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 - 144」
      양지암 등대

      강  민  진

  장승반도 끄트머리
  정수리 솔을 얹고

  장엄한 일출 기운
  양지암은 가득 안아

  툭트인 쪽빛 바다에
  종일 눈길 보내고.

  흰 이빨 드러내는
  파도는 거칠어도

  아찔한 직벽에다
  바위손 고이 길러

  밤마다 눈에 불 밝혀
  생명길을 비춘다.

  십 척이 넘는 키에
  귀태의 하얀 갑주

  든든한 물새의 벗
  어둠을 쫓는 전사

  충무공 정신을 받아
  옥포만을 지키누나.

◎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 한 편2

 고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는 권농가라고도 하겠다. 
 명랑하고 활기찬 농촌의 아침, 춘곤에 빠진 머슴아를 깨우며 구시렁거리는 사랑 샌님의 군소리가 생동감이 있어 미소 짓게 한다. 그러나 정작 이 시조의 작가이신 남구만 선생은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을 터인즉 농사일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못했지 싶다.

    풍파에 놀란 사공(沙工)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워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만 하리라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있는 장만(1566-1629)의 작품이다. ‘풍파’와 ‘구절양장’은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배와 말은 문신과 무신을 상징한다 하겠다. 바다의 거친 바람과 파도에 놀란 뱃사공이 배를 팔아 말을 샀다. 그랬더니 꼬불꼬불한 산길을 말을 몰고 오르내리는 것이 물길보다 더 어려웠다. 이후론 배도 말도 그만두고 농사를 지어야겠구나. 임진왜란이며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 파란만장한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본 소회를 읊은 것이리라. 하지만 밭갈이 즉 농사일을 너무 쉽게 본 것이라고도 하겠다. 
 조선 선조때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譚)에 ‘한상국(韓相國)의 농사’ 이야기가 나온다. 상국(相國, 재상) 한응인(韓應寅, 선조 때의 우의정)이 신천 땅에서 상중에 있을 때, 온 나라에 왜구가 가득하여 마음 놓고 살지 못했다. 상국이 가족을 데리고 시골에서 종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오뉴월에 벼를 두 번 매어 이랑에 가득히 푸른 물결을 이뤄 심히 즐거웠다. 상국이 막대를 짚고 논두렁 위에 서서 바라보고 마을의 늙은 농부에게 자랑을 했다. “김을 두 번 매어 창운이 물결치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오.” 늙은 농부가 살펴보니 논이 있는 것은 벼가 아니라 모두 피였다. 종이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일찍이 전원을 보지 못하였다. 하루아침에 시골의 논밭에서 생활하니 매어 버리는 것은 아름다운 벼요 북돋워 심는 것은 피였다. 그러나 온 집안은 어두워 알지 못했다. 신천 사람들이 웃어 매양 그릇된 일을 보면 반드시 “한상국의 농사”라고 하니 말세에 사람 쓰는 것이 다 이런 종류이다.  

 ‘한상국의 농사’는 백성의 다스림을 농사에 빗대어 말세용인(末世用人)의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풍자함으로써 문학적 감동보다도 세상 사람들에 대한 교훈을 주고자 한 글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 전문가가 있는 법이다. 정통 농사꾼의 오랜 경험과 식견은 살아있는 교과서인 셈이다. 예를 들면 콩은 순을 집어 주어야 가지가 많이 벌고, 넝쿨 지면 우둥을 싹뚝 싹뚝 베어 주어야 꽃이 잘 핀다. 그리고 꽃이 필 무렵이면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옥수수는 두 개씩 모아 심는 게 좋고, 들깨는 꼭 이식을 해야 하며, 호박은 애호박을 자꾸 따 주어야 많이 연다는 따위들이다. 몇 년 전 일이다. 귀한 수국의 종자 목을 빨리 키우고 싶어 밑거름을 준다는 게 그만 지나치게 주어 다 죽이고 말았다. 
 맹자(孟子)가 비유한 ‘조장(助長)의 우(愚)’를 범하고 만 셈이었다. 맹자가 제자 공손축(公孫丑)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르치면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너그러운 마음이 곧 호연지기인데, 이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반드시 부단한 노력과 정진이  필요하다. 그러나 빨리 성과를 거두려고 ‘조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알묘조장(揠苗助長)’의 예를 들었다. 

