여름 샌들을 사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녀석과의 만남은 옆집으로 젊은 부부가 이사를 오고 서너 달쯤 지났을 무렵이다. 시댁에서 김장을 하고 온 날이라 지쳐 보였나 보다. 김치통을 나르느라 정신없는 우리를 산책을 다녀오던 옆집 부부가 선뜻 도와주었다. 이웃이긴 해도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기에 순간 고민을 했지만 피곤하던 터라 굳이 마다하지는 않았다. 집이 이층인 탓에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니 미안했지만 빨리 끝내고 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고마운 마음에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다. 별 반찬은 없어도 새로 담은 김치에 밥 한 끼 먹자고 했더니 일찍 와서 거드는 모습이 불편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함께 하는 식사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편했다. 네 살 난 아이도 낯선 집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기웃대더니 고등학생인 아들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이 잘 놀았다. 
친정이 멀어 자주 가지 못해 늘 엄마 밥이 그리웠는데 처음 먹어보는 우리 시댁 김치가 엄마가 해 주시던 맛이라며 잘 먹었다. 그 모습이 예뻐 보이면서도 안쓰러웠다. 엄마 밥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싶어 짠했다. 그날 이후로 시댁이나 친정에서 가져오는 반찬은 늘 나눠서 먹었다. 반찬을 핑계로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정이 들고 편해졌다. 시래깃국을 끓여 같이 먹기도 하고 잘 익은 열무김치에 보리밥을 슥슥 비벼 먹기도 했다. 입맛이 비슷해 반찬이 신경 쓰이지 않는 이웃이라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친구처럼 언니처럼 잘 지내던 터라 아이도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왔다. 
형들 방에 있는 이층침대가 좋다며 가끔 자고 가기도 했다. 쌍둥이 아들도 녀석이 귀여운지 부족한 용돈에도 종종 마트에도 데리고 가고 운동장에도 데리고 다녔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잘 놀아주는 형들을 아이는 잘 따랐다. 새내기 대학생이 된 아들이 타지에서 지내느라 비어있는 방에서도 혼자 잘 노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장미꽃이 피기 시작하던 5월.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시간인데 아이가 현관문을 연신 두드리며 나를 부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나를 부르는 소리도 보통 때와는 달랐다. 늘 참새처럼 지저귀던 아이였는데 어쩐 일인지 목소리에 다급함과 화남이 묻어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마음에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아이가 작은 가방을 들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서 있었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가방 속에는 옷가지 몇 벌과 장난감 자동차와 가장 아끼는 원숭이 인형이 들어있다. 씩씩대며 서 있는 모습에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몇 번을 말해도 엄마가 못 들은 척해서 화가 났단다. 엄마가 미워져서 왔다며 녀석은 제집인 양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선다. 엄마한테 혼나면 어떡하냐 물으니 여기 온 걸 모르니 걱정하지 말라며 아이스크림부터 찾는다.            
이번엔 가방까지 챙겨왔으니 잠시 놀러 온 게 아닌가 보다. 다섯 살에 첫 가출을 한 녀석의 맹랑함에 웃음이 난다. 가방 속에 있던 자동차는 거실에 줄을 세워두고, 옷은 이층침대에 던져둔다. 제집처럼 편하게 행동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이 엄마한테 잘 도착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다. 가방을 챙겨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을까.
오래오래 같이 살자 약속하고 좋아하는 간식으로 파티도 했다. 원숭이 인형까지 의자에 앉혀두고 노래도 부르고 종이접기도 하고 한참을 신나하더니 다시 가방을 챙긴다. 나랑 살기로 했지만 엄마가 자기를 보고 싶어 하니 집에 가야 한단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잠도 매일 이층침대에서 잘 수 있고 아이스크림도 날마다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이제 부터는 여기가 네 집이니 같이 살자고 말했다. 조금 전 손가락까지 걸었던 약속을 들먹이며. 그때, 아이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짐짓 딴청이었지만 당황해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꼭 깨물고 싶었다. 다섯 살짜리 녀석이 감행한 세 시간의 가출은 내게 선물 같은 행복이었다.
이제부터는 엄마랑 사이좋게 지내겠다며 아이는 떠났다. 슬슬 걱정이 되는지 여기에 왔었다는 건 비밀로 하자며 또 다시 손가락을 걸고는, 고무신을 신고 돌아가는 녀석의 발걸음이 가볍다. 짧은 가출을 끝낸 아이가 엄마 부르며 뛰어가는 소리에 오후 햇살에 꾸벅 졸고 있던 골목길도 깨어난다. 거실이고 방이고 제 마음대로 흩트려 놓고 간 뒷정리를 하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온다. 집으로 돌아간 아이가 궁금하던 차에 아이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몇 번을 물어도 할머니 집에는 절대 안 갔다고 하더니, 엄마에게 전화를 해 달라고 했단다. 남겨둔  마이쥬를 내가 먹을까 봐 걱정되는지, 먹지 말고 잘 챙겨두라고. 아이가 먹다 남은 마이쥬 달콤한 향이 자꾸 유혹을 한다. 먹을까 말까.

신발 속 작은 돌멩이 하나
더위가 힘 자랑하는 칠월. 열 시를 막 지났을 뿐인데 벌써 햇살이 뜨겁다.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해도 흐르는 땀은 어쩔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에어컨을 켜려다 말고 나갈 준비를 한다. 시원한 나무 그늘과 상쾌한 바람이 있는 곳으로 가는 마음이 바쁘다. 조금은 가파른 입구를 지나면 숲의 시작을 알리는 흙길이 반겨주는 나지막한 산. 집과 가깝기도 하고 찾는 사람들도 제법 많은 곳이라 혼자라도 편하게 올 수 있다. 세상은 더위에 지쳐있어도 나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숲은 딴 세상이다. 저만치 나란히 걷는 노부부의 모습이 보인다. 수십 년을 함께 했을 부부의 모습. 걷는 뒷모습마저 닮아 보인다.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슴속 가장 단단한 곳에 새겨본다.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서야 신발을 벗어들고 흙길을 걸어본다. 그날 이 길 위에서 환하게 웃던 언니 얼굴이 떠오른다.
