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수도(碧波水道)

    바다에 길이 있다.

파아란 바다 넘실넘실 춤을 추는 파도 그 위로 달리는 배들의 길이 있다. 광활한 바다라고 해서 아무 곳이나 다닐 수 없다. 바다에는 물길이 있고, 계절에 따라 바람이 일고 파도가 인다. 그리고 섬과 암초 때문에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다닐 수 없다. 벽파수도란 글자 그대로 파아란 파도 사이로 나 있는 뱃길을 말한다. 파아란 파도의 뱃길이라고 해서 모두가 벽파수도는 아니다. 벽파수도는 아름다운 뱃길을 말한다. 아름다운 뱃길은 경치가 아름다워야 한다. 먼 수평선이 있어야 하고, 섬과 갈매기의 노래 소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포구와 괴기 절묘한 바위와 나무도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3,000여 개의 섬이 있지만, 거제도 남단 해역만큼 아름다운 곳은 없다.
  여기를 이름하여 벽파수도라 한다.
 
 거제도에는 60여 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50여 개는 무인도다. 무인도의 대부분이 벽파수도 안에 있다. 벽파수도에는 한산도, 비진도, 추봉도, 죽도, 범벅섬, 대매물도, 소매물도, 뿔섬, 홍도, 장사도 등이 통영군에 속해 있는 섬들이고, 대병대도, 소병대도를 비롯하여 가오도, 어유도, 등대섬 등이 거제도에 속해 있는 섬들이다. 통영시에 속해 있는 섬이 조선조 말까지는 거제에 속해 있었는데, 한일합방 후 1914년 3월 28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제군이 통영군에 편입되므로 그 때부터 통영에 속해 있었다. 1951년 10월 14일 6.25 전쟁 중에 거제군이 복군되었다. 복군의 기쁨과 군청소재지 위치 문제와 지역적 갈등으로 섬을 되찾아오는데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한산도는 유서 깊은 충무공의 전승지로 가까운 통영에 속해 있는 것이 바람직 하지만 장사도나 대매물도, 소매물도, 추봉도 특히 호도는 지역적인 거리로 보더라도 거제에 속해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두고 온 자식처럼 거제 사람들의 마음은 허전하다. 벽파수도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은 가라산이나 노자산 그리고, 천장산이다. 그러나 그 곳보다 차가 다니기에 불편한 이 도로는 군사용 작전 도로다. 이 길을 따라 한참 가면 멀리 남해, 삼천포 앞 바다를 비롯하여 통영항이 눈앞에 보인다.

잔잔한 바다에 여러 가지 모양을 한 섬들이 있다. 석양에 조는 듯한 섬 사이로 배들이 곡예를 하듯 빠져 다닌다. 부산에서 여수, 통영으로 다니던 뱃길과 통영에서 해금강으로 다니는 뱃길이다. 여기가 다도해의 벽파수도다. 사거리 역할을 하는 중심 수로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괴로울 때 나는 벽파수도를 바라보면서 마을을 달래곤 한다. 벽파수도를 찾아오는 해안변 절경지만 봐도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같은데, 대포 뒷산 돌출부에서 내려다보는 벽파수도의 비경은 그야말로 천혜의 비경이라 할 만하다.

  섬은 저마다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섬의 모양 따라 이름이 지어져 있다. 섬의 모양도 보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계절과 기후에 따라서도 다르게 보인다. 긴 뱀 같이 생겼다고 장사도라 하는 이 섬은 여기서 보면 뽕잎을 따먹고 있는 누애 같이 보인다. 뿔이 오뚝 솟아 있는 듯한 뿔섬은 가까이에서 보면 왕관같이 생겼다. 가오리 같이 생긴 가오도는 조개섬 같이도 보인다. 저마다 특색이 있고,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섬들은 꿈을 꾸는 듯 가물거린다. 벽파수도, 고요 속에 졸고 있는 섬들은 일깨우는 파도가 있고, 한가로운 갈매기의 노래 소리가 있다. 그리고 바다를 불태우며 새벽을 열어 주는 찬란한 일출과 황금빛으로 물들여 놓은 낙조가 있다. 불타는 듯한 아침 바다는 희망이 솟고, 황혼이 물던 바다는 연인의 치마폭처럼 안온하고 정겹다.

  벽파수도의 길은 억겁의 세월 속에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통구미 배에서부터 노 젓는 배, 풍선을 단 장배, 통통배, 짐을 실은 화물선, 크고 작은 어선들 최근에 와서는 해금강을 비롯하여 벽파수도가 해상 관광지로 부상하면서 유람선의 전용 뱃길이 되기도 했다.
  섬과 섬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날렵한 유람선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소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물위에 되새겨 놓는다. 여기서 듣는 노래 소리는 벽파의 물결 따라 흘러흘러 옛날로 되돌아간다.
 
 섬도 바다도 추억의 꿈결에 잠든 벽파수도는 달빛이 교교(皎皎)하다. 달이 지고 난 바다는 별빛이 청단에 수를 놓은 듯하다. 안개 낀 벽파수도는 뱃길을 감춰 놓는다. 안개는 좀처럼 뱃길을 열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 섬들은 숨박꼭질을 한다. 안개 낀 벽파수도는 구름 위에 산들이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때는 하늘나라에 온 것 같다. 구름을 타고 다니는 기분이다. 

벽파수도는 온유한 어머니 같이 조용하다가 천지를 뒤엎어 버릴 듯이 기상이 장엄한 폭풍우가 쏟아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아름다운 벽파의 뱃길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바람 한 자락이 일고 나면 성난 파도는 잠을 자고 솜사탕 같은 뭉게 구름이 솟아오른다. 어떤 양털보다도 부드럽다. 고운 뭉게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다리를 놓는다. 꽃구름을 타고 오던 선녀가 오색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서 벽파수도 위에 춤을 추는 듯하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선경(仙境) 속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황홀하다.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벽파의 비경은 각박한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찌들은 마음을 청아하게 하는 활력소가 된다. 고적할 때는 벽파수도를 찾아와서 마음을 달랜다. 벽파수도와 같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면서 청아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어떤 고난이 와도 참고 견디는 인내를 배우고 싶어 서다. 광활한 벽파수도의 뱃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무아의 경지로 빠져든다. 가슴에 멍울져 있는 한은 어느새 실타래 풀리듯 풀어진다. 벽파수도는 뱃길뿐 아니라 인간의 길도 있다. 그리고, 마음의 길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은하의 잔파가 살랑이는 벽파수도의 뱃길 위에 갈매기 한 쌍이 평화롭게 날고 있다. 사랑의 연가를 부르는 갈매기의 신혼길이 벽파수도에 펼쳐진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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