 송나라 사람 중에 벼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어 벼 싹을 뽑아 놓은 자가 있었다. 그가 돌아와서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매우 피곤하다. 내가 싹이 자라도록 도와 주었다.’고 하자, 그 아들이 달려가서 보았더니 벼 싹이 말라 죽어 있었다. ‘알묘조장’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알묘조장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지 않고 억지로 힘을 쓰거나 꾀를 내어 일을 이루려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모든 일에는 적기가 있고 적정(適正)이 있다. 시기가 성숙하기를 기다리고 과부족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에 서기를 추구해야 한다. 농사일에도 배울 것은 많다. 사소한 일이라도 한 가지씩 깨우쳐가는 즐거움이 어떠한지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현대시조발발행인 능곡이성보

시조 작품 <양지암 등대>는 거제도 동쪽 끝자락이 있는 양지암에 세워진 등대를 두고 3수 연작으로 읊은 강민진 시인의 작품이다.

 뭍에서 삐죽 튀어나온 지형인 양지암 끝자락에 망망대해를 밝히는 등대가 오롯이 서 있다. 양지암 등대는 1985년 운영을 시작한 무인 등대다. 이 등대는 늦은 밤 인근 능포항과 옥포항을 오가는 선박의 항로를 든든하게 비추는 길잡이다. 거제도에서 해를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양지암의 다른 이름은 상사바위다. 상사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지금부터 약 400여 년 전인 조선 중기 ‘이상서’라는 양반이 외동딸과 몸종을 데리고 능포로 유배를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능포는 원래 능개라 불렀다. 바닷가에 늪이 있는 마을로 그 늪에 마름이 풀이 자생하는 개라는 뜻에서 능포(菱浦)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상서의 외동딸의 이름은 국화였고 몸종은 삼돌이였다. 국화는 총명하였고 고을에서 보기 드문 규수였기에 청년들은 국화를 흠모했으나 양반 신분이었기에 사랑을 고백하기는 언감생심이었다. 국화에의 짝사랑은 삼돌이도 마찬가지였다. 이상서는 귀양살이가 풀리길 바라며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삼돌이의 짝사랑은 끝내 상사병이 되어 자리에 눕고 만다. 식음을 전폐한 삼돌이를 불쌍히 여긴 국화는 죽 한 그릇을 먹였고 얼마 후 삼돌이는 죽고 말았다.
 
 그런데 삼돌이가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밤 실뱀 한 마리가 국화의 몸을 감쌌는데 도저히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에 퍼졌고 이상서는 용하다는 의원이며 점쟁이를 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밤이면 뱀은 국화의 꿈에 나타나 삼돌이로 변해 어디론가 날아갔다. 삼돌이는 국화를 안고 무지개다리를 건너다녔는데 이 무지개다리를 삼돌이는 밟을 수 있었지만 국화는 밟지 못하는 다리였다. 국화는 무지개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삼돌이의 손을 잡고 발버둥 치다 결국 떨어지면 늘 꿈에서 깨어났다. 낮에는 뱀에게, 밤에는 무서운 꿈에 시달리던 국화는 비몽사몽 속에 여러 날을 헤매다가 어느 날 양지암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불렀다. 양지암은 처녀 총각들의 혼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할 때 찾아가 고사를 지내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양지암은 장승반도의 끄트머리에 있고 정수리에 솔을 이고 있다. 저 멀리 현해탄에서 솟아오르는 / 장엄한 일출 기운을 양지암은 가득 안아 / 이름마저 양지암이 되었다. 그 양지암에 무인 등대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 툭 트인 쪽빛 바다에 종일 눈길 보내고 / 있는 등대다. 양지암 앞 바다는 조선소가 들어설 정도로 수심이 깊고, 청정해역 인지라 쪽빛이다. 툭 트인 바다를 마주하기에 / 흰 이빨 드러내는 파도는 거칠어도 / 정감이 일기도 한다. 양지암은 아찔한 직벽의 끝자락에 있다. 그 직벽에 풍란이며 석곡이며 세뿔석위, 바위손이 도배하듯 널려 자생했다. 사람의 손길이 거쳐 간 지금 남아있는 식물로 이름값 하기는 바위손도 그 하나다. 양지암 등대는 / 밤마다 눈에 불 밝혀 생명길을 비춘다. / 그 생명길은 뱃길이다. 상사바위에 자리한 양지암 등대는 / 십 척이 넘는 키에 귀태의 하얀 갑주 / 로 솟아 있다. 귀태의 하얀 갑주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아니하다. 갑주는 갑옷과 투구를 말할 진데 등대의 위용이 귀태나는 하얀 갑주를 입은 것 같단다. 멀찍이서 보기만 해도 / 든든한 물새의 벗이요 어둠을 쫓는 전사 / 같기만 하다. 시조 작품 <양지암 등대>에 충무공이 등장했다. 임진란 첫 번 승첩지인 옥포해전을 모른다면 충무공의 등장이 조금은 생뚱맞기도 하겠다. 양지암 등대의 자태는 마치 충무공 정신을 받은 듯하여 옥포만을 지키고 있단다. 암울한 壬寅年이 저물어 간다. 양지암 등대의 불빛이 희망의 불빛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능곡 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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