십 년 가까이 알고 지내는 언니는 선천성 소아마비로 다리가 많이 불편하다. 차에는 항상 휠체어가 들어있고, 집에서도 가끔 바퀴가 달린 책상 의자를 타고 다닌다. 십분 이상 걷거나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쉽지 않다. 다리가 조금 불편한 대신 손재주가 좋아 코바늘로 뜬 수세미를 수시로 선물해 준다. 솜씨가 좋아 지인들에게 가끔 옷이나 가방을 주문받기도 한다. 어깨가 아프다면서도 늘 뜨개질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언니는 산을 유난히 좋아한다. 바람이 부는 날의 모습과 비 오는 날의 모습이 다르고, 봄의 색과 가을의 색이 다르고, 달빛이 고운 밤과 햇살이 좋은 날의 모습이 다른 산.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어서일까.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산이지만 언니는 수시로 산을 보러 다녔다. 잘나고 못남 없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가끔은 숲이 품은 작은 오솔길을 걷는 꿈을 꾼다고 했었다.
마음이 어수선해 산을 찾았던 날. 늘 다니던 곳인데 그날은 유난히 흙길에 눈이 갔다. 꿈까지 꾼다는 언니의 소원이 생각나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왜 한 번도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수시로 산책을 하면서도 언니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니 참 못난 동생이다 싶어 미안했다. 며칠 고민하며 생각한 일을 아들에게 의논했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아이가 힘들긴 하겠지만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한다. 친구도 몇 명 섭외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그 마음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바람도 쐬자며 언니와 약속을 정했다. 만날 날을 기다리는 며칠은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설레었다.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맑던 날. 평소 만나던 곳이 아닌 낯선 주차장에서 언니와 만났다. 아들과 친구들을 소개하고 오늘의 계획을 얘기했다. 놀라 어찌할 줄 모르는 언니를 아들이 아기를 업듯 업었다. 어릴 적 아버지 등에 업힌 이후로 남자 등은 처음이라며 수줍게 웃는 얼굴이 사춘기 소녀 같았다. 주차장에서 산 입구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아도 경사가 있어 언니가 혼자 걷기엔 쉽지 않은 길이다. 어쩌면 혼자서는 걸어 볼 엄두조차 내보지 못할 길인지도 모른다. 차 마시러 가는 줄 알고 있었기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연신 눈물을 훌쩍인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면서도 언니는 한껏 들떠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아이들의 얼굴엔 힘듦보다 뿌듯함이 가득하다. 그렇게 걸어 보고 싶다던 오솔길에 도착해서는 한참을 서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산을 마음에도, 눈에도 담는다고 했다. 아이들도 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오직 산의 소리만 가득한 고요의 시간이었다. 등산을 위해 오르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건넨다. “조심하세요. 그래도 참 대단하십니다”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같이 걷던 아들 친구가 갑자기 신발 속에 작은 돌멩이를 하나 넣었다. 신발 안으로 들어온 돌멩이를 털어 내는 게 아니라 일부러 넣는 게 의아했지만 장난이라 하기엔 그 모습이 너무 진지했다. 돌멩이가 있으니 불편한지 자꾸 신발을 툭툭 치면서도 빼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끝없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다정한 모자 같았다. 초록 잎 비집고 든 볕뉘 한줄기 나란히 걷는 걸음 뒤를 따른다. 조금 걷다가 쉬고, 또 걷다 쉬고를 반복하며 겨우 산 입구를 면한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았다. 눈감고 가만히 듣는 산의 소리가 좋았다.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과 숲의 냄새가 너무 상쾌했다. 처음으로 만져본 자그마한 발은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듯 온통 굳은살 투성이다. 부끄러운 듯 괜찮다며 발을 빼는 언니를 꼬옥 안아 주는 걸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모두 지쳐 있었지만 표정은 깜깜한 밤하늘의 별보다 더 밝아 보였다. 아이스팩으로 발 찜질을 하던 언니에게 한 녀석이 주뼛대며 다가가더니 손을 꼬옥 잡는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놀릴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도 한 번도 없었다는 고백을 한다. 신발 속에 작은 돌멩이를 넣고 걸어 본 그 짧은 시간도 엄청 아프고 불편했는데 많은 것들에 힘들었을 이모에게 대단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언니에게서 특별한 하루를 선물해 줘서 고맙다는 문자가 왔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온 아들도 생각이 많았던 하루였다고 한다. 늘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누렸었던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한다. 나 역시 그런 하루였다. 조금은 특별했던 하루가 따뜻한 기억으로 모두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나뭇가지 흔들던 바람이 어깨를 토닥이고 그늘이 가득한 길은 시원하다. 천천히 흙길을 걷는다. 발가락 사이 파고드는 돌멩이 모른 척 그냥 걷는다. 그날 녀석들의 진지했던 얼굴과 나보다 더 어른스러웠던 모습에 생각이 많아진다. 어쩌면 오늘도 신발 속에 작은 돌멩이 하나 넣고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발 속에 돌멩이야 털어 내면 그만이라도 그 마음만은 털어 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가 눈부시게 푸른 산을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